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11화 (611/862)

11화. 무왕(武王) (5)

『아난타.』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채, 깊디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목소리’가 들렸던 것은.

『나의 목소리를 들어 줘, 아난타.』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제발, 아난타.』

환청이라고.

그를 향한 너무 깊은 마음이 자신을 또다시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절대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리고 만, 미운 사람이었다.

『바보 같으니. 대체 내가 무엇이라고 네가 이런 고생까지 하는 거야?』

그렇기에 처음에는 그냥 무시했다.

그리고 더더욱 깊이 잠들려 했다.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말아 줘.

날…….

제발 편하게 있게 만들어 줘.

그렇게.

그렇게 생각했다.

『기억나? 처음 만났을 때.』

하지만 환청은 계속 귓가를 맴돌았고.

『서로 참 죽어라 싸웠던 것 같은데. 그러고 나면 발데비히가 화해하라면서 타 줬던 레모네이드도 맛있다고 먹었고.』

죽은 그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추억을 속삭였다.

『그런데 사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맛 참 더럽게 없었어. 그렇지?』

만약 손이 있다면, 귀가 있다면,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또 언제였더라.』

하지만.

『공략 같이 올라가다 말고, 내가 소매치기당해서 돈 잃고 얼이 빠져 있던 적도 있었는데. 난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너는 되게 침착하게 이거저거 해야 한다고 딱딱 순서를 끊어서 말해 줬었잖아.』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너 되게 멋졌었다?』

너무 좋았으니까.

『그 외에도 비슷한 일들 참 많았지. 우리 팀이 아니면서도 이상하게 충돌할 때도 많았고, 언제부턴가 우리끼리 같이 다닐 때도 많았으니까.』

너무 좋아서 심장이 다시 두근거릴 것만 같았다.

『솔직히 말해. 그거 그때는 우연인 줄 알았는데, 사실 네가 우연인 척 꾸민 거였지?』

환청은 때로 장난 가득한 목소리로 짓궂게 굴기도 했고.

『하여간 이래서 인기 많은 남자는 힘들다니까. 그래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도 너랑 어울리는 게 참 재미있었던 것 같아. 즐거웠었고.』

따스한 목소리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주기도 했다.

『넌 항상 나에게 진심을 보여 줬었으니까.』

겨우 머리 한편에다 묻어 뒀던 기억들이 하나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시간이 시계태엽 같은 거였다면, 거꾸로 감아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추억들이 사진처럼 한 장 두 장씩 나타날 때마다 그립던 감정이 새록새록 샘솟았으니까.

『아마도…… 너도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일 테지.』

그러다 환청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해. 나도 그랬으니까. 언제나 같은 시간에서만 맴돌고자 했어. 당시가 나에겐 가장 힘들면서도……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나날들이었거든. 그때를 도저히 벗어나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그녀를 위로했다.

그러다.

『하지만 아난타.』

환청은 그녀에게 일깨워 주고자 했다.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이고, 덧없이 빠져나가 버린 것들이야.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그곳을 바라봐도 절대 되돌아오지 않아.』

그 말 하나하나가 그녀의 마음을 쑤셨다.

그게 너무나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여태껏 우리가 고생하던 나날들은 그냥 묻어 버리자. 대신에 앞으로 더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들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환청은 그런 상처마저 이제 곧 아물 것이라고 어루만져 주었다.

『우리에겐.』

아픔이 거짓말처럼 조금씩 희석되었다.

대신에.

무언가가 보이는 듯했다.

『딸이 있잖아?』

‘……!’

그 순간.

와장창창!

그녀-아난타는 자신을 에워싼 세상이 모두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그리고 고개를 위로 들었을 때, 그가 있었다.

꿈에서나 그리던 얼굴이.

차정우가…… 이쪽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엄마가 되어서, 딸이 애타게 계속 찾는데 언제까지 잠만 잘 거야?』

이곳은 의식 세계.

