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무왕(武王) (3)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의 대성역(大聖域)이 구현되었습니다!]
“그쪽들과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왕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놈들을 바라봤다.
백 명이나 되는 신격들이라니.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하계에 대성역을 설치할 정도라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신의 사회가 여태 갖고 있던 인과율 중 대다수를 소모했을 게 분명했다.
아마 그 정도의 양을 채우기 위해서는 최소 수백 년은 족히 걸릴 테지.
그런데 그러고 나서 시도하려는 게 자신의 암살이라니.
당연히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스가르드의 신격들은 하나같이 진지했다.
『무왕 나유.』
잠든 오딘을 대신해 오랫동안 아스가르드의 수장 역할을 해 왔던 토르가 검무신의 입을 빌려 말을 꺼냈다.
『본인과 본 사회는 개인적으로는 그대에게 딱히 유감스러운 일이 없다. 그대는 소호 금천의 후손 중 단연 뛰어난 존재이며, 능히 우리가 있는 천계를 넘볼 만한 힘을 지니고도, 필멸자로서의 한계와 그릇을 스스로 자각하여 하계에 머물기를 바랐던 신실한 존재였으니까.』
필멸자?
한계? 그릇?
무왕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하지만 토르는 그런 무왕의 달라진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샛노란 뇌기를 더 크게 튀기면서 외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대의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 너희들은 ‘카인’이라 부르던 불경한 존재를, 죄인을 이 세상에 내놓고 말았으니. 그 죄가 어찌 작다 할 수 있겠는가? 해서 이에 우리 아스가르드는 그대에게 죄를 묻고자 한다.』
무왕은 그제야 전후 사정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저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연우에게 뺨 맞고 자신에게 화풀이하러 왔다는 게 아닌가.
아아.
젠장. 정말 폼 많이 죽었다, 나유.
아무리 그동안 쉰 지 오래되었다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나 존재감이 사라질 수 있는 건지. 이건 완전히 제자 새끼의 발목이나 잡는 삼류 들러리 신세잖아?
아직 스스로 현역이라 자부하고 있는 무왕으로서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소리였고.
제자에게 ‘인질’로 잡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화를 더 부채질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무왕의 고개는 더 비딱하게 돌아갔다. 그 와중에도 토르는 근엄한 투로 어려운 용어를 써 가면서 이런저런 명분을 주워 섬기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신박한 개소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야.”
그렇기에 그냥 말허리를 잘라 버렸고.
『무슨……!』
“다 지껄였냐?”
『어디서 망발을 하……!』
“그럼 그 주둥이부터 좀 닫고 시작하자.”
쾅!
무왕은 이만하면 많이 참아 줬다는 생각에 지반을 세게 밟았다.
토르는 타고난 전사답게 몸을 뒤로 물리면서 뇌전을 더 크게 튀어 올렸다. 동시에 그에게 육체를 빌려 준 검무신의 의식도 빠르게 움직이면서 허공으로 띄운 사선검이 빛살처럼 쇄도했다.
콰콰쾅!
뇌전을 휘감은 사선검은 이미 하나하나가 막강한 위력을 자랑 하고 있어 웬만한 신격들도 맞대 응하길 꺼려 할 정도였지만.
퍼버벙-
무왕은 마치 날벌레라도 쫓는 것처럼 가볍게 손을 휘젓는 걸로 사선검을 모조리 분질러 버리더니, 어느새 토르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흠칫.
무왕이 이렇게 빨리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토르는 놀라면서도 반사적으로 재빨리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주먹 끝에서 뇌기가 단단히 응축되었다가 터졌다.
대성역이 거세게 요동칠 정도로 어마어마한 폭발.
하지만.
파바박!
무왕은 아주 여유롭게 폭발 사이로 몸을 밀어 넣더니, 토르의 손목을 단번에 낚아채면서 그대로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맹수의 하울링처럼 으르렁거리던 뇌기가 무왕을 당장이라도 잡아먹기 위해 그의 몸 위로 올라 탔지만, 피부를 따라 흐르는 호신강기(護身罡氣)의 단단한 방벽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힘이!’
토르는 감히 자신에게 힘겨루기를 시도하는 무왕에게 본때를 보여 주려다가, 도리어 자신이 끌려가게 되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천계에서도 손꼽히는 장사(壯士)인 자신을 어떻게……?
하지만 토르의 그런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곧 강한 충격이 복부를 후려치고 말았으니까.
『커헉!』
어느새 무왕의 무릎이 명치에 꽂힌 것이다. 영혼이 이대로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 토르의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사이.
“소리 좋고.”
