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천마증(天魔症) (5)
“끔찍한 혼종이로구만. 쯧!”
페이스리스를 처음 마주한 순간, 무왕이 내뱉은 감평은 아주 간단했다.
혼종(混種).
어떻게 한 개의 육체에 저토록 많은 영혼들을 욱여넣을 수 있는 건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상당히 난리를 쳤다기에 대체 그사이에 무슨 수를 썼나 싶었더니.”
무왕은 팔짱을 끼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불청객이 부족의 마을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건 오늘 아침이었다.
어떤 미친놈이 아직 잠도 다 깨지 않은 새벽 댓바람부터 난리를 치나 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간만에 재미난 놈이 나타났다 싶었다.
외뿔부족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탑 내에서 ‘최강의 종족’으로 군림해 왔고.
무수히 많은 클랜과 랭커들이 그들의 아성을 뛰어넘기 위해도 전을 해 오기도 했다.
물론, 그런 도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좌절을 겪어야만 했지만.
그래도 외뿔부족과 겨뤘다는 것만으로도, 무도를 걷는 이들에게는 아주 크나큰 영광일 수밖에 없었던바. 외뿔부족의 빈객이라도 되면 큰 발전도 꾀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을의 초입은 여러 방문객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그러면 부족원 중 누군가가 나서서 그들을 직접 상대하고, 인정할 만한 존재면 식객으로 받아들이되, 어중이떠중이면 내치는 것이 전통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통은 언제부턴가 유야무야되다가, 단절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무왕이 집권하고 난 뒤부터였다.
무왕은 역대 외뿔부족의 왕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최강자라 불렸다 보니, 도전자들과의 격차가 커도 너무 컸던 것이다.
당연히 오만한 성정을 자랑하는 무왕으로서는 그런 놈들이 눈에 찰 리가 없었고.
-발톱 때만도 못한 것들, 왜 받아들이냐? 칼질이라도 한 번 할 수 있는 놈 아니면 다 내쳐.
그렇게 내뱉은 서슬 퍼런 한마디는 결국 귀찮은 파리들을 다 내쫓아 버리는 것에 이르고 말았다.
빈객의 수도 확 줄어들어 정말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면 남지도 않았으니.
그렇다 보니 방문객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다시피 하게 된 상황이었다.
한데, 그런 와중에 간만에 방문객이 있다고 하니, 무왕도 이제 심심함을 달랠 수 있겠다 싶어 관심을 보였던 것인데.
설마하니 이런 혼종일 줄이야.
“그래. 뿔을 돌려 달라고?”
무왕은 페이스리스를 완전한 타인처럼 대했다. 그의 눈에는 옛 제자로도, 아우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여러 원념만 잔뜩 뭉친 괴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제가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청화도가 아직 건재할 적. 창무신은 레드 드래곤과 본격적인 전쟁을 치르기에 앞서 외뿔부족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직접 자신의 뿔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부족원에게 있어 뿔을 내놓는다는 것은 외뿔부족의 정체성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뜻.
더 이상 부족원으로서 내세울 수 있는 권리도, 의무도, 전부 손에서 놓겠다는 의미이기에 수치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뻔뻔하게 뿔을 돌려 달라고 한다.
외뿔부족의 입장에서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요구해? 네가 어떻게?”
“뿔의 대가를, 부족은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동맹으로서 참전해 달라고 요구하였고, 형님께서는 그걸 들어주겠다고 약조하셨지만, 결국엔 방관으로 끝나고 말았지요.”
“결국 이스메니오스를 거꾸러뜨린 건 나였다만?”
“그것과는 별개의 사안이지요. 청화도에서 요구한 것을 이행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안 된다면?”
“정식으로 장로 및 원로 회의에 의결을 요구하겠습니다.”
갈수록 점입가경이로군.
“뒷방 늙은이들이 들어줄 건 같고?”
“최소한 몇몇은 들어주겠지요.”
“몇 놈과 벌써 입을 맞췄군.”
“형님께 불만이 있는 늙은이들이 제법 계시더군요.”
외뿔부족은 겉보기엔 무왕을 중심으로 한 견고한 체재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개개인이 유쾌하고 무도를 추구하기 때문에 별다른 잡음이 없는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그렇듯, 부족 내에도 끊임없이 계파 간의 파열음은 빚어지고 있으니.
이는 그들이 사실 50여 개의 씨족과 가문들이, 소호 금천이라는 공통된 시조 아래 뭉쳐 있는 연맹체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최근 몇몇 씨족들의 경우에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대장로에서부터 무왕, 그리고 최근 들어 무서운 기세로 일어서고 있는 판트 남매까지. 청람가의 위세가 다른 씨족과 가문을 능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에 대한 반발과 불만이 조금씩 나올 수밖에 없는바.
