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무왕(武王) (7)
탁!
“왔나?”
갈리어드는 상당히 지친 기색으로 지상에 천천히 착지하는 연우를 보면서 물었다.
기습을 벌인 적들을 감당해야 했던 터라, 전신에 자잘한 생채기가 수도 없이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자칫 세샤를 위험으로 빠뜨릴 뻔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안색도 그리 좋질 않았다.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리어드는 자책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보다시피 전황은 그리 좋질 못했다네. 다행히 자네가 오면서 많이 편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면목이 없으이.”
“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잠시만 쉬십시오.”
연우는 갈리어드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좌중을 둘러봤다. 하지만 그도 평상시보다 얼굴이 훨씬 굳어 있었으니.
여태껏 탑에서 머물면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어 봤다지만, 지금만큼 화가 난 경우는 단연코 없었다.
이곳은 탑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추억만 가득 묻어 있는 장소였다.
주로 두들겨 맞은 기억밖에 없고, 인성 운운하면서 투덜거렸어도 스승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고.
몸이 좋지 않은 아난타와 세샤를 가족처럼 받아들여 주기도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제는 지구에도 남지 않은 ‘집’이나 다름없던 것이다.
그런데 이딴 꼴이 될 줄이야.
맨 처음.
연우는 도일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이번 일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내용을 전부 들었을 때에는 절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여태껏 잠적했던 놈들의 행동이 전부 감지되었어요. 그런데 하나같이 움직이는 게 심상치 않아요. 망자의 함이나 다우드 형제단, 화이트 드래곤까지…… 너무 유기적으로 움직여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외뿔부족 내부에도 선이 닿아 있는 것 같아요.
외뿔부족에 내통자가 있다는 것.
그것은 절대 우습게 볼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더군다나 도일에 이어 즉각 다른 곳에서도 연락이 왔다.
아테나였다.
-숙부님, 아무래도 아스가르드의 움직임이 심상찮아요. 천계 내에서 모든 연락 체계를 단절시키고, 사회를 폐쇄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돌고 있어요. 일단 확인 중에 있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세요.
페이스리스에 이어 아스가르드까지 움직인다?
이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전혀 접점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연우는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만약 그 예감이 맞는다면, 절대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무왕을 암살하겠다는 저들의 계획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치밀한 준비가 되어 있단 뜻일 테니.
결국 도일은 라퓨타를 움직여 탑 외 지역으로 가겠노라고 의사를 밝혔다. 이미 만전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으니, 연우의 허락만 떨어지면 즉각 움직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니. 아르티야는 뒤로 빠진다. 대신에 따로 할 게 있어.
연우는 불현듯 드는 생각이 있어 아르티야에 출격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도일은 명석한 머리를 지닌 사도답게, 단번에 연우에게 다른 노림수가 있다는 것을 간파 할 수 있었다.
뒤통수.
-무엇을 할까요?
-넌…….
아마 지금쯤 도일과 아르티야는 그가 따로 지시한 것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을 터였다.
아테나도 마찬가지.
우선 천계의 전체적인 동향을 살펴볼 것이며, 만약 아스가르드에서 수상쩍은 기류가 감지된다면 즉각 병력을 출병시켜도 좋다는 허락까지 내린 상태였다. 동맹군의 세력들에게서도 여차하면 도와주겠다는 확답을 받아 두었다.
그래서는 여태 연우의 농간질로 인해 이미 파편화되었던 천계 내 정세에 극도의 긴장감을 가져다 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고려할 때가 아니었다.
여하튼.
하계와 천계가 모두 연우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이때.
연우는 직접 외뿔부족 마을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영역을 선포, 소환한 망자 군단을 움직여 적들을 대거 쓸어 내기 시작했다.
이미 기어 다니는 혼돈이나 대지모신 등, 여러 대신격들과도 전투를 치렀던 군단이 아닌가. 아무리 화이트 드래곤의 수준이 높다 하여도 하계의 기준일 뿐이지, 그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 놈도 빠지지 말고 전부 먹어 치워.”
망자 군단은 연우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화이트 드래곤의 플레이어들을 빠르게 처치하고, 거기서 삐져나온 영혼들을 잡아먹는 등 지상에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을 조성해 냈다.
그러다 연우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브라함은 왜 보이질 않는 거지?’
