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07화 (607/862)

7화. 무왕(武王) (1)

『페페가?』

“예.”

『그 아이가 수완이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장사를 하고 있다고?』

크로노스가 눈을 크게 떴다.

“레아 님께서 남겨 주신 유산을 바탕으로, 제 것을 더해 꽤나 크게 굴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우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정말 바이 더 테이블의 정체가……?’

늑대란 아마도 총수 프레지아를 가리키는 것일 테지.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탑의 세계뿐만 아니라, 여러 우주와 차원에 걸쳐서 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는 바이 더 테이블이 그런 기원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연우는 새삼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전에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지구에 있을 시절만 하더라도, 분명히 자신들은 그저 평범한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물론, 어머니와 프레지아 간에 인연이 있다고 한들, 지금에 와 프레지아에게 이를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정에 호소할 수는 있겠지.

바이 더 테이블을 이용한다면, 탑의 바깥에서도 아다만틴 노바를 구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부탁하마.』

크로노스의 부탁에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레지아와는 그동안 앙숙처럼 지냈다지만.

그래도 이 소식을 녀석이 듣는다면 충분히 기뻐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그놈 참 자아알 생겼다!”

무왕은 막 완성된 자신의 동상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늠름하게 자세를 잡고 있는 모습이 마치 일족을 영광으로 이끈 위대한 군주를 상징하는 것 같아 새삼 어깨에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어깨가 실제보다 너무 넓어. 턱도 갸름하고, 콧대도 높아졌어. 저걸 두고 누가 부족장이라 하겠나? 그리고 크기는 또 왜 이렇게 큰지, 쓸데없이 공간만 낭비하고 있지 않나.”

하지만 뿌듯해하는 무왕과 다르게, 옆에 있던 대장로는 못마땅하다는 투로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러다 마침 석상에서 내려오던 헤노바에게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보정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헤노바? 생각보다 예산도 많이 쓰였던데.”

“영감! 그게 무슨 소리야! 보정이라니! 누가 봐도 딱 난데!”

무왕이 도중에 딴죽을 걸었지만, 대장로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헤노바는 별다른 변명 대신에 곰방대를 입에 문 채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의뢰를 받은 대로 할 뿐이라서. 돈을 아낌 없이 준 이는 그쪽 옆에 있으니 그쪽에다 물어보시오.”

대장로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무왕을 홱 하고 노려봤다.

“……이 망할 족장 새끼가! 저번에 추경이니 뭐니 하면서 되도 않는 구실로 타 갔던 걸로 한 짓거리가 고작!”

“어허! 고작이라니! 영감, 말조심해야지! 이 몸만큼, 응? 우리 일족을, 응? 번영을 누리게 한 위대한 왕이 어디 있다고, 안 그래? 그럼 이 정도는 해도 되잖아?”

“소호 금천께서도 하지 않으셨던 짓을 네놈이 하고 있다는 건 알고나 있는 거냐?”

“금천이 안 하셨으니까 이 몸이 하는 거지.”

무왕은 ‘엣헴!’ 배를 쭉 내밀었다.

대장로는 오늘도 저놈의 주둥이를 확 찢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아무리 미워도 일족의 왕인 것을.

하는 짓거리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오늘 완성된 동상만 해도 그렇다.

외뿔부족이 탑 내에 정착한 지도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고, 그만큼 무수히 많은 왕들을 배출해 냈다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감히 동상을 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아무리 강하고 위대하다고 한들, 시조인 소호 금천의 업적을 따라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왕은 그런 지난 선례들을 너무 간단하게 깨 버리고 말았다.

저게 무슨 뜻이겠는가?

자신이 시조보다도 낫다고 자랑하는 꼴밖에 더 되는가 말이다!

물론, 부족원들의 반응은 ‘못생기고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든 일에는 여론과 절차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제멋대로 추진하고 말았으니.

‘저런 놈을 두고 폭군이라 하지 않으면 누굴 가리켜서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부족 내 여론이 모두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평상시 무왕과 대장로를 배출한 청람가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백선가를 위시한 여러 가문들이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다만, 무왕이 부족과 탑 내에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에 막대하다 보니 크게 반발하지 못하는 것일 뿐.

이미 저들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심지에다 불만 당겨도 위험해질 게 분명했다.

‘이 아이 역시 그걸 절대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대장로는 여전히 속을 짐작할 수 없을 무왕을 보면서 미간을 가늘게 찌푸리다, 더 이상 휘둘려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페이스리스…… 플랑의 신분이 오늘 아침 자에 장로 회의를 통해 복귀되었다는 것, 들었겠지?”