일단은 무왕이 건재하기에 아무도 언급하지 않을 뿐이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런 곳을 들쑤셨으니. 아마도 엉덩이가 가벼운 뒷방 늙은이 몇몇은 이미 벌써 들썩거리고 있을 것이다.
무왕은 팔짱을 꼈다. 여전히 그의 입가에서는 비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래. 좋아. 그럼 뿔을 되찾는다면? 그 뒤에는? 여기서 끝이 아닐 텐데?”
“전쟁을 치를 겁니다.”
“전쟁? 누구와?”
“당연히 형님이지요.”
“……?”
“형님께서 앉아 계신 자리, 제가 가져가야겠습니다.”
무왕은 순간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크게 파안대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뭐? 네가? 이 자리를?”
비웃음이 잔뜩 쏟아졌지만, 페이스리스는 무덤덤했다.
“저 역시 선대 왕의 아들이니 혈통이 부족하지 않고, 뿔도 되찾을 테니 자격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땐 부족장의 자리에 도전할 것입니다.”
외뿔부족의 왕이 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첫째, 소호 금천의 피를 잇는 가계(家系)에 속할 것.
둘째, 그중에서 가장 강할 것.
제아무리 많은 파벌을 데리고, 지지자들을 끌어모은다고 할지라도. 결국 부족장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순수한 무력이다. 외뿔부족이 무공(武功)을 창시한 무문(武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부족장은 여러 피붙이들 중에 누군가가 정식으로 도전을 해 온다면, 신상에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닌 이상에야 반드시 도전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것이 부족을 지탱하는 가장 첫 번째 원칙인 탓이었다.
강자존(强者學).
강자만이 존귀하고, 모든 것을 독차지할 자격이 있을지니.
“형님께 불만이 있는 영감이 적잖게 있다고 말씀드렸었지요? 저는 제가 왕이 된 다음, 자식을 두지 않을 예정입니다. 둘 수도 없는 처지기도 하고요.”
그럼 차기 왕은 다른 가문에서 나오겠지. 이것을 약조한 이상, 페이스리스가 ‘플랑’이라는 이름으로 부족에 되돌아오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붕대 사이로, 페이스리스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그러니 어쩌시겠습니까, 형님?”
그런 도발적인 질문에.
피식!
무왕은 아주 재미있겠다며 가볍게 웃었다.
“얼마든지.”
* * *
페이스리스가 정식으로 장로 및 원로 회의를 요청하고 난 뒤.
무왕에게 곧바로 쏟아진 것은 영매의 전음(傳音)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함정이야!』
“알아.”
『당신과 일대일 자리를 만드는 게 저들 목표야! 거기서 암살을 꾀할 거라고!』
“누가 몰라?”
『당신……!』
영매의 어조가 뾰족해졌다.
늘 차분하던 그녀였지만.
최근 들어 같은 점괘가 계속 반복되고, 그 ‘시간’이 계속 다가올수록 그녀는 점차 조급해했다.
반면에.
무왕은 여전히 담담했다.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듯.
“우리 마누라, 목소리 많이 떨리네? 이런 거 너무 오랜만이다야. 예전에는 손만 잡아도 그랬었는데. 요즘은 아주 아줌마가 되어서…….”
『야!』
무왕은 결국 말을 길게 잇지 못했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마누라.”
『뭐?』
영매는 흥분을 겨우 삭이고 있었는지 숨소리가 많이 거칠었다.
“너무 걱정 마.”
물론, 그마저도 오래 가지 않았지만.
『화상아! 지금 걱정 안 하게 생겼……!』
“나 무왕이야. 나유라고.”
『…….』
영매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남편은 너무 자신만만했다.
저런 면모에 반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때때론 너무 미웠다.
자신의 걱정 따윈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일쑤였으니까.
“내가 죽을 운명이라고 했지?”
무왕은 영매가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두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확답하건대,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페이스리스는 떠나는 순간 웃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녀석은 알까?
당시에 자신 또한 웃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닌, 진심 어린 웃음이었단 것을.
대적자라.
이 얼마 만에 마주하게 된 도전장인지.
여름여왕이 죽은 뒤, 홀로 따분함을 감내해야만 했던 무왕으로서는 이보다 재미난 사건은 없었다.
그저 제자 녀석이 어디선가 또 깽판을 쳤다는 게 전부였을 뿐.
“그깟 운명도 죄다 부숴 버려야, 무왕이라 할 수 있지 않겠어?”
익살맞게 웃는 무왕의 두 눈은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 * *
연우는 스퀴테를 만들어야 한다는 크로노스의 의견에 따라, 곧장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비그리드를 강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재료부터 모아야지.』
“재료라 하시면?”