휘리릭-
무왕은 비릿하게 웃던 그대로 이번엔 손목을 뒤쪽으로 강제로 꺾으면서 인중, 명치, 단전 등, 약점으로 분류되는 곳을 잇달아 가격했다.
“그럼 장단을 울리자꾸나.”
퍼퍼퍼펑!
무왕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아주 깔끔했다. 간결한 움직임만으로도 토르는 살집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며, 다리가 날아가는 등, 엄청난 신위를 선보였다.
토르는 어떻게 반격할 새도 없었다. 두들겨 맞는 내내 도저히 정신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신체를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다. 그만큼 무왕과 토르 사이에는 엄청난 실력 차가 존재했던 것이다.
『토르!』
『네놈이, 감히!』
이를 보다 못한 다른 신격들이 줄지어 달려들었지만.
쾅!
무왕은 가볍게 웃던 그대로, 발을 세게 굴렀다. 진각과 함께 땅거죽이 크게 일어나면서 무수히 많은 모래 알갱이가 튀어 올랐다. 막대한 강기가 압축된 알갱이들. 적들에게는 무시무시한 흉기나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결국 덤비던 신격 중 상당수가 거기에 휘말린 채 폭사하고 마는 가운데.
무왕은 어느새 손을 뻗어 토르의 안면을 강제로 틀어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경악에 젖은 토르의 눈동자가 보였지만.
콰직!
무왕은 다른 말은 필요도 없다는 듯이 손아귀에 잔뜩 힘을 주었다. 토르의 머리통이 그대로 박살 나면서 살점이 아래로 후드득 쏟아졌다.
아무리 적으로 만났다 하더라도, 토르가 내려앉은 그릇은 검무신인데도. 자신이 직접 키웠던 제자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무왕은 압도적인 무력 차로 토르를 처치했어도, 여전히 싸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가 풍겨 대는 기운이 워낙에 살벌해 남은 신격들은 잔뜩 굳은 채 어떻게 나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무왕의 시선이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는 언덕 위.
휘이이이!
샛노란 뇌기가 뭉친다 싶더니, 토르가 다시 나타났다.
안색은 좀 전보다 조금 창백했지만, 그래도 겉보기엔 비교적 멀쩡해 보였다.
“주둥이는 어떠냐? 아직 무사해?”
『…….』
무왕이 차갑게 웃으면서 던진 질문에, 토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뒤따라 다시 나타난 다른 신격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도저히 필멸자의 것이라 고는 생각도 하기 힘든 그의 실력에 강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괴…… 물!’
토르는 그제야 자신들이 어떤 존재를 건드렸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연우의 스승이라 하기에, 그를 압박할 수단으로 삼으려 했을 뿐이었는데.
하계의 존재라고 무시했던 것이……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토르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물러날 곳이 없는 데다가, 연우와 다르게 무왕은 혼자였으니까.
반면에.
자신들은 머릿수에서 단연 압도적이며, 대성역 내에서는 얼마든지 몇 번이고 부활을 이뤄 낼 수 있었다.
결국 지쳐 쓰러지는 쪽은 저쪽이리라.
‘그리고 저런 놈은 반드시 제거해야만 한다. 지금의 상태로도 이럴진대, 탈각이나 초월까지 이룬다면…… 우리가 설 자리는 더더욱 없어진다.’
결국 생각을 정리한 토르는 대신물, 묠니르를 천천히 꺼내면서 다시 무왕에게로 달려들었다. 최대로 출력한 뇌기가 어느새 하늘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좀 전에는 방심해서 당했다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안 된다면, ‘그것’이라도 쓴다.’
지금부터 무왕은 그들의 공적이었으니까.
쐐애액!
그렇게 무수히 쏟아지는 백 개의 권능 아래에서.
“비바스바트, 이 개새끼는 왜 안 와? 평상시에는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하여간 꼭 필요할 때는 쓸모가 없어요.”
무왕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 올포원을 떠올리면서 의문을 던지다가, 곧 생각을 접으면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래. 어디 한번 제대로 해보자. 신살이란 거, 나도 좀 해 보고 싶었거든?”
콰아아앙!
그렇게 대성역이 무너질 듯한 큰 충격이 있은 뒤.
무왕이 트로와 몰니르를 상대하는 동안, 사각지대를 파고든 헤임달-창무신의 창날이 그의 왼쪽 장딴지에 깊숙하게 틀어박혔다.
[‘히드라의 독’이 급격한 속도로 퍼집니다!]
[‘가이아의 저주’가 발현됩니다!]
* * *
무왕이 심상 세계에 갇힌 순간, 마을도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어, 어? 이게 뭐야?”
“왕좌 결투에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결투를 감상하려던 부족원들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잔뜩 어렸다.