“아, 그거?”

“그거? 지금 그거라고 했나?”

대장로의 미간 사이에 팬 골이 더 깊어졌다.

평상시에는 ‘현자’라는 별칭처럼 차분한 성격으로 알려진 그였지만, 유독 무왕과 관련된 일에서는 그러기가 힘들었다.

“그걸 두고 고작 그렇게만 말할 수 있는가? 아예 대놓고 자네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면서 여기저기다 호언장담을 하고 다니는데?”

무왕이 피식 웃었다.

“영감.”

“뭘 그렇게 웃어?”

“영감이 보기엔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여?”

“당연히 안 되지! 어딜 플랑 따위가!”

“그럼 내 대답도 된 거 아냐?”

“그렇게 쉽게 볼 문제가 아니니 그러는 것 아닌가!”

대장로는 함정이 있을 거라고 말하고자 했다. 영매가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누가 봐도 결과가 뻔한 싸움을 굳이 강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언가 숨겨진 패가 있다고밖에 여길 수가 없었다.

물론, 평상시라면 그런 패조차도 그냥 무시해 버렸을 것이다. 대장로는 무왕이 얼마나 ‘괴물’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무왕은 그동안 어떤 일이든 압도적인 힘으로 부수고, 돌파해 왔다.

하지만 당금의 문제는 영매의 예언이었다.

그것이 가지는 무게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잘 아니, 도무지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결국 대장로는 화가 잔뜩 난 상태로 한참 동안 무왕에게 잔소리를 퍼부어 댔고.

무왕은 언제나 그렇듯이 양손을 귀로 막으면서 동상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그러다 대장로의 숨소리가 약간 거칠었을 때 즈음.

“이제 잔소리 좀 끝났어?”

“고얀 놈!”

대장로는 여전히 히죽 웃어 대는 무왕의 면상을 한 대 후려칠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무왕은 자신을 똑 닮은-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동상에서 시선을 떼질 못했다.

* * *

페이스리스는 부족원으로서의 신분을 되찾은 순간, 공언했던 대로 곧장 왕좌에 도전장을 던졌다.

왕좌 결투.

부족장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외뿔부족의 전통적인 행사로, 여기서 승리를 거둔 자에게만 왕좌에 앉을 자격이 주어졌다.

그동안은 무왕의 실력이 너무나 압도적이라 아무도 도전하질 못했지만.

간만에 큰 행사가 벌어졌으니 부족원들은 벌써부터 잔뜩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왕좌 결투는 이름과 다르게 딱히 엄숙한 분위기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축제에 가까웠다.

만약 새로운 왕이 태어난다면, 그만큼 강한 지도자가 출현하는 것이니 기쁜 일이었고.

왕이 왕좌를 지킨다면, 자신의 자격을 자랑스럽게 증명한 셈이니 이 역시 기쁜 일이다.

그리고 소호 금천의 가호 아래에서 왕과 도전자, 둘 모두 신성한 결투에 임한 것이니, 이 역시 그 자체로 기쁜 일이라 할 수 있으니.

부족원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축제는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부족원들이 다 기뻐 하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오빠,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에도라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면서 신마도를 꽉 끌어안았다.

연우의 명령에 따라, 아르티야에 충실히 복무를 하면서 층계 공략을 하던 중 부족으로부터 받게 된 비보(悲報)는 줄곧 그녀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무왕과 페이스리스의 결투.

이는 사사로이 보자면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와 숙부의 상잔이라 할 수도 있었으니.

어린 시절, 플랑에 대한 좋은 추억밖에 없던 그녀로서는 이렇게 밖에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했다.

그저 상잔이 유혈극으로 빚어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그리고 그건 판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마을에 들어온 후부터 줄곧 말이 거의 없었다.

“몰라. 솔직히 똑똑한 건 너지, 나는 아니잖아?”

판트의 목소리는 아주 무거웠다.

“하지만 그렇게 둔한 나도, 한 가지만은 안다. 숙부님은 이제 적이라는 것.”

천천히, 또박또박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만약 숙부님이 그저 왕좌에만 욕심이 있으신 거였다면, 나는 응원했을 것이다. 만약 숙부님이 무(武)로써 아버지를 꺾고 싶으신 거였다면, 나는 성원했을 것이다. 나 역시 숙부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

판트는 여전히 차기 부족장의 자리에 욕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건 정확하게는 언젠가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다는 열의에 가까웠다.

