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16화 (616/862)

16화. 무왕(武王) (10)

녹턴이 가진 기억은 어느 한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고 있었다.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채,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는 사람.

머지않아 자신이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모습이었다.

-어? 일어났냐?

무왕은 녹턴의 기척을 느꼈던지, 깊은 상념에서 깨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여긴……?

-탑 외 지역. 외뿔부족이 머무는 마을이다.

-고……!

녹턴은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말고, 순간 두개골을 찌릿하게 울리는 고통에 인상을 팍 찡그리고 말았다.

깨질 것 같은 두통.

귓가를 스치는 이명.

시야까지 잔뜩 일그러져 노이즈가 드문드문 낄 정도였다.

이게 대체 뭔가 싶어 머리를 꾹꾹 누르다, 그는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 기억들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누군가?

나는 대체 어디서 왔는가?

이름은…… 무엇이었지?

찰나의 순간 동안, 머릿속으로 수많은 의념들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이 여러 실타래로 엮여 배배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뜨거워져 열마저 날 것 같았다.

-무리하지 말고. 이거, 하아! 대체 뭐라고 해야 되나.

무왕은 그런 녹턴을 잘 달래고 난 뒤, 난감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물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널 데려왔다만. 기억은 있냐?

녹턴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마치 길 잃은 새끼 고양이라도 주워 데려온 듯한 말투.

녹턴은 무왕의 그런 반응을 보고 속으로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나중에 그것이 원래 그의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에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여간 기억이 없다고? 그럼 당분간 여기서 머물다 가라. 떠오르고 난 뒤에 떠나도 되겠지.

-감…… 사합니다.

* * *

-녹턴? 왜 하필 그런 이름이야? 멋대가리 없게.

녹턴이 병석을 털고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스스로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었다.

-이름은 이 스승님이 얼마든지 멋있는 걸로 지어 줄 수 있는데 말이지. ‘우르릉’이라든가, ‘콰르릉’이라든가. 어때?

-……스승님께 자제분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분들의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판트, 에도라, 장…… 뭐, 그런데. 왜?

-저 골리려고 그러신 겁니까, 아니면 네이밍 센스가 원래 처음부터 그따위이신 겁니까?

-당연히 너 골리려고 그러는 거지. 근데 이놈 보게. 스승에 대한 예의를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호래자식일세.

-아직 정식으로 모시겠다고 말씀드린 적도 없습니다만.

무왕은 녹턴의 자질을 이리저리 점검한 뒤, 꽤나 마음에 든다면서 두 번째 제자가 되지 않겠냐 제안을 했었다.

기억이 되돌아오기 전까지 한동안 마을에 머물기로 한 녹턴으로서는 사실 나쁠 것이 전혀 없었다.

그가 봤을 때, 무왕은 충분히 스승으로 모셔도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실력을 가늠해 봤을 때, 도저히 깊이를 측정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다만, 조금 걸리는 점이 있다면 무왕의 저 더러운 성격인데…….

이미 다른 제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그가 대체 어떻게 저 성격 아래에서 수학(修學)을 할 수 있었는지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이미 무왕의 친동생을 꼬셔서 밖으로 나갔다는 말을 들었으니, 도망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인가.

-너, 혹시…….

-……?

-…….

-중2병이라도 걸린 거냐?

-나도 어디서 들은 병인데. 지난 기억이 없지만, 갑자기 내 손에서 흑염룡이 들끓는 것 같다든가, 갑자기 지난 전생을 확 하고 각성하는 것 같다든가. 갑자기 그런 충동 드는 거 있잖냐.

-……하아.

녹턴은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칼을 무왕에게로 냅다 휘두를까, 아주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스승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말이지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말겠지.

분명 시비를 먼저 건 사람은 무왕이었지만, 그는 절대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걸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시시비비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위신이 중요한 것이지.

전형적인 내로남불형 인간인 셈이었다.

아무리 기억이 없다고 해도, 저런 인간들을 상대할 때는 그냥 무시하는 게 속 편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 이름은 네가 짓는 거니 내가 왈가왈부할 일도 아닌 것 같고. 앞으로 그렇게 부르면 되냐?

무왕은 별 반응이 없는 녹턴을 보고 ‘에이. 이번 제자는 놀리는 맛도 없겠네’라며 투덜거리다, 그렇게 말했다.

녹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녹턴(Nocturne, 야상곡).

야상곡의 음율은 조용한 밤의 분위기를 옮긴 것처럼 서정적으로 흐른다.

