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04화 (604/862)

4화. 천마증(天魔症) (4)

『하하!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크로노스가 크게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여태 마성이나 대지모신 등과 계속 싸워 대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뒤로도 포세이돈 남매와 재회를 했어도 아직 제대로 화해를 하지 못해 씁쓸해하시던 모습을 생각한다면.

간만에 저런 밝은 웃음을 찾으신 것에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 귀에 거슬리기만 하는 걸까……?

『거기다 그렇게 뒤통수를 후려치다니! 식탐황제, 그놈도 참 불쌍한 친구였군그래. 자신이 아끼던 수족이 뒤통수 맞은 것도 모르고 선의로 계속 도와주다가, 마지막에 멱까지 따인 것이었으니.』

『응! 하지만 그렇게 당해도 싼 놈이었는걸!』

『음? 우리 니케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 나쁜 놈이었나 보구나.』

『응응! 크르릉도 알고 있는걸!』

『……그놈은 예전에…….』

간만에 바깥세상 나들이를 나온 니케와 네메시스는 크로노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도 아주 재미있어 보였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대개 대화의 주제는 ‘연우’였다.

『그때 샤논이 만든 주제가도 있었어!』

『샤논이?』

니케가 던진 말에 크로노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옆에 간신처럼 들러붙어서 이것저것을 가져다주던 샤논이 허리를 똑바로 세우면서 우렁차게 대답했다.

「옙! 그랬습죠!」

『뭐길래?』

「부끄럽지만, 이 샤논! 큰 주인님 앞에서 그럼 한 곡조 뽑아 보겠습니다요! 뒤통수, 뒤통수, 신나는 노래~♪」

『오. 박자며 리듬까지, 참 기가 막힌데?』

술과 안주만 가져다준다면, 딱 남정네들끼리의 회식이나 다를 바가 없는 모습.

시간이 갈수록 연우는 더 기가 찰 뿐이었다.

그보다 왜 자꾸 큰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굽실대는 거야? 설마 아버지라고 해서? 아니다. 저건 분명히 자신을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아버지는 그걸 즐기고 있었고.

거기다 한령이며 평상시에는 얼굴을 잘 내비치지도 않던 레베카까지 나와서는 크로노스와 한데 어울리는 모습이, 누가 저들의 주인인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때.

“……?”

연우는 어깨에 올라온 손길을 느끼고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부를 볼 수 있었다.

덜그럭, 덜그럭-

“…….”

이 녀석 말고 믿을 놈이 없구나.

연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 *

『하나같이 참 좋은 아이들이더구나.』

크로노스는 간만에 즐거웠던지 기분 좋게 웃었다.

연우는 빤히 그를 쳐다볼 뿐이었지만.

『음? 이 아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얼굴이구나?』

“……아닙니다. 됐습니다.”

연우는 따지고 들어 봤자 자신만 골치 아파질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크로노스는 당장에라도 연우가 이래저래 불평불만을 늘어놓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니케와 네메시스 말이다.』

크로노스는 연우의 속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가볍게 웃어 보이고,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요즘 들어 동면을 취하는 경우가 많지?』

“예.”

『본디 환수란 것은 꿈에 살고 꿈에 저무는 존재다. 하지만 꿈이라는 것은 본래 존재가 무의식중에 바라는 이상과 망상을 뒤섞은 것에 가깝고…… 격이 상승할수록 그 경계가 엷어지니, 결국 환수는 주인과 동화(同化)될 가능성도 점차 높아지지.』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도 그동안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부분이었으니.

11층의 시련은 자신만의 환수를 깨우는 것. 그렇다는 건, 11층을 통과한 플레이어가 전부 자신만의 환수를 갖고 있단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태 연우는 무수히 많은 플레이어들을 만났지만, 그들의 환수를 보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대개 원활한 공략을 위해 약한 환수를 빠르게 탄생시켜 전력에 보탬이 되질 않거나, 또는 부족한 마력을 채우기 위한 양분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결국 플레이어의 격이 상승함에 따라 거기에 동화되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니.

현재 니케와 네메시스가 겪는 상황이 그러했다.

연우가 그들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고, 현자의 돌이라는 거처를 만들어 주어 여전히 자유로운 행동이 가능하다지만.