깊게 잠든 그녀를 깨우기 위해 차정우의 사념체는 그녀의 의식을 쉴 새 없이 두들겨 댔고.

그녀는 이제야 그 목소리에 호응한 것이다.

차정우는 아난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고, 가장 먼저 그런 말을 던졌다.

장난기가 가득 어린 말투. 그들이 함께 탑을 오르던 시절에 자주 보이던 모습이었다. 당시를 상기한 아난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눈가가 저절로 촉촉하게 젖는 것 같았지만.

아난타는 손으로 눈가를 훔치기보다는 씩 웃었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는 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네가 할 소리는 아니잖아.’

『맞아. 옛날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어느 아빠가 육아를 엄마한테만 맡기는 건지. 참 나쁜 아빠야, 그렇지?』

차정우는 아난타에게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지난 시간 동안 내가 모르고 외면했던 것들, 내팽개 쳤던 것들…… 수습할 수 있도록,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이제부터는 내가 정말 잘할게.』

아난타는 차정우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토록 잡고 싶었지만, 잡을 수 없었던 손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저도 모르게 그것을 붙잡으려다, 한순간 뒤로 홱 하고 뺐다.

‘싫어.’

『……응?』

순간, 처음으로 차정우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어렸다.

아난타는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애타게 널 기다렸던 건 나였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온다고 하면 내가 만세, 하면서 맞잡을 줄 알았니? 꿈 깨져.’

『그,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언제나 상대의 관심과 사랑을 그리워하던 건 아난타였을 텐데.

이제는 달랐다.

아난타가 튕기고, 차정우가 그런 그녀에게 매달리고.

‘글쎄.’

『아, 아난타……!』

차정우가 어쩔 줄 몰라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동안, 아난타는 저만치 앞서 걸었다.

차정우는 차마 그녀를 붙잡지도 못하고 주춤거려야만 했다.

그때, 아난타의 걸음이 잠깐 멈췄다. 그녀는 뒤를 슬쩍 보면서 새치름한 모습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생각 좀 해 보고.’

『그, 그럼……!』

차정우가 뭐라고 말하려던 그때였다.

엄마……!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고.

아난타와 차정우는 동시에 고개를 위로 들었다.

굳은 얼굴이 되어.

* * *

“내 딸한테서…… 꺼져!”

『내 딸한테서…… 꺼져!』

아난타가 깨어나자마자 내뱉은 말은 아주 차가웠다.

하지만 수년 만에 일어나서 그런 걸까. 온몸이 삐거덕대고 있었다.

항상 넘쳐흐르던 용인의 마력은 개울물처럼 아주 협소해지고, 근력도 많이 망가져 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아마 스탯창을 열어 보면 아주 참혹하지 않을까.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던 검을 주워 트로이에게 박아 넣었지만…… 이마저도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아난타는 그런 자신의 상태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화가 잔뜩 나 있을 뿐이었다.

내 딸을.

내 딸을…… 해코지하려고 해?

감히?

비록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딸은 아니었지만.

마음으로 낳은 딸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고, 아꼈던 아이를 누군가가 해하려 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이가 이런 위험한 상황에 내몰릴 때까지 계속 잠들어 있었단 사실이, 자신의 그런 못난 모습이 미울 뿐이었다.

아이의 엄마로서 자격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생각은 차정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되어서도 여태껏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딸.

이 손으로 한 번 안아 주지도 못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못했던 가여운 아이를 다시 상처 입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다르리라.

아버지가 되어 딸을 지키지 못한다면.

가족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아빠’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두 사람은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입으로, 동시에 그렇게 소리쳤다.

“엄…… 마? 아빠?”

세샤는 언제나 깨어나길 바라던 엄마가 일어나 자신을 구해 주었단 사실에 눈을 크게 뜨면서도, 동시에 그 뒤로 나란히 겹치는 다른 누군가를 볼 수 있었다.

