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권
1화. 천마증(天魔症) (1)
시작은 올림포스에서 제우스의 실종에 대한 소식이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원래는 외부에 알려져서 좋을 게 전혀 없다고 판단해 같은 동맹군에도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칫 다른 사회에서 우연히 제우스를 발견했다간 그때 퍼질 파장이 작지 않을 테니, 미리 협조를 요청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헤르메스의 의견을 받아 니플헤임과 천교, 동마왕군에게도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이들은 천계에서도 손꼽히는 거대 사회이니, 그들이 갖추고 있는 정보망을 이용한다면 최대한 빠르게 제우스를 찾을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빚’이 생기는 셈이었지만.
제우스의 신병을 다른 사회에 빼앗겨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나을 테니.
하지만 제우스의 실종에 대해 동맹군에게 이야기했을 때.
동맹군의 얼굴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정확하게는 천교의 분위기가 좋질 않았다.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소.”
이랑진군이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양해를 구하면서 회의장을 벗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던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방금 전 삼신산에서도…… 비슷한 연락을 받았소. 상제께서도 갑자기 실종되었다고 하시오.”
“…….”
“…….”
제우스뿐만 아니라 옥황상제도 사라져?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는 것 같다. 그런 불안감이 동맹군의 머릿속을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 * *
[신의 사회, ‘말라흐’가 동맹군에게서 받은 요청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데이터를 정밀 탐색합니다.]
동맹군이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말라흐에 따로 협조 요청을 하는 것이었다.
자칫 이쪽의 약점을 보이는 행위가 될 수도 있지만.
말라흐는 르 인페르날과 함께 천계 내에서도 특별하게 분류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말라흐는 항상 절대선을 표방하고 있다 보니, 평상시에는 ‘협박도 협상도 통하지 않는 융통성 없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절대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신뢰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을 가져다주기도 했으니.
절대 다른 사회와 동맹을 하는 행보를 보이지 않고, 항상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면서도 여러 사회들의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보니 중재가 필요할 때에는 항상 그들에게 의지를 하곤 했던 것이다.
말라흐가 내세우는 표어도 평화(平和)와 안정(安定), 그리고 자애(慈愛)다 보니, 이런 일에는 적극적으로 나서는 편이었다.
그리고 다행히 말라흐는 이번 사안에 대해 심각성을 느꼈던지 절대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다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조사를 마치는 데 제법 시간이 소요되는 모양이었다.
[신의 사회, ‘말라흐’가 유사한 징후가 다수 발견되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현재 징후가 확인된 사회는 ‘딜문’, ‘멤파스’, ‘보그’ 등이 있습니다.]
[다른 유사 사례도 속속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신의 사회, ‘말라흐’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포착, 상세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현재 조사를 위해 다른 사회들에 협조 공문을 전송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신의 사회, ‘말라흐’가 비밀리에 동맹군에 접촉하고자 합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승낙하였습니다.]
[‘말라흐’의 사절, 미카엘이 강림합니다!]
연우의 허락을 받으며 강림을 시도한 사절을 보고, 동맹군은 모두 하나같이 놀라고 말았다.
“미카엘이, 직접?”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기에……?”
“그보다 가브리엘의 일 때문에 화가 잔뜩 나 있을 텐데. 괜한 신경전이나 벌이지 않으면 좋으련만.”
왕!
『강아지, 네 말이 맞다. 아주 일이 재미나게 돌아가고 있구나.』
아가레스는 펜리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크게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미카엘은 말라흐 내에서도 서기장 메타트론의 다음가는 서열을 자랑하는 대천사. 아니, 단순히 그런 정도를 넘어서, 말라흐 내에서 여러 천사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독보적인 영향력까지 끼치는 존재였다.
무력만 따진다면, 어쩌면 메타트론보다도 우위일지도 모른다고 평가받는 자.
악과 죄를 미워하고, 강경파로 분류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하는 편이었는데…… 그가 직접 사절로 나선다고?
미카엘의 성격에 대해서 익히 잘 알고 있던 이들로서는 우려를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존재가 아니면 그 누구도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좋은 악마는 죽은 악마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녀석이 여기서 무엇을 할지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하물며 가브리엘을 선악과로 만들어 버린 전적이 있는 연우에 대한 증오는 어떠할까!
그리고.
콰르릉!
