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무왕(武王) (8)
“사, 살려…… 줘……!”
연우가 발산하는 살기를 몽땅 뒤집어쓰게 된 장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한때, 판트도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던 녀석이었지만.
연우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판트 남매에게도 차차 뒤처지면서 위신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다 결국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에까지 대고 말았으니.
‘마기.’
연우는 눈 밑이 퀭한 녀석에게서 미약하게 풍기는 기운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기는 사실상 따지자면 플레이어들에게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사용하기에 따라 힘과 쾌락을 가져다주지만, 차차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 끝내 마인(魔人)으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장은 그런 마인이 되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손발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중독 증세를 보이면서도, 혼탁하기만 한 저질의 마기를 흘려 대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급이 낮아도 마기는 마기라는 것인지, 연우의 손을 어떻게든 밀어내려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는 연우가 품은 마력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백선가나 다른 부족원들이 장의 이런 상태를 여태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럴 리가.’
마기가 거의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부족원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다는 예민한 감각까지 속일 수는 없을 터였다.
“놈! 내 아이에게서 더러운 손을 썩 떼지 못할까!”
그때, 백선가주가 눈이 회까닥 뒤집어진 채로 지면을 거세게 박차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그것을 본 순간, 연우는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속이고 있었군.’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아낀다더니, 딱 그 꼴이 아닌가.
외뿔부족은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이나 뛰어나다. 그렇기에 마법이나 주술 같은 이질적인 기운을 멸시하고, 그것을 익히는 것에 대단히 부정적인 의사를 보인다.
그러니 부족장의 아들인 장이 마기를 익혔다면, 당연히 문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겠지만…… 여태 알려지지 않은 건 가문에서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는 뜻밖에는 되지 않았다.
챙!
백선가주는 그래도 손꼽히는 가문의 수장답게 하이 랭커급의 힘을 자랑했지만, 연우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그림자에서부터 불쑥 올라온 샤논의 칼에 가로막혀야만 했다.
「이봐, 영감. 감히 우리 인성왕께 대들다니,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나 봐, 응?」
“닥쳐라! 당장 내 새끼를 내놓지 못할까!”
「그러게 누가 통수를 치랬나? 너네가 잘못한 거면서 왜 이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꺼져라!”
백선가주는 자신을 가로막은 샤논을 어떻게든 옆으로 쳐 내려 했지만, 이미 샤논은 ‘정복’이라는 신위를 얻었던 만큼, 필멸자로서는 그를 당해 내기가 어려운바.
백선가주는 샤논과 자신의 차이를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외손주를 구해 내겠다는 일념만으로 이를 악물면서 무공을 있는 대로 퍼부었다.
「통수를 치려면 이렇게 어설프게 할 게 아니라, 우리 인성왕이 하듯이 완벽하게 쳐야지. 그러니까 너네가 아마추어인 거라고!」
채채채챙!
샤논은 피식 웃으면서 백선가주의 공세를 빠르게 흘리면서 소드 브레이커를 여러 방향으로 돌렸다. 경지가 오르면서 무술 실력도 향상된 그는 외뿔부족과 이렇게 검술을 겨루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눈치였다. 정작 외손주를 구하지 못하게 된 백선가주로서는 복장이 뒤집힐 일이었지만.
“가주님!”
“당장 그 손을 치우지 못할까!”
결국 이를 보다 못한 백선가와 동맹 가문의 부족원들이 나서려 했지만.
콰르르릉-
촤아악!
그들은 그쪽으로 이동하기도 전에 하늘에서부터 쏟아진 핏빛 벼락에 발걸음을 강제로 멈춰야만 했다.
벼락이 쏟아진 자리. 대장로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들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단 한 놈도 발 떼지 마라. 지금부터 명을 거역하는 놈들은 반역자로 취급할 것이니.”
파직, 파지직!
대장로의 몸뚱이 위로 튀어 오르는 붉은 뇌기는 판트가 평상시에 보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뜨거웠다.
그냥 닿는 것만으로도 바스러질 것처럼 흉포해서 감히 거스를 엄두가 나지 않는 살벌한 투기를 자랑했지만.
