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01화 (601/862)

25화. 에레보스 (8)

“호오!”

“결국 올림포스까지 차지하고 말았군.”

나타태자는 하늘을 따라 가득히 퍼지는 메시지를 보며 탄성을 터뜨렸고, 이랑진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가 크로노스의 후계를 자처하고, 대지모신을 거꾸러뜨렸을 때부터 이미 그의 승리를 예감하긴 했다지만.

그래도 정말 연우가 올림포스의 주신 자리를 꿰차고 나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래 신왕좌가 세 개로 분리된 건 크로노스와 같은 독재자가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한 저들의 노림수이기도 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 막을 수 없게 되어 버린 셈인가?’

이랑진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사실 올림포스의 신왕좌가 없어지고, 주신의 자리가 세 개로 나뉜 것은 제우스 삼 형제가 각자 지분을 가지려 하면서 생긴 현상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크로노스의 탄생을 우려한 다른 사회들의 줄기찬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신왕좌를 독차지하려 했던 제우스로서는 울분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최대한 빨리 혼란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두 형에게도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하지만 새로운 형제인 연우가 신왕좌를 일통해 내고 말았으니.

만약 제우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참 궁금하기도 했다.

녀석으로서는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깊은 잠에 든 사이, 올림포스는 박살이 나다시피 하고, 영원할 줄 알았던 자신의 자리도 빼앗기고 만 셈이었으니.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천계의 습성인 것을.

결국 제 자리는 자신이 직접 지키지 않으면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제우스와의 새로운 분쟁이 생길지도 모르는 것이고.’

이랑진군은 인간적으로 연우가 어느 정도 마음에 들고, 끌리는 면도 강했다. 하지만 천교의 수장으로서는 도저히 왕권이 통합된 올림포스에 대해서 계속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할 수가 없었다.

우라노스에서부터 크로노스에 이르기까지, 당시 올림포스가 갖고 있던 힘은 천교에도 맞먹을 정도였으니.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크로노스의 탄생은 우려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내심 제우스가 깨어나 조금이나마 내부적인 갈등을 겪길 바랄 수밖에 없었고.

‘물론, 그것도 약속대로 순결의 돌이 우리에게로 건너오고 난 뒤의 이야기겠지만.’

듣자 하니 순결의 돌로 헤르메스를 비롯해, 에레보스의 독기에 감염된 여러 신들의 저주와 독을 치료해 주었다던가.

어쩌면 천마증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로서는 몸이 잔뜩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때.

“그나저나.”

이랑진군은 말을 꺼낸 나타태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느 냐는 얼굴.

“뇌진자가 골치 많이 아프겠는걸?”

이랑진군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천계에 두고 온 동료가 길길이 날뛰겠다 싶었던 것이다.

타르타로스와 에레보스에 진출한 자신들을 지원해 주는 역할만 해도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게 아닐 텐데, 이제는 남은 아스가르드의 뒤처리도 감당해야 할 판국이니.

그리고 그건 아마도 동맹군의 다른 세력들, 니플헤임이나 동마왕군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이제 와서 아스가르드가 연합군을 탈퇴했다고 한들, 동맹군이 그걸 호락호락하게 봐줄 이유가 없잖은가.

아마도 지금쯤 아스가르드는 어떻게든 동맹군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물밑 교섭을 한창 시도하고 있겠지.

물론, 동맹군은 아스가르드로부터 각자 많은 이권을 뜯어내기 위해 날을 바짝 세울 테고.

어쩌면 이를 지켜보고 있는 다른 사회에서도 숟가락이라도 하나 얹어 보려 할지도 모른다.

그런 험난한 협상 과정을 유리하게 이끌려면…… 아마도 뇌진자가 머리를 이만저만 쥐어뜯어야 할 게 아닐 것이다.

“그놈, 요즘 머리도 자꾸 빠지는 것 같다고 투덜거렸었는데. 이번에 가면 아주 훤하겠어. 하하!”

나타태자는 지금쯤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을 뇌진자를 떠올리면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면서 이랑진군에게 말했다.

“여하튼 약속한 대로 타르타로스 탈환은 물론, 올림포스의 복구까지 도왔으니…… 이제는 우리 몫을 요구할 때로군.”

“그렇지.”