분명히 세샤 등이 위기에 빠졌으니 어떻게든 알아채고 올 법한데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페어링을 확인해 봐도 미약하게만 감지되고 있을 뿐,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메시지 전달도 되질 않았다. 이전에 느꼈던 그대로였다.
‘시의 바다 쪽도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더니, 그 때문인가?’
연우는 자신이 올림포스를 탈환하는 동안, 빠르게 돌아간 세태를 어떻게든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었다. 지금은 적들의 꿍꿍이부터 빨리 파악하고 처리해야만 했다.
『형.』
그때, 차정우의 사념체가 연우를 불렀다.
“너……!”
연우는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굳히면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며 타박하려 했다. 자신이 알기로 동생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기에 위태로운 상태일 테니까.
계속 무리를 하다가는 존재가 소멸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는 나중에 동생의 영혼을 되찾더라도, 옛 기억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연우는 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차정우의 사념체가 어디에 빙의되어 있는지를 뒤늦게 깨닫고 말았으니까.
아난타가 정신을 차린 채로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샤는 그녀의 품에 꼭 안겨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그리고.
『너, 정우냐……?』
크로노스가 어느새 차정우의 앞에 떨리는 목소리로 나타났으니.
차정우의 사념체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아버지?』
『정말, 정말로 정우구나. 너……!』
『아버지가 어떻게 이곳에……? 아니, 그보다 지금 모습이 왜 그러신 거예요?』
크로노스를 여전히 지구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으로만 알고 있는 차정우로서는, 그가 자신과 비슷한 영체의 형태를 띠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형과 아버지가 나란히 있는 조합이라니, 더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크로노스는 감격에 젖은 나머지 막내아들의 그런 의문에 대답해 주지 못하고, 그를 그저 꽉 끌어안기만 했다.
차정우의 사념체도 처음에는얼떨떨해다가, 곧 크로노스를 마주 끌어안았다.
아들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탑으로 뛰어들어 봉변을 당하고, 겨우겨우 헤쳐 나온 끝에야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크로노스와.
가족들을 다시 한데 모아 행복하던 시절로 되돌아가고팠던 차정우.
두 부자지간의 상봉은 연우로서도 가슴이 미어질 수밖에 없었다.
둘의 진실된 마음과 지금껏 숨겨 온 행적을 모두 알고 있는 건 그밖에 없었으니까.
다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정우야, 인사는 나중에 마저 하자. 자세한 건 가면서 설명해 줄 테니까.”
『알았어. 내가 뭐 도울 게 있을까?』
차정우의 사념체는 크로노스의 품에서 나와서 진지한 얼굴로 연우를 돌아봤다.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가진 태엽.”
『태엽?』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이 되었지만, 아난타가 먼저 연우의 말뜻을 눈치채고 목에 걸려 있던 회중시계를 풀어 연우에게로 내밀었다.
“이게 필요하신 거죠, 아주버님?”
연우는 난생처음 듣는 호칭에 잠시 움찔했지만, 곧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회중시계를 받았다.
째깍. 째깍.
여전히 시침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속에 담긴 시간의 태엽만 되찾는다면, 크로노스의 완연한 부활도 가능하리라. 그리고 그의 업과 신화를 계승한 연우도 신왕좌를 완전히 갖출 수 있을 테고.
“감사합니다.”
“이 사람, 잘 부탁해요.”
아난타는 어느새 연우와 크로노스 옆에 선 차정우의 사념체를 보면서 엷은 미소를 뗬다.
기억 속의 차정우는 언제나 마지막에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었건만. 지금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절로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은 곧 자신에게도 또 다른 행복이 되기 마련이니.
“아빠, 삼촌, 파이팅!”
『그래. 금방 다녀올게. 그동안 엄마 말 잘 듣고 있으렴.』
차정우는 자세를 숙여 세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나 애교 많고 귀여운 딸이라니. 자신은 참 복 받은 놈이다 싶었다.
크로노스는 그런 막내아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기대감에 잔뜩 젖은 얼굴로 뒤따라 세샤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는 없느냐?』
“아저씨는 누구세요?”
하지만 세샤는 크로노스를 처음 보는 것이기에 낯을 가릴 수밖에 없었고.
크로노스는 제 어미의 뒤로 쏙 숨어 버린 세샤를 보면서 절망에 빠진 얼굴이 되고 말았다.