지면에 작렬한 새하얀 벼락 속에서, 수많은 날개를 뒤로 젖히며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을 자랑하는 하얀 얼굴의 미남자가 나타났을 때.
[동맹군, ‘천교’의 모든 시선이 타르타로스에 고정됩니다.]
[동맹군, ‘니플헤임’의 모든 시선이 타르타로스에 고정됩니다.]
[동맹군, ‘동마왕군’의 모든 시선이 타르타로스에 고정됩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신의 사회, ‘말라흐’의 움직임을 감시합니다.]
[바알의 시선이 타르타로스에 고정됩니다.]
동맹군을 비롯해 르 인페르날의 시선도 단단히 고정되었다.
워낙에 위명이 자자한 미카엘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나 많은 인사들이 내가 하는 일에 이리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창백하게 보일 정도로 하얀 얼굴이 인상적인 미남자, 미카엘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띠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가레스처럼 육성이 아닌 진언을 내뱉다 보니,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강대한 신력이 섞여 타르타로스가 위아래로 잘게 떨릴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런 기대를.』
미카엘은 마치 무대 위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앵콜 요청을 받는 가수처럼 양팔을 뻗으면서 크게 소리쳤다.
『저버려서는 안 되겠지?』
그 순간.
팟!
미카엘의 신형이 아래로 움푹 꺼졌다.
“###……!”
“이놈이!”
여태 연우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레스와 헤라클레스가 본능적으로 앞으로 나섰다. 미카엘이 어디로 향하는지 뻔했던 것이다.
차아앙!
채챙!
아레스가 앞으로 내뻗은 검격과 헤라클레스가 내세운 도끼날이 교차하다 말고 도중에 멈췄다.
어느새 그들 앞에는 미카엘이 차갑게 웃으면서 서 있었다. 푸른 불꽃을 잔뜩 두른 창으로 두 무기를 밀어내면서.
『호오! 제우스의 가장 용맹하다는 두 아들이 사도로 들어갔다는 말은 들었지만, 신기하군?』
미카엘은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아레스, 헤라클레스와 다르게 한쪽 입꼬리를 크게 말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건방져.』
미카엘이 전진하면서 창을 위로 쳐올리기 시작했다. 올림포스에서도 손꼽히는 전사라는 두 사람의 합공을 오로지 힘만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타고난 완력만 따진다면 천계 내에서도 적수가 없을 거라고 내심 자부하고 있던 헤라클레스로서는 큰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미카엘은 차갑게 웃는 얼굴 그대로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를 힘차게 밀어냈다.
가가가각!
창끝이 위로 솟구치면서 강렬한 마찰음과 함께 불꽃이 수도 없이 튀어 오르다, 그 사이로 창날이 빠르게 회전했다.
퍼퍼펑!
불길로 이뤄진 창격(槍擊)은 마치 대포라도 되듯, 어마어마한 굉음을 동반하면서 단번에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를 몰아붙였다. 창날이 휘둘러질 때마다 마치 천둥이 바로 옆에서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는 겨우겨우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신체에 가해지는 충격까지 전부 흘려 낼 수는 없어 몸뚱이가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말았다. 머리가 온통 산발이 되고, 입고 있던 상의가 찢겨 단숨에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 차.
미카엘은 거머리 같던 둘을 치워 냄과 동시에, 곧장 연우의 뒤쪽에서 공간을 열고 나타나 하체를 쓸어 왔다.
쿠릉, 쿠르릉!
하지만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검고 붉은 벼락이 미카엘의 창격을 튕겨 냈다.
그리고 연우는 어느새 비그리드를 손에 쥐고서 거칠게 횡대로 휘둘렀다. 검붉은 벼락이 도중에 잘리면서 미카엘의 목을 금방이라도 칠 듯이 움직였다.
차아앙!
하지만 비그리드가 미카엘의 목에 닿기 직전, 창대가 불쑥 올라오면서 도중에 가로막혔다.
순간,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비그리드를 타고 전해지는 느낌이 제법 묵직했던 것이다.
미카엘이 이렇게 강했었나? 어쩌면 말라흐가 보유한 전력은 자신이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불어 마음 한편에서부터 새로운 감정도 솟구쳤다.
호승심.
녀석과 한바탕 제대로 승부를 벌여 보고 싶다는 욕망이 대가리를 든 것이다.
한동안 연우가 상대했던 적들은 숙적이라기보다는 원수에 가까웠던 자들.
