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03화 (603/862)

3화. 천마증(天魔症) (3)

연우가 기억하는 천마는 그만큼 대단했다.

탑에다 모든 신과 악마들을 가둬 버리고, 결국 칠흑왕마저 공허에다 처박은 존재.

그런데 그런 자가 뭘 꾸미고 있다고?

설마.

귀찮게 왜 그런 짓을 한다는 건지.

만약 정말 천마가 무슨 일을 획책하고 있는 거라면, 딱 한 가지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심심해서.’

까마득한 세월 동안 창공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나머지, 놀잇감으로 천계를 선택한 것이라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천마가 동네 꼬마 아이도 아니고, 설마 그런 짓을 할까?

그럴 가능성은…….

‘있…… 군.’

연우는 순간 천마를 떠올리고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창공 도서관에서 봤던 천마는 정말 스스로 법칙에 구속된 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성격을 자랑했다.

눈에 거슬리는 게 있으면 우선 치우고 보았고, 재미있겠다 싶으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건드리고 보았다.

호기심 많은 원숭이.

아니, 대장 원숭이.

미후왕의 허물에게서 받았던 인상보다 더 강렬했던 것이다.

그런 작자가 심심하다는 이유만으로 천계를 갖고 놀 가능성도, 지금 와서 막상 생각해 보니 아니라고 딱 잘라 일축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가능하지, 그 양반이라면. 암. 그렇고말고. 아마 천마증이니 뭐니 하는 후유증을 보고 더 재미있겠다 싶어 했을 수도 있고.』

어린 시절에 천마를 먼발치에서나마 본 적이 있던 크로노스 역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양반이 지구 출신이라고? 어떻게 그게 가능해지는 거지? 내 기억으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아주 시공(時空)을 전부 초월해 버린 건가?』

그런 크로노스의 의문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연우가 아주 잠깐 침묵에 잠기자, 그가 무슨 말을 이어서 할지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바빴다.

『하면 왕께서는 이번 사건이 천마와 전혀 무관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비치는 것이오?』

미카엘이 던진 질문에 연우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순간, 천마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긴 했다지만, 다시 생각을 바로잡은 것이다. 천마가 그렇게 어리숙하거나, 생각이 짧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천마가 신과 악마들을 98층에 가둔 것만 해도 상당히 많이 봐준 셈이니까. 그걸 부정하지는 못할 텐데?”

신과 악마들은 섣불리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뭐라고 대답한들, 자신들의 자존심을 깎기만 할 뿐이니까.

『그럼 창조신이 창공 도서관으로 향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오?』

“그야.”

『그야?』

무언가 짐작 가는 바라도 있는 걸까.

미카엘의 눈이 살짝 커지고.

[메타트론이 플레이어 ###의 대답을 재촉합니다.]

다른 신과 악마들도 연우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나도 모르지.”

『…….』

[메타트론이 침묵합니다.]

미카엘은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 * *

『다음에 뵙게 될 날을 기다리겠소.』

결국 미카엘의 방문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내 쌍둥이의 일부를 갖고 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질 때에도, 미카엘이 던지는 말은 온통 연우의 심기를 잔뜩 박박 긁어 대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우리도 도중이지만, 일어나 봐야 할 것 같다.”

이랑진군과 나타태자도 굳은 얼굴로 명왕의 신전을 나섰다.

그들의 수장인 옥황상제도 실종된 이상, 마냥 여기에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되도록 그대가 어디까지는 가는지 직접 옆에서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나타태자는 진심으로 아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동안 연우가 보였던 행보가 워낙에 파괴적이었던 탓에 어느새 그에게 완전히 홀린 모양이었다.

“동맹군 체제는 계속 유지되고 있으니까. 영혼석을 필요로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고.”

연우는 천교와의 연대를 여기서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었기에 여지를 남겨 두었다.

이랑진군과 나타태자도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주칠마왕과 관련된 사안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옥황상제를 찾고 난다면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미카엘을 따라 천교도 다급하게 천계로 이동하고.

“###…….”

“너희도 어서 가 봐.”

연우의 눈치를 조금씩 보던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도 연우의 대답을 듣고 난 뒤, 크게 반색하면서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연우를 왕으로 모시게 되었다지만, 그들에게 제우스는 사적으로 친부이기도 하니 그의 실종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겠지.

마찬가지로 헤르메스도 감사하다 고개를 숙이면서, 타르타로스를 지키기 위해 남은 최소한의 전력을 제외한 모든 올림포스의 병력들이 천계로 올라갔다.

‘주신이 없는 사회라. 그것도 나름 재미있겠어.’

자칫 대지모신 때처럼 위험할 수도 있을 테지만, 연우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미 동맹군의 체제가 워낙에 견고한 데다가, 창조신들의 실종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이상 그들도 올림포스에 군침을 흘리기 어려울 테니까.

설사 누군가가 올림포스에 마수를 뻗치려 한다고 한들, 연우가 아테나의 몸을 빌려 강신(降神)을 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쟤네들, 사도직 반납 안 하고 갔다?』

그러다 크로노스가 빛의 기둥으로 사라지는 아레스와 헤라클레스를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지만.

연우는 못 들은 척 실웃음을 흘렸다.

그건 아마도 저들도 마찬가지일 테지.

* * *

‘이제 타르타로스 쪽의 정리도 끝났고.’