“그러나 숙부님은 그게 아니야. 삿된 것에 손을 대었고, 그동안 부족에 해가 될 만한 일들을 해 오셨다. 무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손에서 놓으신 것이지. 그리고…… 뒤에서 암약을 벌여 왔다. 나는 그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판트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도일이 그를 붙잡으며 했던 말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페이스리스가 손을 잡은 대상은 흑태자만이 아니야. 꽤나 많아. 개중에는……. 여하튼 조심해, 판트 형. 뭔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아. 이쪽에서도 계속 예의 주시하고 있을게. 필요하다면 언제든 개입할 수 있도록.

하지만 당시 판트는 도일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부족의 일은 부족 내에서 처리하는 것이 원칙.

절대 외부의 손을 빌릴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도일의 신신당부까지 무시한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저들이 딴짓을 할 수 없도록 신경을 단단히 세우고 있었다.

이미 청람가의 가솔들에게도 만약을 대비해 외곽을 경계하라고 따로 일러둔 상태.

만약 예상대로 저들이 무슨 꼼수를 부리려 든다면, 곧장 개입해서 제압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판트는 이제 충분히 자신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노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맞는 말이야.”

에도라는 판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가 언제 이렇게 생각이 깊어졌을까 싶어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래저래 밖에서 고생을 하다 보니, 이제 철없던 모습은 사라지고 일가를 이룰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두 남매가 침묵에 잠긴 채, 마을 초입을 뚫어져라 주시하고만 있던 그때.

“……온다.”

판트가 내뱉은 말에 에도라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러자 부족원들이 만들어 낸 길을 따라,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페이스리스가 보였다.

깡마른 체구에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은 모습. 거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풍기는 귀기(鬼氣)와 사기(邪氣)는 끔찍할 정도로 음산했다.

어느 누구도 지금의 그의 모습에서 지난날 호방하고 자신만만 하던 플랑을 떠올릴 수 없으리라.

거기다 페이스리스의 뒤편을 따라오는 자들은 판트 남매에게도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역시…… 장 오빠와 백선가는 저쪽에 붙은 모양이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창규가(彰奎家), 제검가(祭劍家), 신호가(神虎家) 등도 있었다. 청람가에 눌려 있다 뿐이지, 그래도 하나같이 부족 내에서 제법 세가 큰 곳들.

그동안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어느새 저쪽에 완전히 붙은 모양이었다.

다만, 에도라는 저들의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페이스리스를 지원하는 이유는 짐작이 간다지만, 그래도 무왕을 상대로 승산이 없을 거란 걸 모를 리도 없을 텐데, 벌써부터 저렇게 대놓고 대립각을 세워도 되는 걸까? 승부가 전부 끝난 다음에 어떤 탄압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보다.

‘어머니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을 텐데? 무슨 수를 쓴 거지?’

영접(靈接)이 이제 막 신접(神接)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에도라로서는 모든 것이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페이스리스는 어느새 무왕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다만, 기질은 전혀 달랐다.

페이스리스는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운 데 반해, 무왕은 한없이 여유로웠다.

“그동안 별래무양 하셨습니까, 형님?”

페이스리스가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지만.

무왕은 그저 페이스리스와 뒤따른 여러 가문의 장로들을 쓱 훑어보면서 실소를 흘릴 뿐이었다.

“뭐, 간밤에 깊게 자서. 그나저나 뒤에 주렁주렁 매단 것들은 뭐냐? 거추장스럽게.”

“감사하게도, 절 응원해 주는 분들이 아주 많아서 말입니다.”

“무슨 동네 골목대장 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는 짓이 참 우습구나.”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 말투가 누구에게로 향하는 것인지 모를까.

당연히 장로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뻘겋게 달아올랐다. 몇몇은 그게 무슨 망발이냐며 따지려 했지만.

“됐고.”

무왕은 귀찮다는 듯이 그들의 반발을 싹 무시하고, 페이스리스에게 손을 까닥거렸다.

“덤벼. 빨리 끝내고 들어가서 쉬련다.”

누가 보더라도 상대를 안중에 두지도 않는 모습.

순간, 붕대 사이로, 페이스리스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들거렸다. 그러다 입술 끝이 크게 비틀렸다.

“저도 역시 그게 편하니 그렇게 하시지요.”

그 순간, 백선가의 장로들이 돌아서서 크게 외쳤다.

“왕좌 결투를 시작한다! 모두 물러나라!”

둥, 둥, 둥-!

기다렸다는 듯이 전고(戰鼓)가 울리고.

부족원들은 결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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