승부를 즐기기보다는 그들의 목을 치는 데 집중해야만 했으니, 간만에 무인으로서의 충동이 불쑥 치솟은 모양이었다.
연우는 내심 그동안 인연만 맺어 왔지, 이렇다 할 큰 접점이 없었던 말라흐의 전력을 확인해 볼 겸 해서 빠르게 녀석을 몰아붙였다.
검뢰팔극이 연달아 터졌다.
쿠릉, 쿠릉, 쿠르릉!
비그리드가 휘둘러질 때마다 검붉은 벼락과 불길이 단번에 미카엘을 집어삼킬 듯 흉포하게 이글거렸다.
웬만한 신격들은 전부 회피하려 들거나, 큰 부상을 면치 못했던 위력들이었지만.
미카엘은 여유롭게 공세를 쳐 내는 것은 물론, 간간이 반격까지 선보일 정도였다.
때문에 도리어 날벼락을 맞게 된 건 다른 신과 악마들이었다.
사방으로 튀어 오른 파편들을 피해서 물러나야만 했던 것이다. 주변이 온통 폐허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검뢰가 오극에 다다랐을 때 즈음, 미카엘의 창격이 불길을 뚫고 연우의 목젖에 다다랐다. 그에 비그리드가 내려와 날과 날이 맞물리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비그리드와 창이 서로를 부러뜨리기 위해 으르렁거렸다. 서로 간에 한 치도 밀리지 않는 팽팽한 대치였다.
‘합일이라도 해야 하나?’
연우는 크로노스와의 합일을 아주 잠깐 고민했다. 한번 보기 시작한 승부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미카엘도 뭔가 숨겨 둔 패가 있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러던 그때.
지이이잉!
갑자기 심장 한편이 격하게 떨렸다.
현자의 돌이 울리고 있었다.
왜 이러나 싶어 눈살을 좁히는데.
『내 못난 형의 조각을 가장 많이 갖고 있다 들었는데…… 확실히 그럴 만하군?』
미카엘이 힘겨루기를 하다 말고, 뭔가를 느꼈는지 연우의 가슴 쪽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연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형?”
『아, 너는 필멸자라서 모르고 있겠군?』
미카엘이 시선을 다시 연우에게로 맞추면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웃었다.
『루시엘 말이야. 네놈이 심장 옆에다 처박은 거. 그거 나와 같은 쌍둥이가 남긴 거거든.』
“……!”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
한때 천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등대지기 루시엘…… 아니, 루시퍼가 미카엘과 쌍둥이 형제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이해가 되었다.
개념신이나 창조신과 같은 특별한 격을 지닌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카엘이 왜 이리도 비정상적으로 강한지.
『이제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불청객?』
그때, 연우와 미카엘 사이로 마기를 단단히 압축시킨 화살이 떨어졌다.
그냥 내버려 뒀다가는 부상을 면치 못할 위력이라, 연우와 미카엘은 마치 약속한 것처럼 서로를 밀치면서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들이 있던 자리로, 어느새 본체로의 현신을 마친 아가레스가 서 있었다. 수십 쌍에 달하는 검은 날개를 아름답게 펼치면서.
『늘 말했을 텐데? 이것은 내 것이다. 맛을 보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음이야.』
아가레스는 검은 마기로 물든 손을 혀로 살짝 핥으면서 차갑게 웃었다. 하지만 두 눈만큼은 눈빛만으로 미카엘을 난도질할 것처럼 예리하게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귀찮……!』
미카엘은 아가레스에게 귀찮게 굴지 말고 꺼지라고 말하려다, 어느새 이랑진군과 펜리르를 비롯한 이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각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연우의 권속들까지 어느새 나타나 그를 굽어다 보고 있었다.
특히 하늘에 맺힌 부-파우스트의 커다란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미카엘을 찢어발길 듯이 활활 불타오르는 중이었다.
[모든 동맹군이 미카엘을 예의 주시합니다.]
[신의 사회, ‘말라흐’에서도 그만할 것을 미카엘에게 종용합니다.]
제아무리 미카엘이라고 해도 이들을 한꺼번에 상대해서야 재미를 보기는 힘들다.
결국.
『재미없는 것들. 간만에 찾은 흥을 이리 식게 만들다니.』
미카엘은 김이 샜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면서 기수식을 풀고, 창을 그대로 땅에다 깊숙하게 박았다. 활활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팍 식었다.