『일단 내용물은 진즉에 갖춰져 있다. 내 신화는 네가 전부 온전히 갖고 있는 상태고, 태엽도 이전보다 훨씬 원활하게 잘 돌아가고 있지.』
“그럼 그릇이 필요한 거군요.”
『맞아.』
다른 건 전부 마련되어 있으니, 비그리드를 두들기기 위한 광석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비그리드…… 아니, 스퀴테의 원재료는 무엇입니까?”
『알면서 뭘 물어? 아다만트지.』
‘역시.’
연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다만트.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며 마법적인 재질이 뛰어나다는 물질.
이미 퀴네에를 만들기 위해 한 번 구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귀한 건지 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혹시 그 필요하다는 아다만트가, 정확하게는 아다만틴 노바입니까?”
『당연하지. 노바가 아니면 어따 써?』
“…….”
마치 아다만 노바가 아니면 그게 어디 광석의 범주에나 들 수 있냐는 듯한 말투.
연우는 어쩐지 크로노스가 가진 ‘상식’의 범위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까마득한 세월 동안 신왕좌에 앉아 있던 양반다운 씀씀이였던 것이다.
“그럼 필요한 양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퀴네에를 기준으로 둔다면요.”
『퀴네에라면, 키클롭스 놈들이 하데스에게 만들어 준 그거?』
“예.”
『아들아.』
“……?”
『잡다한 것과 같이 뒤섞여서 만들어진 투구랑, 통짜로 만든 대낫이랑. 비교하면 어디가 더 많이 들어갈까?』
“…….”
『열 배.』
“……!”
『그 정도는 있어야 비그리드의 성질이라도 바꿔 볼 수 있을 거다.』
“…….”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손으로 뒤덮고 말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출혈을 필요로 할 듯싶었다.
그러다.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밑으로 붉은 포탈이 활짝 열렸다.
『어디 가려고?』
“가만히 있어 봤자 아다만틴 노바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난 떨어지던데?』
대체 이 양반은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그거야 아버지 때는 풍족했으니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저와 올림포스로서는 턱도 없습니다. 애당초 아다만트는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어서요.”
『음. 확실히 그렇다고 듣긴 했다만.』
“그러니 아다만틴 노바를 가지고 있거나, 위치를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을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데?』
아나스타샤.
연우는 지금쯤 또 어디에 있을지 모를 구미호의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포탈에 올랐다.
* * *
-스승님? 정확하진 않지만, 지금쯤 11층을 외유 중이실걸? 환몽(幻夢)과 관련된 뭔가가 필요하다고 저번에 지나가듯이 말씀한 적이 있거든. 그런데 무슨 일로…… 뭐? 또? 저, 저기 미안한데, 이번엔 내가 가르쳐 줬다고 말 안 하면 안 될까……? 나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몰라……!
간만에 빅토리아에게 연락을 넣으니, 다행히 아나스타샤의 행방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은 11층, 꿈속 세계의 관입니다.]
빛무리를 가르면서 간만에 찾은 11층은 다른 어떤 층계와 비교할 수 없이 아주 평온했다.
영혼을 어루만지듯이 아주 따스했던 것이다.
이전에 찾았을 때는 절대 느낄 수 없었던 감각.
[신수들이 강한 존재의 파장을 감지하고 털을 곤두세웁니다!]
[마수들이 강한 존재의 파장을 확인하고 근처의 은신처로 도피합니다!]
[모든 환수들이 당신의 존재에 숨을 죽입니다.]
하지만 연우와 다르게, 11층에서 살아가는 환수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환수는 물질보다 영에 가까운 존재. 그렇기에 감각이 아주 예민한 만큼,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감지하고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마치 절대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해일이나 지진이 닥치는 것으로 보일 테지.
“어? 왜, 왜 이래……?”
“첸! 정신 차려!”
“아, 알이 깨질 것 같아!”
때문에 11층의 시련에 집중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이상 증세를 보이는 환수들 때문에 곤혹을 면치 못했다.
연우도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게 층계에 좋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볼일만 서둘러 마치고 떠날 생각이었다.
다만, 망막을 채운 여러 메시지 중 유독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신수? 모두 죽은 게 아니었나?’
4대 신수들은 청화도와 레드 드래곤의 전쟁 때 전부 한령에게 죽었을 텐데? 혹시 자신이 스테이지를 떠나 있는 동안 새로운 신수라도 생긴 걸까?
그런 여러 생각이 들 무렵, 갑자기 자신이 있는 곳으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앞쪽에서 공간이 활짝 열렸다.
“대체 어떤 작자가 나타난 건가 싶었는데…… 또 너였나?”
아나스타샤가 짜증이 가득 섞인 얼굴로 연우를 노려보는데.
순간, 비그리드가 크로노스로 변하면서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응? 너 레아가 기르던 포포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