연우는 그런 크로노스를 무시하고, 강제로 비그리드로 되돌리면서 그를 붙잡고 마을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화이트 드래곤에 대한 정리는 아직 덜 끝났다지만.
이곳의 마무리는 여름여왕과 부-파우스트에 맡기면 충분할 듯 싶었다.
* * *
『……손녀딸에게 외간 남정네 취급이라니. 아저씨라니, 내가 아저씨라니!』
연우는 달리는 내내 여전히 절망에 빠진 채로 중얼대는 크로노스의 혼잣말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그냥 무시하고, 의문점에 대해서 물었다.
“아버지, 태엽을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은 뭡니까?”
비그리드에 있는 죽음의 태엽은 복원하기가 쉬웠다.
연우 역시 죽음의 신위를 가지고 있으니, 서로 연동시켜서 기능만 복구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의 태엽은 달랐다.
그건 연우와 전혀 무관한 신위. 당연히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회중시계에서 시간의 태엽을 강제로 추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동생의 사념체가 위험해질 테니까.
전혀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인데.
『나도 몰라.』
“그게 무슨……!”
『정말이다. 내가 그런 상황에서 설마 뒷일을 예상하고 방법까지 고려했었을까? 내가 본 미래는 네가 탑에 들어온 것. 딱 거기까지였다.』
“……!”
연우는 인상을 굳히다, 곧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신에게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면 방법을 어떻게든 강구해 봤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아무래도 어떻게든 임기응변으로 해결책을 모색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차정우의 사념체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다시 회중시계로 돌아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테지. 여태 그도 몰랐던 사실들이 전부 하나같이 충격적이었기에 상황을 납득하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싶었다.
그사이. 연우는 왕좌 결투를 벌이던 마을의 중앙에 도착할 수 있었고.
“반역자들을 전부 추포해! 저 결계를 해제할 방법을 실토할 때까지 절대 용서치 마라!”
“대장로, 말하지 않았나! 정말 우리는 이 일과는 무관하다고!”
두 패로 나뉘어 혼란을 겪고 있는 외뿔부족을 맞닥뜨릴 수 있었다.
백선가를 비롯한 여러 가문과 씨족들은 자신들을 에워싼 동족들을 보면서 억울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대장로를 비롯한 대다수의 부족원들은 그들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으니. 당장이라도 그들을 찢어 죽일 듯이 보며 흉흉한 살기까지 드러낼 정도였다.
그 어디에서도 유쾌하고 긍정적인 면모를 보이던 외뿔부족의 평상시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그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살벌한 분위기만 감돌 뿐.
그러다 보니 궁지에 내몰린 백선가 등도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고 여겼는지 날을 바짝 세우기 시작했다. 당연히 대장로 등은 그걸 반역의 뜻으로 받아들여 더더욱 강한 압박을 가했으니.
연우는 어쩌면 이런 분위기마저 적들이 노렸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바로 그때.
연우의 용신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지원조는? 지원조는 대체 어떻게 되고 있는 겁니까! 나와 우리 가문을 구해 주겠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추후에 제 자리를 되찾게 해 주겠다고 했……!』
『기다리도록. 이쪽이 더 급하다.』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씀이십니까! 카인, 그 빌어먹을 놈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기다려라. 하이에나.』
『하지만……!』
『이만 끊지.』
백선가 등에게서 화이트 드래곤 쪽으로 연결되는 아주 희미한 붉은 선이.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선이었다.
특히 마법을 도외시하고 무공만을 단련한 외뿔부족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선, 페어링 라인(Pairing Line).
누군가가 외부로 소식을 전달하고 있다는 뜻.
그 순간.
[플레이어 ###의 기세가 외뿔부족의 마을을 뒤덮습니다!]
“……!”
“……!”
“……!”
대장로와 백선가주를 비롯한 부족원들 모두가 으르렁거리다 말고, 갑자기 사위를 압도하는 폭풍 같은 기세에 놀라며 연우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연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페어링 라인을 발신하고 있던 녀석이 위로 둥실 떠올랐다.
백선가의 왕위 후계자, 장이었다.
“어? 어어어! 조, 조부님!”
“장아! 너 대체 무엇을……!”
백선가주는 자신의 외손자가 연우에게로 빨려 들어가자 경악했지만, 그때는 이미 녀석의 목이 연우의 손아귀에 붙들린 뒤였다.
“잡았군. 쥐새끼.”
연우가 흉흉하게 눈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