“하지……!”
콰르르릉!
백선가를 어떻게든 지켜야만 하는 가솔들은 이에 반발하려다, 갑자기 날아든 핏빛 벼락에 그대로 휩쓸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부족원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잔뜩 퍼졌다.
보통 여러 씨족과 가문을 총괄하는 족법(族法)에서는 같은 부족원에 대한 처벌에 대해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웬만해서는 구금이나 징계, 정도가 강해 봤자 추방이 대부분이었다.
소수 아인종인 그들의 개체 수가 워낙에 적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었고, 같은 동족끼리의 유대를 중요시하는 문화도 있었기에 사형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대장로는 그런 족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를 보였다.
이런 것이 통용되는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반역.
부족의 유대를 망가뜨리고, 공동체의 질서를 흩뜨리려는 이들로 규정한 것이다.
무왕이야 타고난 성정이 그런 만큼 제멋대로 굴어도 그러려니 하고 여긴다지만, 대장로는 족법에 충실하고 특정 가문과 씨족에 대해 편애를 보이지 않으려 하는 편이었다.
탕평(蕩平)에 능하여 공정하다고 평가받는 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백선가 등도 왕좌 결투를 꾸밀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무왕의 권위가 제아무리 무소불위라 하더라도, 평상시 그를 붙들어 놓는 대장로의 성정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니까.
때로는 너무 유약하고 꼬장꼬장한 게 아니냐는 뒷말도 나올 정도였지만.
대장로의 지금과 같은 단호한 모습은 부족원들을 충격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하지 말란 말, 못 들었나? 아니면 이 늙은이가 요새 들어 얌전하게 지냈더니 만만하게라도 보이는 건가?”
“……!”
“……!”
“……!”
그제야 부족원들은 공명정대한 대장로의 옛 별칭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핏빛 현자.
문(文)을 사랑하는 학자풍의 인상이라지만, 실상 한번 손을 쓰면 반드시 그곳에 피바다를 일으키기에 붙은 별칭이 아니던가.
지금이야 거의 잊히다시피 한 이전 세대의 이야기였지만. 장로들이며 가주들은 그런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기에 더더욱 대장로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얼마나 화가 단단히 났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사이.
“한령.”
연우 옆으로 그림자가 열리면서 한령이 나타나 부복했다.
「하명하십시오.」
“뚫어.”
한령은 지체 없이 아홉 자루의 칼 중 가장 큰 대도(大刀)를 뽑아 그대로 휘둘렀다.
신력과 마력이 단단히 압축된 참격이 그대로 무왕이 갇혀 있을 심상 결계를 두들겼지만,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한령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침음을 흘리고는 연이어 여러 차례 참격을 날렸지만 그래도 결계는 꿈쩍도 않았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령은 자존심이 잔뜩 상한 듯 악다문 소리를 냈다. 그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일격이 검뢰에 비견할 만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적들의 준비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연우는 아스가르드의 개입에 더 큰 신빙성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차가운 눈으로, 여전히 아등바등하고 있는 장을 노려보며 물었다.
“저 결계, 어떻게 여는 거지?”
“네가 이런 짓을 하고 무사할……!”
“묻는 거에나 대답하는 게 좋을 텐데? 대답해. 들어갈 방법은?”
“말을 할 것 같으냐! 이것부터 놓……!”
“안 되겠군.”
“뭐?”
우두둑!
장은 자신만만해하다 말고, 갑자기 머리가 그대로 뒤로 돌아가고 말았다.
“장아아아아!”
백선가주의 애타는 절규가 울려퍼지고.
“사자 소환.”
연우는 시체를 바닥에다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면서 권능을 발동시켰다. 칠흑왕의 형틀이 거세게 떨렸다.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장!”
휘휘휘!
「아악! 날! 날 죽였어……!」
장은 충격에 젖은 얼굴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만큼 죽음이 가져다준 충격이 크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연옥로의 불길을 끌어 올리면서 녀석의 영혼을 그 속에다 가둬 버렸다.
그리고.
끼아아!
귀곡성이 음산하게 퍼졌다.
