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12화 (612/862)

12화. 무왕(武王) (6)

‘최대한 빨리 끝내자.’

아난타는 적들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으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발푸르기스의 밤에 쫓기면서 살아왔던 터라,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데는 이미 도가 텄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보았을 때, 지금 자신의 상태로 지구전은 절대 불가능했다.

아무리 차정우의 사념체가 하늘 날개를 전개하면서 마력을 증폭시킨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차정우의 사념체도 완전히 복원된 건 아니었으니까.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겨우 복구한 존재가 다시 흐트러질 우려가 있었다.

그렇기에 아난타는 속전속결을 요구하였고.

차정우는 알겠노라고 답변하면서 하늘 날개를 높이 세웠다.

두 명의 용인이 일으킨 드래곤 피어가 곧 프레셔(Pressure)로 강화되면서 막강한 무게를 더하였고.

그들은 이내 잔뜩 얼어붙은 놈들에게로 거세게 몸을 날렸다.

애당초 화이트 드래곤의 기원은 레드 드래곤. 여름여왕의 아래에 있던 녀석들이 아닌가. 당연히 용의 기세에는 많이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콰르르릉-

아난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칼날을 타고 빛무리가 잔뜩 폭사되었다.

빛의 파도.

한때, 헤븐윙을 여러 랭커들의 공포로 군림하게 만들며, 끝끝내 8대 클랜들까지 등 돌리게 만들었던 넘버링 스킬이 터질 때마다, 화이트 드래곤의 클랜원들은 한 줌씩 지워졌다.

“제, 젠장……!”

“어째서 헤븐윙의 기술이 저년한테서 발휘되는 거냐고!”

“이, 일단 물러서야 해……!”

클랜원 중 상당수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반격의 기회를 쟁취하기 위해 나선 것이지, 허망하게 포화의 잿더미에 휩쓸리고 싶어서 나선 게 절대 아니었으니까.

“미친 것들아, 뭘 하는 거냐! 어떻게든 막지 않고!”

“여기서 물러서면 우리는 전부 끝이란 말이다! 뚫어! 어떻게든!”

하지만 화이트 드래곤의 수뇌들은 어떻게든 아난타를 막아서고자 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번 공격 기회를 놓쳐서는 두 번 다시는 재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외뿔부족 마을의 상황이 아르티야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들이 지원군을 보내서는 모든 게 끝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아난타를 제거하거나, 그들이 생포해야만 했다.

다행히 스캔 능력이 있는 랭커 몇몇은 아난타가 겉보기와 다르게 품고 있는 마력이 한없이 낮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녀를 잡기 위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으니.

화이트 드래곤과의 전쟁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 *

“이런……!”

왈츠는 판트와 부딪치다 말고, 주변 상황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가 아무리 외뿔부족에 대해 개인적으로 원한을 갖고 있다고 해도, 전황을 판단할 줄 모르는 머저리는 절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르티야와 환상연대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벌써 기백 번도 더 허물어지고도 남았겠지.

그녀는 어머니 여름여왕으로부터 배운 바대로, 모든 것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편이었고.

이미 외뿔부족에 대한 습격은 결국 실패로 끝날 거란 판단을 내린 지 오래였다.

그래도 참여하게 된 것은 이런 혼전 속에서 아난타와 세샤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으니.

혈뢰를 사용한 판트를 만나 접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빠른 퇴각을 결정하지 않은 것도, 우선 그의 발만 붙잡고 있는다면 충분히 작전을 성공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난타가 잠에서 깨어날 줄이야!

거기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하늘 날개와 빛의 파도까지 뿌려 대고 있었다.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은지, 안색이 창백하고 기식이 엄엄하다는 것은 느껴졌으나 저대로 있다간 제압하기가 힘든 판국이니.

문제는 왈츠, 자신이 직접 무력 행사에 나서려 해도.

우르르, 콰쾅!

판트가 그녀의 생각을 비웃듯이 혈뢰를 미친 것처럼 퍼붓고 있다는 점이었다.

혈뢰벽세(血雷劈勢). 닿는 것을 모두 쪼개고 부숴 버린다는 혈뢰의 절기가 뺨 위를 할퀴려 했다.

순간, 왈츠의 몸뚱이 주변으로 강기로 이뤄진 꽃잎이 풍성하게 피어오르더니, 연분홍빛 잔상을 수도 없이 그려 냈다.

연대구품(連帶九品). 아홉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잔상과 분신을 만들어 낸다는 보법이 전개되면서 혈뢰벽세를 피하는 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지만.