그는 기억을 되찾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그런 음율을 떠올릴 수 있었기에, 이보다 지금의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디 간절히 바랐다.

잔잔한 밤이 모두 흐르고 난 뒤에는 동이 트듯이.

언젠가 이 암흑 같은 기억들이 전부 저물고, 새로운 빛이 지난 기억들을 비춰 주기를.

* * *

-하.

무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녹턴을 바라봤다.

기가 차다는 얼굴.

-떠나겠다고?

-그렇습니다.

-이유나 물어봐도 되겠냐.

-여기에 계속 있어서는 안주하기만 할 뿐, 시간 낭비밖에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스승님의 숙원을 이뤄드리지 못한 것은 송구스럽습니다만, 제게도 이것이 바로 숙원입니다.

-너 저번에 21층을 통과할 때부터 그러는 감이 보이는가 싶더니…….

무왕은 어떤 말을 더하려는 듯하다가, 가볍게 혀를 차면서 머리를 털었다.

-아니다. 사실 나도 너에게서 음검의 비밀을 얻기엔 거의 힘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

-그보다 내 허락 없이 하산을 하겠다는 요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예.

녹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뿔부족에서 사제지간의 인연은 아주 깊은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면에서는 부모 자식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때도 있었으니.

외뿔부족에게 있어 무(武)란 인생의 모든 것이며 추구하는 목표이니, 그것을 정립해 주는 스승은 부모보다 더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별다른 허락도 없이, 제자가 스승의 곁을 떠나겠다는 건 그 가르침을 저버리겠다는 뜻이기도 하니.

스승이 주는 그늘을 거부하고,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뿔’을 내놓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무왕은 녹턴이 제자가 된 이후로 가장 진지한 얼굴로.

-청람가의 제자, 녹턴.

엄숙한 말투로 선언했다.

-파문에 명한다.

-그동안.

녹턴은 목 언저리까지 치밀어 오른 ‘무언가’를 겨우 삼켰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게 울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없어 감정도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동안 가르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 * *

녹턴은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무왕과 있었던 과거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에게는 추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들.

몇 페이지 안 되는 기억의 앨범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이었다.

그 뒤로 탑을 본격적으로 오르면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수많은 인연을 맺기도 했다지만.

그 무엇도 외뿔부족의 마을에서 머물던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따금 여로가 너무 지칠 때면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만큼 마음만큼은 편안하고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이 사실은 일개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오래전에 몇 번 얼굴이 본 게 전부였던 사형이 와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 비밀을 말해 주었던 것이다.

“외뿔부족에게는 아주 오랜 과거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비원(悲願)이 한 가지 있었다는 말, 제게 하셨던 것 기억하십니까?”

하지만 녹턴은 그런 사형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혹하는 말이긴 했지만.

그만큼 옛 스승을 더 믿고 있었으므로.

“태극혜 반고검(太極慧盤古劍).”

그러나 마지막 환영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었을 때.

무왕의 눈빛이 흐트러지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시조이자, 트리니티 원더 중 일인이었던 소호 금천이 진즉에 깨달아 피를 이은 후손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정작 그 후손들은 깨닫지 못했던 비원.”

하지만 믿음이 흔들린다고 해서 마음까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

녹턴은 마음을 추스르고자, 일부러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전 이따금 생각했습니다. 스승님 같은 분이 왜 진즉에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플레이어 중에서도 올포원을 제외한다면 단연 톱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니, 올포원이 가진 그 신위와 권능만 아니라면 충분히 그마저 능가했을지 모를 스승님이 어째서 태극혜 반고검을 깨우치지 못하셨을까?”

녹턴은 사실 무왕이 이미 천계의 대신격들이 와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곳에서 아스가르드와 벌어진 싸움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입증하고 있었다. 아마 천계에 이 사실이 전해진다면 모든 이들이 경악할 테지.

아니, ‘순수한 무력’만 따진다면, 올포원도 능가할 것이라고 그는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왕이 올포원을 넘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하나.

올포원이 자리한 위치 때문이었다.

올포원(All for One).

모든 이들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별칭은 사실 그가 딛고 있는 신위와 신화를 총칭하는 것이기도 했으니.

그 신위가 있는 한, 아무리 강한 대신격이며 고대신이 온다고 해도, 결코 올포원을 ‘넘는’ 건 불가능했다.

적어도 탑의 세계, 내부에서만큼은.

무왕은 바로 그런 사실에 좌절했고.

올포원이 디딘 신위를 뛰어넘고자 절치부심 노력했다.