그러고는 여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한 낯으로 손을 가볍게 비비면서 차갑게 웃었다.
『그럼 어디 한번 제대로 이야기나 나눠 볼까?』
2. 천마증(天魔症) (2)
녀석을 보고 있던 신과 악마들은 하나같이 기가 차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압박을 넣었다고 해도, 어찌 저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나설 수 있는 건지.
스스로의 실력에 대해 자신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만큼 뒷배로 두고 있는 말라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문제는 그들로서도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 따지고 들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미카엘의 성격에 대해서는 천계 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으니. 더 이상 따지고 들어 봤자 머리만 아파질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한 가지 놓친 점이 있었다.
아무리 미카엘이 천계에서 내로라하는 막 나가는 성격이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그보다 더한 작자가 있다는 사실을.
미카엘과 함께 일행들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콰르릉-
어디선가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게 천둥이 울리는 소리가 나는 듯하더니.
촤아악!
미카엘이 아차 싶어 몸을 옆으로 틀었지만, 이미 검뢰는 미카엘의 오른쪽 날개를 한 움큼 자르고 지나고 있었다.
잘린 날갯죽지가 위로 튀어 올랐다. 하지만 이어진 빛에 휩쓸리면서 그대로 사라지고, 미카엘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저만치 물러나야만 했다.
파스스-
연우는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비그리드를 바닥에다 내리꽂으면서 차갑게 웃었다.
“네가 이야기나 나누자고 하면 그냥 순순히 넘어갈 줄 알았나? 나를 너무 물로 보는군.”
다른 신과 악마들은 연우를 보고 살짝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태껏 연우와 계속 있다 보니 그가 어떤 성정을 자랑하는지 잘 알았던 탓이었다.
사도들은 그제야 흡족한 표정이 되었고.
아가레스와 펜리르만이 크게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래. 이 탑 안에서 나보다 더 미친놈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너겠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하하하!』
왕! 왕왕!
미카엘은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아가레스와 펜리르가 영 귀에 거슬렸지만, 무시하면서 연우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러다 재미있다는 듯이 한쪽 입술 끝을 말아 올리더니, 히죽거리면서 붉은 혀로 입술을 가볍게 축였다.
『지금 당신이 저지른 이 짓, 말라흐를 무시하는 처사로 봐도 되나?』
“말라흐가 나를 무시하는 것이겠지.”
『음?』
“나와 독대를 하고 싶다면 메타트론이 직접 찾아와도 급이 맞을까 말까인데, 사절이란 놈이 시비를 건다면…… 이를 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올림포스는 물론, 거인족이며 용종, 그리고 같은 동맹군까지 싸잡아서 무시하는 처사라고 보면 되나?”
미카엘은 그제야 연우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현재 연우는 단순한 신분이 아니었다.
크로노스의 적자(嫡子).
새롭게 신왕좌에 앉은 올림포스의 주신.
사라진 거인족을 휘하 권속으로 둔 왕.
용종의 새로운 혈주(血主).
칠흑왕의 계승자.
죽음을 다스리고, 투쟁을 좇는 신…….
수많은 수식어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몸이었다.
천계 내에서도 이와 비견할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은바.
아직 탈각과 초월을 이루지 않았다지만, 그쯤은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다.
사실 연우가 한 말마따나, 이제 연우는 천계 내에서도 차지하는 비중이며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절대 작지 않았다.
그런 이를 만나러 왔으면서도, 이따위로 무례하게 군다는 것은 연우를 모욕하는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런 연우를 인정하고, 함께하게 된 동맹군도 같이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
연우를 비롯해 동맹군 전체가 이를 꼬투리 삼아 말라흐를 압박한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제우스의 행방에 대한 힌트를 말라흐가 쥐고 있다지만…… 아닌 말로 연우가 그냥 제우스의 자리를 내친다고 선언해 버리고 그에 대한 관심을 꺼 버린다면, 말라흐로서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말라흐의 뜻인가?”
그러니 연우는 여기에 대해 따지고 들었고.
미카엘은 잠시간 말이 없더니, 이내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리겠소. 간만에 세상에 나오고, 강자를 보게 되니 이 몸이 주제도 모르고 흥이 돋아 눈이 어두워졌던 모양이오. 다만, 이것은 전부 본인의 불찰이며, 본 사회의 뜻은 이 일과 전혀 무관하오.』
순간, 연우의 눈가로 이채가 어렸다.