연우는 한순간 텅 비어 버린 명왕의 신전과 타르타로스를 쓱 훑어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복작거렸던 곳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아마도 이것이 원래 타르타로스가 갖고 있던 모습이겠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소란스러운 것은 일체 찾아볼 수 없고, 그저 고요하기만 한 망자들의 세계.

사실상 ‘죽음’이란 정지나 마찬가지이니.

어쩌다 보니 그런 죽음을 다스리게 되었다지만.

사실 정지된 세계만큼 연우와 어울리지 않는 곳도 없을지 몰랐다.

[아가레스가 자신이 여기에 있노라며, 이제 방해꾼들이 사라졌으니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라면서 가슴팍을 두들깁니다!]

[펜리르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면서 꼬리를 마구 흔듭니다!]

물론, 저만치 먼 곳에서 어느새 아이와 강아지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아가레스와 펜리르가 이쪽으로 손을 크게 흔들어 댔지만.

그냥 무시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인가?’

연우는 생각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었다.

그가 탑에 들어온 이유는 한 가지였지만, 목적은 여러 가지였던바.

그런 여러 가지 목적들도 지금껏 차례로 하나씩 제거하면서 이제 딱 두 가지만 남은 상태였다.

그중 하나인 ‘동생의 영혼을 찾는 것’은 칠흑의 비밀을 더 깊게 파헤쳐야 하고, 시의 바다에 대한 조사가 더 철저히 이뤄져야 하니 좀 더 시간이 걸릴 테지만.

다른 하나는 아니었다.

‘올포원 처치.’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올포원은 항상 자신이 무언가를 시도하려 할 때마다 번번이 앞을 가로막곤 했다.

탈각을 시도할 때에도, 동생의 사념체를 구제하려 할 때에도.

심지어 과거에 아버지의 앞길마저 막지 않았던가.

만약 당시에 올포원이 아버지의 길을 막지 않았더라면?

아니, 최소한 막더라도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기만이라도 했다면. 그래서 동생을 무사히 구하고 되돌아갈 수 있게만 해 주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만의 신념에 충실하게 산다는 건 좋은 일일지 모르지만, 그 신념에 갇힌 채로 타인에게도 그것을 똑같이 강요한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연우는 어떻게든 올포원을 거꾸러뜨려야만 했다.

그동안 절지천통이라며 천계와 하계를 갈라놓았던 것을 끄집어 내리고,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만 했다.

『뜻이 선 게로구나.』

그때, 비그리드의 검체가 부서지면서 크로노스가 나타났다.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잡아야겠죠.”

『하긴. 너도 이제 모은 전력이며 힘이 적지 않으니까.』

크로노스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올포원에게 한번 당한 전적이 있으니 되갚아 줄 생각에 몸이 살짝 달아올랐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있습니다.”

『뭔데?』

“올포원을 잡는 것도 문제지만, 잡고 난 뒤에 천마가 어떻게 나올지를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천마? 그건 왜?』

“올포원이 천마의 아들이니까요.”

『뭐?』

크로노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천마에게 자식이 있다는 말은 그로서도 처음 듣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연우는 천마와 헤어질 당시에 그가 했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아, 참. 나중에 아들 녀석 다시 만나거든, 미안하다는 말 좀 대신 전해 주라.

당시에는 그가 말한 ‘아들’이 누군지 살짝 긴가민가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크로노스의 기억을 되짚을 당시에 보았던 올포원의 모습에서 천마에게서 감지되었던 기질을 확실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올포원은 오로지 빛과 관련된 권능만을 부린다. 문제는 천마도 빛을 상징하는 유일한 존재란 것이니.

그것을 두고, 단순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물며 창공 도서관에서 올포원을 내쫓을 때 보였던 천마의 씁쓸한 모습과, 울분에 찬 올포원의 모습은 이전 그들 부자와도 사뭇 비슷했다.

연우는 그런 생각들을 크로노스에게 차분하게 늘어놓았고.

크로노스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가볍게 혀를 찼다.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것이겠지. 딛고 있는 위치가 높을수록, 감도 예리해지기 마련이니까. 아마 네 짐작이 맞을 거다.』

그러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래도 천마의 아들이라……. 확실히 그렇다면 천마의 행동까지 변수에 넣어야 하나?』

필요하다면 부딪치더라도, 생포에서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과연 올포원이나 되는 존재를 상대하는데, 생포가 가능할까? 그만큼 척살과 생포에는 아주 큰 차이가 따랐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천마를 걱정하는 건 우선 이기고 나서 해도 늦지 않겠지. 안 그래?』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크로노스의 말마따나 이건 아무리 고민해 봐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다, 크로노스가 연우를 확하고 째려보았다.

『그보다 네 동료들은 언제 이 아비에게 소개시켜 줄 거냐? 줄곧 같이 싸우긴 했다만, 그래도 정식 인사도 없고…… 고얀 것.』

연우는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아버지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였으니.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권속들을 크로노스에게 소개시키자니 낯간지러웠고, 부끄럽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놈이 나타나면 시끄럽……!’

하지만 연우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휙!

갑자기 연우의 그림자가 불쑥 열리는가 싶더니, 거기서 샤논이 위로 툭 하고 튀어 올랐다.

‘젠장.’

연우는 불안감에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고.

샤논은 그런 연우의 기대(?)에 부응하듯, 크로노스 앞에서 오체투지의 자세로 머리를 땅에다 박았다.

「데스 로드, 샤논! 큰 주인님께 대가리 오지게 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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