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08화 (608/862)

8화. 무왕(武王) (2)

“그거 아십니까, 형님?”

“뭘?”

모든 구경꾼들이 물러난 공터.

페이스리스는 본격적으로 부딪치기에 앞서 몸을 가볍게 풀면서 미소를 지었다.

무왕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귀찮아 죽겠다는 듯, 여전히 뚱한 표정을 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페이스리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웃는 낯 그대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한평생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었다는 것 말입니다.”

“……?”

“그만큼 형님은 제게 있어 하늘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 가문 내에서 제법 괜찮은 재능을 타고났다는 평가를 받았었고, 그만큼 어른들께 기대도 받았습니다만…… 그러니 충분히 다른 형제들처럼 저 역시 형님을 제 라이벌로 여길 수도 있었겠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너무 눈부신 태양이 있는데, 그 옆에만 서도 충분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그건.”

붕대 안쪽으로 눈이 가늘게 호선을 그렸다.

“선아 녀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

창무신 플랑이 검무신을 가리킬 때 부르던 애칭.

무왕이 음검을 깨워 보겠다면서 처음으로 받아들였던 제자.

아니, 파문 제자.

“이놈은 형님의 눈부신 모습에 완전히 도취되었고, 그렇게 되고 싶다고 늘 갈망하였습니다. 녀석에게 무공을 익히라며 권고했던 건 저였으되, 결국 녀석이 쫓은 것은 형님의 길이었지요. 결국 형님께 내쳐지고 말았지만요.”

호선을 그린 눈동자 사이로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귀기가 뒤섞인 귀광(鬼光).

“저와 선아만이 아닙니다. 청화도에서 무를 쫓았던 녀석들이 대개 다 그러하였고, 그 외에도 형님을 우러러보며 경외하던 이들도, 좌절을 겪었던 이들도 있었지요. 형님은, 형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아주 강한 족적을 남기신 겁니다.”

무왕은 가만히 인상을 찡그렸다. 친동생이 유언으로 남기는 말이나 다름없으니 차분히 들어주기나 하자고 여기고 있었는데. 자꾸 쓸데없는 말만 이어지니 짜증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짝다리를 짚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역시. 형님은 늘 한결같으십니다.”

순간, 페이스리스의 귀광이 짙은 암녹색으로 번들거렸다.

“제 말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형님을 뵙고 싶어 하는 팬덤이 아주 어마어마하다는 거지요.”

바로 그때.

『남편, 물러서!』

영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다급하게 어기전성으로 외쳤지만.

그보다 먼저 페이스리스가 거세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무왕은 녀석의 전신을 감고 있던 붕대가 전부 풀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파앗!

무왕을 둘러싼 세계가 한순간 반전되었다.

그러다 다시 제자리를 찾았을 때, 그는 더 이상 외뿔부족의 대련장에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잿빛으로 가득 찬 세계.

오로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지평선을 따라 촘촘하게 서 있는 언덕들뿐인 지형이었다.

그리고.

페이스리스가 있던 자리에는 플랑이 서 있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채로.

판트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 같은 큰 덩치와 구릿빛으로 빛나는 근육을 자랑하는 사내. 오른손에는 족히 3미터는 될 것 같은 흑색 장창을, 왼손에는 그보다 짧은 1미터 50센티 정도의 단창을 들고 있었다.

창무신(槍武神)이라 불리던 시절. 부족 내에서도 무왕과 대장로를 제외하면 적수를 찾기가 힘들며, 청화도를 최고의 클랜으로 이끌었던 전성기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여태 심드렁하기만 하던 무왕의 눈빛이 처음으로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것이 그에게 의미하는 바는 절대 작은 것이 아니었다.

무왕은 여태 이번 왕좌 결투를 별것 아닌 것처럼 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사실은 모든 감각과 의식을 페이스리스에 집중하고 있었다.

영매도 마찬가지.