“자네가 봤을 때는 어떤가? ###이라면, 승산이 있어 보이는가?”

“전쟁에 있어서는 나보다 그대가 더 눈썰미가 좋지 않나?”

“그렇긴 하지. 그래도 우리가 지금부터 상대해야 할 적들이 어디 만만한 놈들이던가.”

이랑진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번 일은 천교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들과 대립을 해 왔던 절교는 물론, 복마전과도 연루되어 있었다.

복마전은 ‘사회’라고 칭하기에는 아주 적은 인원이지만, 전력만큼은 논외였다.

특히 복마전을 다스리는 동주칠마왕은 천마의 또 다른 얼굴, 제천대성이 포함되어 있는 만큼 아주 막강했고.

특히 그들의 맏이, 우마왕(牛魔王)은 소싯적에 크로노스도 직접 충돌하기를 꺼려 할 정도로 뛰어났던 자.

태초의 파편에서 깨어나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그는 천교로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으니.

연우가 그를 효과적으로 상대해 줄 수 있을지도 아직까지는 미지수였다.

‘올림포스를 차지한 것만 봐도, 이미 ###은 괴물이라 할 수 있지만…… 확실히 천계는 그보다도 더한 괴물들이 우글대는 곳이니.’

사실상 천교 내에도 ‘원로’를 자임하면서 내정에는 일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삼황오제(三皇五帝)와 서왕모 같은 작자들이 있는 데다가.

멀리는 탑을 세웠다는 트리니티 원더도 있으니.

연우와 엇비슷하거나, 그보다 더할지도 모르는 존재들을 대충 헤아려 봐도 열 손가락은 이미 쉽게 넘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천계에 있어 벽이나 다름없는 올포원도 있고.

여하튼.

이랑진군으로서는 연우가 우마왕의 상대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아테나는 신왕좌를 복구한 뒤, 그곳을 공석으로 두었다. 현재 연우가 천계로 올라오지 못하니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다만 내정은 그녀가 직접 연우를 대리하여 곧장 뒷정리에 들어 갔다.

그동안 티탄-기가스에 가담했던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을 진행 하는 한편, 전란 중에 부서진 성역도 빠르게 복구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아테나는 직접 옴팔로스의 지하에 마련된 감옥으로 이동했다.

티탄-기가스의 지배에 저항하다, 반역자라면서 갇힌 올림포스의 ‘원로’들이 그곳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원로들이 제대로 힘만 썼더라면 올림포스가 그리 쉽게 티탄-기가스에 함락되지 않았을 테지만.

티탄-기가스 쪽에 대지모신이 있어 그들이 생각보다 힘을 제대로 잘 발휘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해야 했다.

그들 대부분은, 대지모신이 잉태한 이들이었으니까.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개념적인 존재로 지내면서 힘쓰는 법을 잊은 이들도 허다했다.

끼이익!

아테나가 철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거대한 홀.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갇혀 있다고 했던 원로들이 보이지 않았다.

인형(人形)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대신에 크고 작은 크기를 자랑하는 수많은 빛무리가 있었다.

순간, 다양한 목소리가 아테나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너는……?』

『저 아이…… 누구였지? 어딘가 낯이 익은데.』

『멍청하긴! 그새 잊은 겐가? 제우스의 장녀이지 않은가!』

『아, 그랬지…….』

『너무 오랫동안 잠에 취해 있어서 그런지 잊고 있었네그려.』

『한데, 제우스의 장녀가 여긴 어떻게 온 거지?』

『티탄-기가스가 있지 않았나?』

『아테나.』

『네가 어떻게 여기에……?』

정리가 되지 않는 목소리들.

도대체 몇 개나 되는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마치 수많은 모기가 귓가에서 왱왱 울어 대는 것만 같았다.

개중에는 중구난방인 것도 많아, 의사 전달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어 다니는 혼돈이나 대지모신과 달리 어느 정도 정제는 되어 있어 알아듣기는 쉬웠다.

이 목소리의 주인들이 전부 원로들이었다.

올림포스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까마득한 세월이 지나면서 자신의 존재조차 거의 잊어버려 이제는 최소한의 의식만 남은 이들.

타나토스, 케르, 모모스, 포트니아…… 그리고 진짜 네메시스와 니케까지.