자신만만하던 미카엘의 태도가 한순간에 바뀌었으니까. 거기다 저 자존심 강한 작자가 직접 고개를 숙이는 건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기도 했다.
나설 때와 빠질 때를 아주 잘 알고 있단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왕께서는 부디 노하신 마음이 있거든 넓은 아량으로 본인을 용서해 주시고, 이로는 부족하다고 여기신다면…….』
미카엘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것으로 죗값을 대신해 받기를 요청드리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한순간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그대로 뽑아 버렸다.
푸화악!
어떻게 말릴 새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
신과 악마들 모두 놀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어떻게 신력으로 재생시킨다고 해도, 그래도 팔 하나를 뜯는다는 것은 그만큼 신력을 상실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컨디션이 원상태로 회복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게 분명했다. 신격에게도 절대 작지 않은 상처인 것이다.
그런데도 미카엘은 눈썹 하나 꿈틀대지 않고 말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나서는데 더 이상 따지고 들 수도 없겠지.
[신의 사회, ‘말라흐’의 메타트론이 사절의 무례를 용서해 주길 바랍니다.]
연우는 결국 메타트론까지 사과의 뜻을 전해 오자 가볍게 혀를 차면서 몸을 반대로 돌렸다.
『제멋대로 까불고 놀다가, 또 제멋대로 팔까지 뽑다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걸 보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로군.』
일행들은 아가레스의 대답에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시해야만 했다.
* * *
『난놈이로군.』
크로노스는 이랑진군으로부터 담담하게 치료를 받는 미카엘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팔 하나를 내놓는 것으로 제 전력을 측정하고, 동맹군의 관계 정도를 면밀히 파악했으니 절대 부족한 장사는 아닐 테지요.’
『그렇지.』
크로노스는 연우의 말에 동의의 뜻을 표시했다.
그는 미카엘이 겉보기엔 호승심이 강하고 폭력적인 성격으로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강한 것만큼이나 아주 냉정한 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서기장 녀석의 지시도 어느 정도 있겠지. 말라흐의 보좌역은 예부터 속에 능구렁이를 몇 마리나 키우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으니. 나도 한창때엔 그놈의 대가리 속을 몇 번씩이나 열어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물론, 메타트론의 지시가 있었다고 해서 미카엘이 단순한 꼭두각시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명령을 이만큼이나 제대로 수행하고, 팔까지 내놓는 강수를 놓는 걸 봐서는 메타트론에 못지않은 능구렁이를 품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그만한 머리를 타고난 놈이, 가진 솜씨도 저만큼 대단하다는 건…… 좀처럼 쉽게 볼 수 없겠는데? 우리 막내, 신왕이 되려면 고생깨나 하겠어?』
신왕좌를 얻으려면 그만한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것은 불문지사.
올림포스의 통치자가 될 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들로부터도 존경과 경외를 한 번에 받아야만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존심이 강한 신격들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여간 조심해라. 저런 놈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연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손에 들고 있는 그 흉측한 건 어쩔 거냐? 계속 들고 다니기도 뭣하잖아? 그냥 돌려줄 거냐?』
“돌려주긴 왜 돌려줍니까?”
연우는 손에 쥐고 있던 미카엘의 왼팔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발동됩니다!]
왼손에 맺힌 톱니 이빨을 갖다 대어 미카엘의 왼팔을 고스란히 삼켰다. 확실히 말라흐가 자랑하는 최고 전력의 한쪽 팔이라 그런지, 신력이 한층 부쩍 늘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죠.”
『어휴! 내 밑에서 어쩌다 이런 놈이 나오게 된 건지. 으. 징한 새끼.』
“콩 심은 데 콩이 나지 않을까요?”
『하여간 주둥이하고는……!』
연우는 크로노스와 티격태격하면서 명왕의 신전으로 들어섰다.
* * *
『기다려 주셔서 감사드리오.』
미카엘은 회의장에 왼팔의 상처만 서둘러 봉한 채로 나타났다.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연우에 대한 예의를 지키겠다는 뜻이었고, 그것을 증명하듯이 줄곧 존대를 하고 있었다. 행동에서도 더 이상 무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우선 자질구레한 것은 거두절미하고, 다들 궁금하신 부분부터 말씀드리겠소.』
미카엘은 진중한 얼굴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쌀쌀한 말투. 연우는 저런 모습이 미카엘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이전에 보였던 태도는 가면에 가깝겠지.