영소(靈沼)에서 마을의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그녀는 지난 시간 동안 틈틈이 마을과 부족원들은 물론, 심지어 무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여러 세력들에 대한 동향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절대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비록 올포원이 가졌다는 〈천리안〉에는 미치지 못할지도 모르나, 그래도 탑 내에 벌어지는 상황들에 대해 모르는 바가 거의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영매는 페이스리스가 암중으로 백선가를 비롯한 여러 장로들과 접선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으니까.

다만, 그것이 ‘반란’의 증거는 아니었기에 내버려 두었던 것인데.

그리고 이번 왕좌 결투가 벌어질 때까지만 해도 철저하게 감시를 했고, 그만큼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고 있는 건 아닌지 검문까지 마쳤었건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페이스리스는 순식간에 무왕을 전혀 다른 곳으로 끌고 와 버렸다.

마법은 분명히 아니었다.

마을의 결계는 그들에게 해가 갈 만한 것들을 전부 강제로 해제시켜 버리니까.

즉, 이것은 페이스리스가 터득한 기예, 권능인 게 분명했다.

여하튼.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어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이것이 아마도 그녀에게 ‘필멸’이라는 점괘를 내놓게 만든 저들의 함정이라는 것을.

“심상 결계냐?”

무왕은 자신을 에워싼 잿빛 세계를 쓱 훑어보면서 물었다. 그의 모습, 어디서도 당황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영매의 ‘눈’을 피해 이런 일을 해낸 것이 대단하긴 하다지만.

무왕이 여태 살아오면서 겪은 함정이 어디 이것 하나뿐이었을까.

페이스리스, 아니, 창무신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혹여 타계의 신이라고 아십니까?”

“대강은.”

“흑태자, 그 친구가 우연찮게 그들의 힘을 일부 빌릴 수가 있었다더군요.”

“흑태자?”

그 순간, 창무신 옆으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오랜만이오, 무왕.”

아홉 왕 중 한 명이자, 다우드 형제단의 수장이 반갑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두 눈동자만큼은 당장이라도 그를 집어삼킬 것처럼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왕으로서는 콧방귀만 나올 모습이었지만.

“코뼈는 무사하냐?”

“보다시피. 사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유일하게 가진 콤플렉스가 낮은 콧대였는데, 무왕 덕에 올려 세울 명분을 얻었지 뭐요? 내 언젠간 무왕께 참으로 감사하단 말을 전해 주고 싶었다오. 이렇게 기회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하하!”

흑태자는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워 죽겠다는 듯,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지난날, 그로 인해 상처 입었던 자존심을 이제야 겨우 세울 수 있게 되었는데!

야네크의 암굴에 잠입시켰던 첩자들의 임무는 사실 단순히 혈루석을 캐내는 것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 아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존재들과 접선할 것.

중앙 관리국에서 마해(魔海)라 부르는 곳으로 가, 그곳의 ‘왕’들을 만나고, 힘을 빌려오는 것이 진정한 목표였다.

흑태자는 그동안 작금의 플레이어들로는 절대 탑을 장악할 수 없을 거라 여겼고, 올포원은 물론 천계의 초월자들도 상대할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들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다른 힘을 빌려야 한다.

그것이 그동안 그가 내렸던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판단은 적확했다.

덕분에 마해의 왕 중 한 명인 ‘토끼’를 만나 자신이 바라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까.

이곳 심상 결계가 바로 그런 힘 중 하나였다.

마해에서 직접 퍼 올린 혈청을 진축으로 삼아, 주변 일대에 걸쳐 심상 세계를 체현할 수 있는 결계를 강제로 구축한다. 물리 세계에 강제로 자신만의 ‘성역’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또한, 현재 진축은 페이스리스가 맡았으니.

그 말인즉.

지금 이 세계는 페이스리스의 성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바.

흑태자는 자신이 얻어 낸 힘이었지만, 그가 직접 사용하지 않았다. 페이스리스가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나와 함께 하는 동료들도 같은 생각이라오.”

무왕을 중심으로, 흑태자가 나타났을 때와 동일한 검은 안개가 마구잡이로 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사람의 형상을 갖추면서, 하나같이 무기를 뽑아 무왕을 겨누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전부 강한 살의를 풍겨 대고 있었다.