* * *
연우는 연옥로의 불길 속에다 장의 영혼을 가두고 심문을 가했다.
대지모신을 삼킨 전적이 있던 비에라 듄도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절규를 내뱉던 불길이 아닌가. 당연히 마기에 단단히 중독된 장 따위가 감당할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결국 장의 영혼은 연우를 비롯해 여러 부족원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모든 죄를 낱낱이 고백했고.
“그러니까 넌 ‘하이에나’라는 이름으로 여태 일족의 모든 정보를 페이스리스 등에게 빼돌렸다, 이 말인가? 이번 계획도 직접 참여했고?”
「그, 그래! 이제 전부 다 말했으니까, 제발, 제발 그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야, 약속과는 다르잖아! 전부 실토하면 편하게 해……!」
장의 영혼은 비명을 지르는 그 대로 연옥로에 갇힌 채 사라지고 말았다.
“…….”
“…….”
“…….”
대장로 측도, 백선가 측도, 전부 침묵에 잠겼다.
그만큼 장이 실토한 사실들은 전부 충격적이었으니까.
장은 차차기 왕이 되기 위해 이 모든 끔찍한 일들을 계획하고 참여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무왕에 대한 암살이 끝나면 페이스리스가 왕좌에 앉게 될 것이고, 그 뒤를 자신이 잇기로 약조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빚어진 일족의 혼란은 고의로 유도한 것으로, 이를 수습하는 와중에 정적(政敵)이 될 소지가 있는 이들을 내치고, 아군들을 주요 요직에 앉힐 계획이었으니.
사실상 반역이나 다름없는 짓거리들이었다.
특히 백선가주는 망연자실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소중한 외손주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가문이 그동안 이룬 모든 것들이 단숨에 한 줌의 모래처럼 손에서 흘러 나가 버리고 말았으니.
“전부 포박해서 압송하라. 저항하는 자는 즉결 처분해도 좋다. 반역자들에 대한 판결은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처리할 것이다.”
대장로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고, 부족원들을 지휘하여 죄인들을 전부 한 곳에 가두게 했다. 이들에 대한 처벌을 끝마치려면 상당한 수고와 기일을 필요로 할 듯 싶었다.
그리고 장에게서 심상 결계를 통과하는 법도 알아낸 연우는 빠르게 그쪽으로 움직였다.
무왕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알고 있는 이상, 그가 쉽사리 당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방금 전부터 계속 암귀(暗鬼)처럼 커져 가는 불안감이 자꾸만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이전에는 이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자꾸 조바심이 드는 것인지. 그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한령. 에도라가 아까 전부터 보이질 않으니 조용히 찾아봐.’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기척을 감지할 수 없는 에도라에 대한 불안감도 있어, 따로 한령에게 뒤를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에게 마기를 제공한 곳도 수상쩍고.’
아스가르드에 이어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제3세력이 나타난 셈이었지만.
연우는 우선 무왕부터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결계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안타깝지만, 결계를 부수거나 여는 방법은 장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따로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은 있었던 건지, 최소한의 인력이 들어갈 수 있게 설정된 좌표가 있었다.
쐐애액-
비그리드가 연우의 생각을 읽고 그대로 손에 잡혔다. 그리고 저절로 합일(合一)이 일어나면서 의식 세계가 무한하게 확장되었다.
[죽음의 태엽이 작동합니다!]
촤아악!
연우는 비그리드를 거칠게 휘둘러 공허를 열어젖혔다. 심상 결계 안쪽으로 통하는 우회로가 형성되자, 곧장 그 너머로 발을 들이려는데.
『조심하게. 이런 일을 꾸몄을 정도라면, 분명히 뭔가 단단히 준비를 했다는 뜻일 테니까. 그리고.』
대장로의 어기전성이 귓가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연우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것을 삭이는 듯한 뉘앙스였다.
『……아닐세. 하여간 꼭 그 빌어먹을 놈을 데려와 주게. 꼭.』
하지만 대장로는 끝끝내 삭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그 속에 가득 담긴 걱정을 느낄 수 있었기에.
연우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 결계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지독한 탄내가 코끝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