혈뢰의 위력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면에 작렬하고도 사방팔방으로 촤르르 퍼져 나가면서 연쇄 폭발을 일으킨다는 것에 있기 때문에 아홉 개의 분신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매캐한 연개와 검은 재가 흩날리는 가운데, 판트가 마치 뿔난 황소처럼 와락 달려들면서 그녀의 가녀린 몸을 강제로 끌어안았다.

“흡!”

왈츠는 아차 싶은 마음에 헛바람을 들이켜면서 어떻게든 판트를 떨어뜨리고자 했다. 완력 싸움으로 들어가 버리면 자신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장심(掌心)에 강기를 강제로 끌어모아 판트의 등을 수도 없이 두들겼지만.

쾅!

“컥!”

판트는 자칫 척추가 부서질 수도 있는 공격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왈츠를 끌어안은 상태 그대로 달려가다 근방에 있던 아름드리나무에 충돌했다.

부족 내에서도 수백 년을 넘게 살아 신목으로 분류되던 나무가 너무나 쉽게 부러지면서 뒤로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왈츠는 순간 호흡이 흐트러져 겨우 모았던 기운이 풀리고 말았다.

판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왈츠의 허리와 갈비뼈를 완전히 묵사발 내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양팔에 힘을 잔뜩 주었다. 이때만큼은 혈뢰를 운용할 새도 전혀 없었다.

콰직. 콰지직. 왈츠는 체내에서 무언가가 잔뜩 부서지고 박살 나는 섬뜩한 느낌과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더 끔찍한 것은 비명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성대가 끊어진 건지, 폐부가 잔뜩 조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소리를 지를 수 없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고 말았다.

그러다 의식까지 살짝 흐릿해지려는데.

‘안…… 돼!’

왈츠는 이를 악물었다. 그걸로도 안 되자, 혀 뒤쪽을 거세게 깨물었다. 혀가 짓이겨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프고 울컥 솟은 비릿한 피 냄새가 입가를 맴돌았지만,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었다.

‘내가……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얼마나 악다물었던지, 어금니까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엄마! 아빠!’

왈츠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더럽다며 다가오지 않던 빈민촌에서 어렵게 자신을 키우셨던 부모님의 모습이 하나하나씩 차례로 떠오르고.

그분들을 제대로 된 무덤도 없이 묻은 뒤, 자신을 뒤쫓는 외뿔 부족을 피해 달아나야 했던 나날들이 보였다.

그때의 복수를 조금이라도 이루지 못한 이때.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었다.

아니, 다른 것을 떠나서라도.

어머니 여름여왕의 유지는 조금이라도 이뤄 내야만 했다.

언젠가 그분의 뜻이 자신에게 남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었다지만.

그래도 그분은 자신에게 있어 새로운 생명을 주신 감사한 분.

그런 생명을 덧없이 이런 곳에서 버린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왈츠는 거의 짓이기다시피 해 이제 형체도 제대로 남아 있을지 궁금한 마나 서클과 단전을 억지로 쥐어짰다.

멀쩡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 줌만.

단 한 줌의 마력만 있다면……!

그 순간.

번쩍!

왈츠의 눈가로 시퍼런 안광이 창살처럼 치솟았다.

회광반조(廻光返照).

촛불이 사그라지기 전에 한 차례 크게 일어나는 것처럼, 왈츠는 한 줌 남은 마력에다 자신의 생명력을 전부 쏟아붓다시피 하면서 마력을 최대로 증폭시켰다.

당연히 내공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니.

왈츠는 그나마 괜찮았던 육체의 다른 부위도 망가지는 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강제로 자신을 옥죄고 있던 판트의 구속을 풀어 내고자 했다.

쿠쿠쿠-!

두 사람이 벌이는 힘겨루기가 강맹한 마력장을 형성하면서 튀어 올라 격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승세는 왈츠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애당초 무공 격차가 왈츠 쪽이 조금이나마 우세했던 상황 속에서 생명력인 선천지기를 소모하 기로 마음먹은 이상, 판트가 그녀를 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년이!”

판트는 그것이 짜증 났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왈츠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면서 그에게로 일장을 내질렀다.

이 방해꾼을 어떻게든 눈앞에서 치워야만 아난타와 세샤를 데려갈 수 있을 테니까. 치료는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번 회광반조로 인해 이제 수명은 끽해야 1, 2년 정도밖에 남지 않을 테지만…… 그만한 시간이라면 남은 복수를 전부 마치기에 충분했다.