넓은 결투장을 따라, 거대한 높이와 크기를 자랑하는 반구 모양의 결계가 세워졌으니까.
대장로를 비롯한 여러 장로들이 즉시 무공을 있는 힘껏 퍼부어 댔지만, 결계는 부서지기는커녕 오히려 에너지들을 흡수해 버렸다.
안쪽도 전혀 보이질 않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니.
더구나 당혹스러운 건 페이스리스를 지지하는 쪽도 마찬가지였던지, 백선가를 비롯한 인사들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백선가주!”
바로 그때, 대장로가 거칠게 일갈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모든 부족원들의 시선이 그와 안색이 창백해진 백선가주에게로 쏠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걸세!”
“나, 난 그저 플랑의 말을 믿었을……!”
백선가주는 다급히 자기변명을 하려 했다.
왕좌 결투는 신성한 전통이다. 그것을 망가뜨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제아무리 큰 가문의 수장이라 해도 엄벌을 피할 수 없었다. 하물며 대장로는 무왕에 버금가는 실력자가 아닌가. 그가 대로한 채로 죄를 물으려 한다면 큰 피해를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콰콰쾅!
갑자기 마을 외곽에서부터 거친 폭음이 연달아 울리더니, 서너 개의 불기둥이 하늘 위로 치솟았던 것이다.
마을을 보호하고 있던 결계며 진법이 모조리 박살 나면서 기의 순환이 꼬이는 것이 느껴졌다.
“오빠!”
“알았으니까 서둘러!”
에도라는 다급히 판트를 부르면서 자리를 이탈하고자 하였다.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서로가 뭘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판트는 습격자들이 침투를 시작한 외곽 숲 지대로, 에도라는 영매가 있을 영소로.
결계가 저렇게 갑자기 부서졌다는 건, 누군가가 영매의 ‘눈’을 가렸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으니까.
‘어머니가 위험해!’
에도라는 신마도를 꼭 끌어안으면서 있는 힘껏 경신술을 펼쳤다.
* * *
“이건, 대체……?”
프레지아는 아나스타샤가 자신을 다급히 찾을 때까지만 해도, ‘참 귀찮게 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그녀의 업무는 나날이 바빠지고 있었으니까.
주 거래처인 탑의 세계를 비롯해서, 요즘 전 우주와 차원에 걸쳐 다양한 소요와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원인이야 각기 다 다르겠지만, 역시나 가장 큰 원흉은 탑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재편(再編)이었고.
그녀는 그런 재편을 조사하던 중 강제로 이곳에 소환된 차였다.
만약 아나스타샤가 바이 더 테이블의 대주주가 아니었더라면. 아니, 그녀의 절친한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서둘러 오라던 편지의 추신에 적힌 한 마디가 그녀를 강제로 끌어오고 말았으니.
-크로노스 님을 찾았어.
프레지아는 정말 그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포포 말고도, 너 역시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니 내 마음이 다 편하구나.』
“정말…… 크로노스 님이십니까?”
나무를 조각해 만든 탈 안쪽, 그녀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냐?』
“아!”
프레지아는 짧게 감탄을 터뜨리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눈물을 펑펑 쏟았다.
레아가 크로노스를 찾겠다며 타천을 시도한 이후, 까마득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가 되돌아온 것이니. 하물며 그들의 아들이 오래전에 자신이 투자했던 대상인 연우라 하지 않는가. 저절로 마음이 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나스타샤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에도 짧은 해후의 시간이 지난 뒤.
“……아다만틴 노바, 말씀이십니까?”
『그래. 스퀴테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최대한 많이 필요하단다. 혹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
크로노스는 프레지아의 눈가에 언뜻 스치는 당혹감을 놓치지 않았다.
프레지아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평상시 바이 더 테이블을 이끌던 수장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에야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아다만틴 노바의 주재료가 되는 혈루석 등은 현재 이곳 탑만이 아니라, 다른 차원이나 우주에서도 구하기가 아주 힘듭니다.”
『음? 이것이 그리 귀했던가?』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정확하게는 최근 들어 혈루석이나 아다만트 등이 시장에 나올 때마다 비싼 값에 전부 사들이는 조직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크로노스와 연우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아다만트가 귀한 광석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쉽게 다룰 수 없는 물건이었다. 섣불리 손을 댔다간 오히려 큰 피해만 입을 텐데, 대체 어디서……?
『거기가 어디기에?』
크로노스의 질문에 프레지아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시의 바다입니다.”
“……!”
연우가 자기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 순간.
『형! 큰일 났어!』
사도와의 채널링이 갑자기 활짝 열렸다.
도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