연우 삼촌과 닮았지만 다른, 따스한 눈매를 하고 있는 사람.

빛나는 갑주와 새하얀 날개를 두른 채, 세상 어느 누구보다 든든하고 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세샤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엄마! 아빠!”

세샤는 눈물이 잔뜩 글썽거리는 얼굴로, 하지만 활짝 웃는 모습으로 두 사람을 불렀다. 여태껏 그녀를 괴롭히던 트라우마는 거짓말처럼 해체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딸, 조금만 기다리렴. 엄마가 구해 줄게.”

『딸, 조금만 기다리렴. 아빠가 구해 줄게.』

아난타와 차정우는 이번에도 똑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세샤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한없이 자상한 모습이었지만.

“감히 내 딸을 건드려?”

『감히 내 딸을 건드려?』

다시 고개를 들어 적들을 보았을 때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후회하게 해 주지.”

『후회하게 해 주지.』

파앗!

둘은 똑같이 움직였다.

차정우는 아난타에 빙의한 채, 갓 일어나 근력과 마력이 쇠퇴한 그녀의 부족분을 채워 주었다.

이질감은 전혀 없었다.

한때, 탑의 세계에서 유이하게 남은 용인이었던 두 사람이었던 만큼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이런! 젠장……!”

가슴이 뻥 뚫리고 만 트로이는 피를 잔뜩 흘리는 채로 몸을 뒤로 내빼고 있었다. 다행히 기습을 당하기 전에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서 심장이 다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상태도 충분히 치명상에 가까웠다.

문제는 아난타가 도저히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었다.

분명히 ‘하이에나’로부터 의식도 없는 식물인간이라고 들었건만. 사실은 여태 상태를 숨기고 있었던 걸까? 이유가 어떻게 되었건 간에 지금은 이 상황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아난타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어느새 등가죽을 뚫고 나온 용의 날개가 잔뜩 성이 난 채로 허공을 마구잡이로 때렸고, 들고 있는 검은 다른 어느 때보다 시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하늘 날개와 빛의 파도 같은……!’

트로이가 언젠가 보았던 헤븐윙의 모습을 떠올린 순간, 세상이 반전되었다. 그리고 그는 어느새 시야를 온통 물들인 하얀 섬광에 눈이 먼 채로 의식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것이 한때 호크 아이라 불리면서, 레드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 화이트 드래곤까지 쉴 새 없이 소속을 갈아타면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희대의 간웅이 가졌던 마지막 생각이었다.

콰아아앙!

아난타의 검에서 발출된 빛줄기는 삽시간에 거미줄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쳐 나가면서 적들을 단숨에 쓸어버렸다.

휘휘휘!

돌풍이 휘몰아쳤다. 불씨와 검은 재가 휘날리는 가운데, 아난타는 바로 그 중심에서 용마안을 잔뜩 번뜩이면서 남은 적들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화이트 드래곤의 플레이어와 랭커들은 잔뜩 굳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자신들이 건드려서는 안 될 건드린 것 같다는 생각이, 경고가 머릿속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이, 이게 무슨……!”

“어, 어, 어떻게……?”

그것은 소싯적 레드 드래곤에 몸을 담으며, 여름여왕의 명령을 받아 왔던 그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기운이었다.

그리고 도저히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운이기도 했다.

드래곤 피어(Dragon Fear).

세상 모든 하위종들의 유전자에 새겨진 공포심을 자극한다는 용종 특유의 기세.

공기가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 되어서도, 도저히 말을 길게 이을 수가 없었다.

세상이 정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장을 휘어잡는 아난타의 뒤로, 들의 시야에는 똑똑히 보였다.

배후령처럼 서 있는 헤븐윙 차정우의 모습이!

“뒈질 각오는.”

『뒈질 각오는.』

“되었겠지?”

『되었겠지?』

아난타의 목에 걸린 회중시계의 초침이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침입자들의 남은 수명을 가리키듯.

째깍.

째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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