그리고.

그가 올포원의 말도 안 되는 신위에 맞대응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바로.

태극혜 반고검이었으니.

“그러다 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그동안 깨우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녹턴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애당초 깨우쳐도 익히는 게 ‘불가능한 체질’이었다는 것을요.”

“…….”

무왕의 동요가 처음으로 뚝 정지했다.

말 없는 침묵이 흘렀다.

녹턴의 한쪽 입술 끝이 비틀렸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소호 금천의 신위는 애당초 ‘태양’이지 않습니까?”

태극혜 반고검의 특징은 음양의 조화를 이끌어 내는 것.

하지만 소호 금천의 후예로서 태양지체(太陽之體)를 타고난 후손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익히고 싶어도, 깨우치고 싶어도, 육체의 성질이 양기에 너무 치우쳐 있었던 것이다.

타고난 무의 자질이, 도리어 시조의 숙원을 익히는 데 방해가 된 셈이었다.

결국 그가 얻을 수 있었던 건, 에도라가 단련한 〈양도(陽刀)〉뿐.

“스승님은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좌절을 하시었죠. 태극혜 반고검은 당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적, 올포원의 신위를 잘라 낼 유일한 열쇠였지만…… 그것은 절대 얻을 수 없는 보물이었으니까요.”

쿠쿠쿠-

녹턴이 조금씩 입을 벙긋거릴 때마다, 조금씩 기세가 흘러나왔다.

언젠가 무왕이 연우에게 말하길, 녹턴을 가리켜 점수를 매겼을 때 만점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하계에서 무왕과 칼을 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란 뜻이었으니.

그 평가만큼이나, 대성역도 거칠게 떨렸다.

“하지만 스승님은 결코 포기를 모르는 분일 테니,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고자 하셨겠지요. 당신이 직접 익힐 수 없다면, 제자를 직접 거두어 태극혜 반고검을 익히게 하여 거기서 보완점을 찾고, 힌트를 얻고자 하시려던 게 아니었습니까?”

“……녹턴.”

“그래서 오랜 탐색 끝에 처음으로 거뒀던 첫 번째 제자는 타고난 감각이 예민하고, 자질이 외뿔 부족에 못지않았으나! 당신의 성에 찰 정도는 아니었기에 파문에 처하였고!”

녹턴은 크게 소리를 질러 침착하게 자신을 불러오는 무왕의 목소리를 묻어 버렸다.

언제나 평온을 유지하려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격분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다른 방법을 찾고자 하였던 당신은 21층에 있는 마지막 환영에 생각이 미쳤겠지요! 그것이라면 재능도 충분하다 못해, 가증스러운 올포원의 옛 데이터를 똑같이 갖고 있을 테니, 그의 약점을 파악하기도 쉬웠을 테구요! 아닙니까?”

“…….”

21층의 마지막 환영이 없는 이유.

그것은 무왕의 사사로운 욕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니.

숙적의 환영을 층계 바깥으로 끄집어내 버린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어떻게 무왕이 탑의 시스템을 거스를 수 있었던 건지, 녹턴은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무왕에게 있어 자신은 그저 모르모트에 불과했다는 것.

어떻게든 숙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사용한 실험체. 겉으로는 사랑과 정성을 주는 척 기만을 하면서 속으로는 갖가지 실험을 일삼았던 인형이었다.

자신이 없는 기억을 어떻게든 떠올리려 할 때마다, 밤마다 알 수 없는 악몽에 사로잡혀 고통에 몸부림칠 때마다, 이따금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릴 때마다, 그리고 결핍을 채우기 위해 어떻게든 스승의 관심을 갈구할 때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애당초 아예 ‘없는’ 기억을 만들려 전전긍긍하는 꼴이 우스웠을까? 진짜 사람도 아닌, 일개 데이터에 불과한 것이 사람인 척 행동하는 모습이 꼴사나웠을까?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 이상의 기만은 그에게 겨우 남은 가슴마저 갈가리 찢고 말 테니까.

녹턴은 검을 꽉 쥐면서 으르렁거리듯이 소리쳤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당신의 새로운 난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역경이 되어 당신의 발목을 붙잡아 이곳에 저물게 해 드리겠습니다.”

쿠쿠쿠쿠!

“스승님.”

대성역이 요란하게 떨리고.

그 순간, 녹턴의 몸뚱이가 쩌걱,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지면서, 안쪽에서부터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올포원이 이 자리에 강림하려는 것처럼.

탈각(脫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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