영혼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고, 탈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그들의 근간이 되는 ‘꿈’의 세계도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다. 애당초 이제 연우는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대신에 니케와 네메시스는 연우의 존재를 이루는 곳곳에 숨어 있었다.

적을 짓이기는 불길 곳곳에 니케가 자리 잡았고, 대지를 뒤덮는 그림자 속에 네메시스가 잠들어 있으니.

이 두 가지 속성은 이미 니케와 네메시스,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렇게 점차 시간이 흐르다 보면, 완전한 동화가 이뤄지고 말겠지.

하지만 연우는 저층에서부터 줄곧 함께해 온 둘을 이대로 잃고 싶지 않았다.

니케는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었고, 네메시스는 여전히 동생을 애타게 찾고 있으니.

크로노스도 그걸 짐작하고 지적한 것이다.

『내가 나중에 따로 ‘진짜’들과 자리를 연결시켜 줘도 좋을 듯싶더구나.』

진짜.

이름의 원주인인 승리의 신, 니케와 복수의 신, 네메시스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렇다는 건……?”

『그 할망구들, 아마 지금쯤 원로 대접이나 받으면서 세월아 네월아 노래나 부르고 있을 게 뻔하니, 새로운 왕한테 선물이나 하라고 그러지 뭐. 말 안 들으면 삥 뜯으면 되고. 사도직 정도면 되겠지?』

연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피식 웃고 말았다. 역시 아버지답다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크로노스의 노림수도 금세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로는 올림포스가 지금의 형체를 이루기 전, 우라노스가 통일 전쟁을 벌이기 전부터 존재하던 여러 대신격들을 가리키는바.

너무 오래되어 개념신에 가까워진 그들은 올림포스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비록 가진바 힘은 적을지 몰라도, 그들의 지지를 끌어낸다면 통치는 훨씬 순조로워질 테니.

크로노스는 직접적으로 연우와 원로들 간에 연결 고리를 형성해 지지를 끌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제우스 등을 강제로 끄집어 내리고 내가 앉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티탄-기가스를 무찌르고 앉았기에 반발이 덜 심할 뿐, 원래 제우스 3형제의 편에 섰던 이들이 언제 이를 드러낼지 모르는 상황.

더구나 연우는 지금 올림포스의 주신이면서도, 그 왕좌에 앉지 못하는 희한한 상황이기도 했다.

아테나를 시켜 대리 통치를 한다고 한들,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동안에 있을 부족분을 원로들의 지지로 채우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연우는 크로노스가 얼마나 자신을 배려하는지를 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넌 비그리드를 강화시켜야 한다.』

“……?”

그러다 뚱딴지같은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로노스가 피식 웃었다.

『의문이 들겠지?』

“예. 비그리드에 더 손댈 곳이 있습니까?”

비그리드는 죽음의 태엽으로써 작동하기 시작한 뒤부터, 이미 대신물로서의 가치를 보이고 있는 지 오래였다.

아니, 이미 크로노스,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으니 성물(聖物)의 범주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것만으로도 대신격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강화를 시켜야 한다고?

만약 그래야 한다면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시간의 태엽도 합쳐야겠지.’

아난타에게 맡겨 둔 회중시계를 가져와 합친다면…… 크로노스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시계의 태엽을 억지로 뽑으려다 자칫 그 속에 있을 동생의 사념체가 망가질 우려도 있었으니까.

크로노스가 그걸 모를 리도 없을 테니, 비그리드를 강화시키자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닐 것이다.

『비그리드를 만든 건 나이다만, 이건 내가 마지막에 만들어 내고자 하던 최종 형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중간점에 불과하지.』

“아.”

연우는 그제야 크로노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알 것 같았다.

애당초 지구에 떨어졌던 크로노스가 원하던 것은 새로운 초월.

잃어버린 격을 복구해 신왕좌를 되찾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지구에서 보낸 세월만으로는 그가 그 전에 쌓은 격을 모두 복구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니.

비그리드는 바로 그런 과정에서 도출된 결과물이다. 즉, ‘지구에서의’ 신화를 모은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다.

『따지자면…… 그래. 비그리드에 담긴 건 사실상 신화가 아니다. 전승(傳承) 혹은 전설(傳說)에 가깝지. 몇 단계나 낮은 영웅 설화인 것이다.』

‘영웅’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격을 쌓아 올리고, 신앙을 끌어모아야만 끝끝내 신이 되는 것이니.