몇몇은 창무신이나 흑태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거나, 어쩌면 비등할지 모르는 이들이기도 했다.

그런 숫자가 모두 99명.

그리고 100번째 검은 안개가 창무신과 흑태자 사이로 피어났다.

그것은 검무신이 되었다.

그는 소싯적에 자신을 상징하던 사선검을 둥둥 띄워 놓은 채, 부리부리하게 눈을 떴다.

『저희가 만든 스테이지가 어떠십니까, 스승님?』

벙어리였던 시절로 돌아가, 어기전성도 같이 흘려 내면서.

“허, 참!”

무왕은 검무신과 창무신, 흑태자 등 100명에 달하는 이들의 면면을 살피면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로서는 익숙한 얼굴들뿐이었으니까.

한때 그와 대적하거나 패배하고 말았던 이들.

하나같이 무왕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작자들이었다.

“대체 이딴 허섭스레기들을 어떻게 모은 거냐? 참 재주도 용하다, 야.”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스승님께 대적할 것이라 말하니, 다들 알아서 돕겠다고 나서더군요. 심지어 자신의 가슴을 열어 직접 심장을 뽑아 주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곳 심상 세계에 출현한 존재들은 모두 그가 그동안 〈카니발〉로 흡수한 존재들 중 가장 강한 이들만 골라 뽑은 것이었으니.

『그러니 그만큼 스승님께도 충분히 즐거운 유희가 될 수 있을 거라 자부합니다.』

“그거 아냐?”

『무엇입니까?』

“먼지를 아무리 모아 봤자, 한 번 후 하고 불면 전부 덧없이 사라진다는 거?”

오만한 발언에 망자들은 일제히 인상을 팍 찡그렸지만.

검무신은 유독 담담했다.

『압니다.』

“알아? 그런데도 이런 짓을 저질러?”

『당연히 여기서 끝낼 게 아닌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검무신이 천천히 오른팔을 위로 들었다.

그 순간, 그의 손목에 감겨 있던 팔찌가 스르르 풀리면서 창과 비슷한 형태를 갖췄다.

한때 그가 ‘칼’이라고 부르던 신물, 궁그닐.

검무신은 그걸 잡아 그대로 지면에다 찔렀다.

[‘궁그닐’이 작동하였습니다!]

궁그닐은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의 주신인 오딘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대신물.

그 특성은 단순히 신벌인 벼락을 부르는 것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검무신이 궁그닐을 그토록 애지중지하지 않았겠지.

궁그닐의 진정한 가치는 하계에 아스가르드의 법칙을 강제로 구현시킨다는 데에 있었다.

[심상 세계에 새로운 성질이 부여되었습니다!]

[인과율이 부여됩니다.]

[인과율이 부여됩니다.]

……

[심상 세계의 격이 강제로 상승합니다!]

[심상 세계의 격이 강제로 상승합니다!]

……

[심상 세계가 천계와의 우회로를 개통, ‘아스가르드’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쿠쿠쿠!

심상 세계가 거칠게 떨리면서 신력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아스가르드’의 신, 헤임달이 플레이어, 플랑을 사도로 지정하였습니다.]

[헤임달이 강림합니다!]

[‘아스가르드’의 신, 발두르가 플레이어, 사칸달을 사도로 지정하였습니다.]

[발두르가 강림합니다!]

……

더불어 100명의 망자들이 일제히 사도로 지정되면서, 그들의 영혼을 빌린 강림이 속속들이 이뤄졌다.

수없이 명멸하는 이펙트로 인해 심상 세계가 화려해지는 가운데.

『스승님은.』

검무신은 무왕에게 차갑게 일갈했다.

『절대 여기서 살아 나가실 수 없을 겁니다.』

[‘아스가르드’의 신, 토르가 플레이어, 선을 사도로 지정하였습니다.]

[토르가 강림합니다!]

파직, 파지직!

파지지직!

검무신의 육체가 토르의 샛노란 뇌전으로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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