아테나는 그들을 보면서 조용히 예를 갖췄다.

“제우스의 딸, 아테나가 원로분들을 뵙습니다.”

『인사는 그만하면 되었고.』

『바깥의.』

『바깥의 이야기를 해 다오.』

『네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다른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 아니냐?』

그동안 세상의 법칙이 되어 깊은 잠에 들다 말고, 티탄-기가스에 의해 이곳에 강제로 갇히게 된 그들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테나는 원로들에게 당신들은 모두 자유라 말하면서, 올림포스의 탈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였고.

이곳에 갇힐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던 그들은 크게 반색했다.

『잘되었구나. 정말로.』

『이제 다시 편히 잘 수 있겠군. 이곳 세상은 너무 갑갑해.』

『그나저나 크로노스의 아들이 먼 곳에서 태어나 이곳으로 돌아왔다니.』

『’모이라이’가 어렴풋이 말하던 것이 이거였나……?』

모이라이는 운명을 주관한다는 세 여신을 의미했다. 16층의 앉은뱅이 세 여신과도 어느 정도 상통하는 면이 있어 천계에서도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그녀들이 연우와 관련된 어떤 예언을 했던 것일까?

하지만 아테나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다른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아테나야.』

『네가 직접 이곳에 왔다는 것은 제우스를 깨우기 위해서겠지?』

“예. 그렇습니다.”

아테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티탄-기가스는 옴팔로스를 차지하고도, 제우스의 거처를 찾아내지 못해 그를 따로 제거하질 못했다. 그의 거처가 너무 비밀리에 숨겨져 있어 천계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테나는 알고 있었다. 제우스의 침실은 그동안 바로 녀석들의 턱밑에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원로들이 갇혀 있던 감옥, 바로 아래였다.

원로들의 허락이 없으면 절대 개방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티탄-기가스에게 발각되지 않았던 것일 뿐.

그러나 올림포스를 탈환한 지금, 아테나는 제우스를 따로 만나고자 했다.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야만 했으니까.

여태 곤히 잠들어 있던 그로서는 날벼락을 맞는 셈이겠지만.

그래도 아테나는 그의 장녀이자, 연우의 수석 사도로서, 이것은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할 책무라고 여기고 있었다.

『제우스, 그 가련한 것.』

『천마가 문제였던 게지…….』

『그래. 길을 열어 줄 터이니, 어서 가 보려무나.』

“감사합니다.”

아테나는 원로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어느새 반대편에 나 있는 석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우는 절대 치료하지 못할 것 같았던 에레보스의 독도 치료하는 데 성공한 상태. 어쩌면 천마증 역시 낫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테나로서는 조금이라도 빨리 제우스를 만나 증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아버……!”

그래서 수년 만에 제우스의 침실에 발을 들였을 때.

아테나는 그를 부르려다 말고, 도중에 헛바람을 들이켜야만 했다.

제우스가 곤히 잠들어 있어야 할 침상이…… 비워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 * *

“……뭐?”

연우는 아테나에게서 전달된 메시지에 눈을 크게 떴다.

제우스가, 사라졌다고?

『죄송합니다. 저로서도 어떻게 된 건지가 알 수 없어서…… 원로들도 정황을 모르고 있는 상태라, 보다 더 자세히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아테나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로서도 아버지가 갑자기 실종되었으니 초조해질 수밖에. 혹시 티탄-기가스를 피해 몰래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더욱 빨리 그를 찾아야만 했다. 다른 사회에서 이 사실을 알아서도 절대 좋을 것이 없었다.

연우는 아테나에게 면밀한 수색을 명령하고 난 뒤, 채널링을 닫으면서 역시나 굳은 얼굴을 한 크로노스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 미련한 것이, 대체 어디로…….』

크로노스는 제우스에 대해 항상 죄책감만 품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실종 소식에 초조해하는 얼굴이었다.

연우는 그에게 괜찮을 거란 말밖에 해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연우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제우스뿐만 아니라, 천교에서는 옥황상제가, 아스가르드에서는 오딘이, 딜문에서는 안이 사라지는 등, 각 사회에서 창조신으로 분류 되는 이들이 모두 감쪽같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부 천마증을 앓고 있던 이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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