십단금(十段錦). 외뿔부족 내에서도 압도적인 파괴력을 자랑한 나머지 시전자도 위기로 몰아넣는다는 무공이었지만, 이미 회광반조까지 일으킨 마당에 왈츠가 마다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의 유지를……!’

그때까지 왈츠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어떻게든 여름여왕의 복수를 해내고야 말겠단 일념이었다.

퍼어어엉!

결국 판트가 피를 잔뜩 토하면서 튕겨나 바닥을 한참 동안 뒹굴고 말았고.

왈츠는 쏜살처럼 세샤가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그것을 눈치챈 아난타가 재빨리 하늘 날개를 움직여 왈츠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년부터 잡아가야겠어.”

“꺼져, 미친년아!”

두 사람의 공세가 교차하려던 바로 그때.

콰르르릉!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시커먼 어둠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왈츠는 그게 명백하게 자신을 노린 공격이란 것을 깨닫고, 다시 몸을 뒤로 내빼야만 했다. 원래대로라면 시간이 촉박한 이때, 어떻게든 공격을 옆으로 쳐 내야만 했지만. 언뜻 감지되는 힘이 너무 강맹했던 것이다.

쿠쿠쿠!

아니나 다를까. 왈츠가 예감했던 대로, 검은 어둠은 지상에 작렬하자마자 닿는 것을 전부 녹여 버렸다. 얼마나 깊게 들어갔는지, 그녀가 있던 자리로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이 생겨날 정도였다.

보기만 해도 섬뜩할 광경이라, 왈츠의 시선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아난타도 황급히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은 볼 수 있었다.

본 드래곤 위에 올라탄 연우를.

『형!』

“……!”

순간, 아난타는 차정우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전혀 상반된 연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차정우의 말을 듣고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부턴가 잠결에 세샤로부터 계속 들었던 존재였으니까.

자신과 딸을 구해 준. 그리고 차정우를 되찾아 준 고마운 존재.

이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반면에.

왈츠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연우가 올라 서 있는 본 드래곤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여름여왕.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해가 아닌가!

눈을 감으시고 나서도 편하게 영면에 들지 못하는 저분의 처지가 안타깝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저런 악독한 짓을 저지른 연우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팔짱을 끼고 있던 그대로 본 드래곤에서 떨어졌다.

“영역 선포.”

그러자 지면을 타고 그림자가 넓게 퍼지면서 망자 군단이 하나 둘씩 몸을 일으켰다.

[영역 ‘비나’가 선포되었습니다!]

디스 플루토는 아테나 등과 함께 올림포스로, 망자 거인은 타르타로스의 복구에 동원되어 이곳에 있는 건 대다수 부-파우스트가 만들어 낸 언데드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전력을 자랑하는 터라, 화이트 드래곤은 삽시간에 혼란에 잠기고 말았다.

가뜩이나 아난타가 뿌려 대던 빛의 파도로 인해 피해가 컸던 그들은 더 강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림자에서 뻗쳐 나온 넝쿨이 그들의 발목이며 사지를 묶어 대는 통에 어떻게 떨쳐 내기도 힘들었다. 그림자는 늪처럼 너무 질퍽이는 데다가, 그들의 몸을 안쪽으로 빨아들이기까지 했다.

“제, 젠장!”

“아악! 마법이! 마법이 가동되질 않아!”

거기다 허공에 맺힌 부-파우스트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그들을 직시하면서 광역에 걸쳐 대규모 결계까지 구축했으니.

그 안에 갇혀 있는 이상, 화이트 드래곤은 외부로의 탈출이 일절 불가능했다. 마법을 구사하려 해도 발동되는 족족 캔슬되고 마니, 패닉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탑의 지식뿐만 아니라, 에메랄드 타블렛까지 흡수한 부-파우스트의 마법적 능력은 일개 플레이어들이 짐작하기 힘들 만큼 높은 경지에 다다라 있었으니.

이미 그들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왈츠는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연우가 직접 몸을 드러낸 순간부터 이미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인정하지 않으며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보려는데.

쐐애액-

갑자기 본 드래곤이 갑자기 날개 뼈를 크게 휘젓더니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활강을 시도했다.

왈츠는 본 드래곤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마력을 주먹으로 끌어모으려는데, 별안간 본 드래곤이 빛에 휩싸이더니 폴리모프를 시도했다.

그러고 드러난 얼굴에 왈츠는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존재가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까.

“어…… 머니?”

왈츠는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굴었지만.

여름여왕은 적발을 길게 흩뜨리면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왈츠에게로 손길을 뻗쳤다. 화염 계통 마법 중 최고를 자랑한다는 헬파이어가 왈츠에게로 우수수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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