『올림포스, 그리고 천교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곳은…… 본 사회에서 징후를 포착한 바로 모두 47곳입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미카엘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들 모두가 천마증을 앓고 있던 이들이오.』
“음!”
“역시나…….”
“허!”
이랑진군과 나타태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고, 연우의 사도들도 고심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반면에 아가레스와 펜리르는 재미있게 되었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같은 동맹군이라고 해도, 진영이 다른 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47곳.
절대 적지 않은 숫자였다.
신의 사회 중 태반이, 그것도 제법 이름을 알리는 곳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니까.
“피해를 입은 곳이 어딘지 알 수 있나?”
이랑진군이 침중한 얼굴로 물었지만, 미카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확하게 어느 사회인지, 어떤 인물인지는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아무래도 저쪽에서도 외부에 드러나는 것을 꺼려 할 수밖에 없는지라. 물론, 이곳에 계신 분들에 대한 이야기도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오.』
“하면 피해를 입은 곳은 신의 사회 쪽만 그런 건가?”
『그것도 답변 드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오.』
이번에도 미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다들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만약 악마의 사회도 피해를 입었다면, 가장 먼저 르 인페르날에서는 바알이, 니플헤임에서는 로키가 실종되었을 테니까.
『다만.』
“……?”
“……?”
『조사 끝에 천마증을 앓던 이들이 동시에 같은 장소로 이동한 듯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소.』
“그, 그게 사실인가?”
“어디로 간 거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남은 좌표를 추적해 본다면…… 창공 도서관이나 그쯤인 듯했소.』
“……!”
“……!”
모두가 크게 눈을 뜨고 말았다.
창공 도서관.
전 우주의 모든 지식과 사건들이 낱낱이 기록되는 곳.
모든 신과 악마들, 용종이며 거인족들도 닿고자 노력했지만, 직접적으로 도착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린 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 신비의 장소로 움직였다고?
천마증을 앓던 모두가?
더군다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안다.
그곳에 누가 있는지를.
그렇기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동시에 연우에게로 쏠렸다. 미카엘도 마찬가지로 연우를 직시했다.
『천계와 하계, 심지어 탑 외의 다른 세계며 우주, 그리고 타계의 신을 포함해서도 가장 최근에 창공 도서관에 다다른 존재는 당신뿐이오, 올림포스의 왕이여.』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왕께서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신지, 서기장께서는 그것을 직접 묻고 오라 말씀하시었소.』
연우는 그제야 왜 말라흐에서 미카엘을 직접 사절로 보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단순한 결과 보고였다면, 따로 메시지를 이용했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아니면 사절이 아닌 전령만 강림시키거나.
하지만 막대한 인과율을 소모하면서까지 미카엘을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이번 사건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단 뜻이겠지.
무려 천마가 관련된 일이니.
『천마증을 앓던 이들은 전부 창조의 힘을 터득한 지고한 격을 지니고 있고, 천마로부터 큰 피해를 겪었던 피해자들이오. 그런데 그들을 전부 끌어들였다는 건…… 서기장께서는 혹 그동안 잠잠하게 있던 천마가 다시 천계에 손길을 뻗치려는 게 아닐까 하고 우려를 표시하고 있소.』
그러니 아는 바가 있으면 말해 달란 뜻이겠지.
그제야 아가레스와 펜리르도 더 이상 이 상황을 즐길 수만은 없다고 여겼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연우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니. 전혀.”
『음.』
“다만, 천마가 천계에 손길을 뻗치려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미카엘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소?』
[메타트론이 귀를 열어 플레이어 ###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지. 애당초 천마가 그럴 요량이라면, 따로 뭔가를 꾸밀 필요도 없이.”
연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냥 손짓만 해도, 천계고 뭐고 아무것도 안 남을 테니까.”
“……!”
“……!”
“……!”
모두가 표정이 잔뜩 굳었다.
[메타트론이 플레이어 ###의 대답에 입을 꾹 다뭅니다.]
“설마 아니라고는 못 할 거야. 신이고 악마고 간에 천계에서 겨우 숨이라도 붙일 수 있는 건, 전부 천마가 봐줬기 때문이라는 거.”
“…….”
“…….”
“…….”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