설화는 신화에 비견할 수가 없다.

“비그리드에 있는 설화를, 신화로 바꾸라는 말씀이시군요.”

『맞다.』

크로노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내 육체를 흡수하였지. 즉, 그 속에 있는 신화가 네 신화와 뒤섞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신화를 골라 이곳에 다 부여한다면……!”

『비그리드도 새로운 형태를 띨 수 있겠지. 나도 한층 달라질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크로노스의 완전한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으니.

연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그렇게 강화된 비그리드와 합일을 이뤘을 때, 자신의 힘은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 것인가?

『이제야 알겠느냐? 이 아비의 위대함을?』

크로노스는 자신이 말하려던 바를 연우가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아버지가 저럴 때마다 사사건건 못마땅해하던 연우도, 이번만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그리드는 진짜 이름이 아니다. 여러 진명을 가리기 위한 위명이었지. 하지만 그 속에도 제대로 된 진명은 하나뿐이니.』

“그게…… 무엇입니까?”

『스퀴테.』

“……스퀴데.”

연우는 비그리드에게서 보았던 무수히 많은 이름 중 하나를 떠올렸다.

소싯적 신왕 크로노스가 애용하던 애병이자, 대신물.

대지모신 가이아가 세상에 널리 퍼진 최초의 여러 쇠붙이들을 끌어모아 원한의 샘에다 담았고, 그렇게 탄생한 아다만트에서 비롯되었다던가.

세상에 베어 내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대상의 시간까지 베어 내어 완전한 정지를 부여함으로써 죽음을 끌어낸다던 무기.

의식 세계에서 크로노스가 마성을 벨 때에 사용하던 대낫이기도 했다.

『듣자 하니 이전에 사용하던 것은 제우스 녀석들이 불길하다면서 부숴서 우주 곳곳에다 뿌렸다지만, 그래도 스퀴테는 내가 이미 한번 만들어 본 적이 있는 것이니 또다시 만들지 못할 리가 없지.』

연우는 크로노스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구에 있을 적에는 그들 쌍둥이를 낳으면서 포기하게 된 숙원 사업이라지만, 여기서는 다시 이뤄 나갈 수 있을 테니.

『그리고 그것이라면 충분히.』

“……올포원을 상대할 수도 있겠군요.”

연우는 그동안 막연하게만 보이던 벽에서 빛이 한 점 새어 나오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리라 본다. 녀석의 빛을 벨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크로노스는 자신의 말에 강하게 힘을 주며 말했다.

* * *

땅, 땅, 따앙!

따아앙!

헤노바는 무왕의 요구에 따라 커다란 석상을 열심히 조각했다.

외뿔부족의 왕이 특별히 부탁하는 것이니만큼, 그도 절대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동안 대장간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계절이 한 번 혹은 두 번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시간 내내 조각에만 집중했으니까.

“허! 역시 대단한 양반이야. 드워프란 양반들은 다들 저렇게 외골수들인가?”

“저거 끝나거든, 나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해 볼까? 어때? 이런 포즈는?”

“꼴사납다, 이것아. 그 배부터 집어넣지 그래?”

“개새끼.”

“크으. 그나저나 처음에는 우리 족장이 참 꼴사나운 짓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저렇게 보니까, 그것참…….”

“그것참?”

“더 꼴사납단 말이지!”

“푸하핫! 맞아! 그리고 못생겼지!”

“그래! 못생겼……! 헉!”

“왜 그래, 갑자기? 헉! 조, 족장?”

“누가 못생겼다고?”

“그, 그게……?”

“조, 족장! 우리 말 좀 듣……!”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잘됐다. 너희들을 더 못생기게 만들어 주마. 와라!”

부족원들은 그걸 보면서 저들끼리 잡담을 나누며 웃어 대기도 했지만, 헤노바의 실력에 대해서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언제나 그렇듯, 평화로우면서도 시끄러운 나날이 지나던 어느 날.

무왕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깡마른 체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남자, 페이스리스였다.

그는 칙칙한 목소리를 내뱉다 말고, 갑자기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를 비딱하게 꼬더니 히죽 웃으면서 걸쭉한 목소리로 변했다.

“아니, 형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

창무신, 플랑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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