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무왕(武王) (14)
‘애당초 여기서 탈각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연우는 영혼을 속박하고 있던 보이지 않는 구속들이 빠르게 해제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창공 도서관에서도 똑같이 느꼈던 감각.
아니,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보다 높은 위치에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면에 숨어만 있던 세상의 원리들이 손끝에서 점차 구현되고 있었고, 드넓은 여러 우주와 차원으로 감각이 무한하게 확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창공 도서관에서 시도를 할 때에는 그저 단순히 격이 오른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영혼이 완숙의 경지에 올랐으니, 더 많은 것들을 감지할 수 있는 거겠지.
사실 탈각과 초월은 77층에서 올포원과 부딪칠 때 시도할 예정이었다.
올포원을 사냥하고자 하는 파티 멤버들을 더 확실하게 충당하고, 크로노스의 격을 거의 복구시킨 뒤, 페렌츠 백작 등이 갇혀 있다는 ‘감옥’을 탈환한 다음에 하려던 것이다.
권속들도 기량을 끌어 올릴 수 있을 만큼 최대로 끌어 올릴 생각이었고.
단 한 번.
올포원을 제대로 사냥할 수 있는 기회는 그것밖에는 안 되니, 어떻게든 만반의 준비를 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녹턴과 부딪치게 된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편으로는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녹턴은 올포원의 복제품이 아닌가. 이참에 그를 제대로 상대해 본다면, 올포원이 가진 약점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다면 승산도 그만큼 더 높아지겠지.
그래서 가속도가 덧붙은 검뢰를 날렸고.
두 개의 태엽이 주는 과부하를 감당하면서 탈각을 시도했다.
신왕 크로노스의 두 신위를 온전히 지금의 육체로 감당하기는 힘들 테니, 탈각으로 강화된 육체로 버티려는 것이다. 7차 용체 각성도 조금씩 그 뒤를 따라왔다.
그런데.
‘……뭐지?’
곧바로 해제되어야 할 구속이 어느 순간부터 정지되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듯한 해방감이 뒤따라야 하는데…… 오히려 더 갑갑해졌다.
마치 외부에서 부화(淨化)를 막기 위해 억지로 껍질을 틀어쥐고 있는 듯한 느낌.
그 순간, 연우는 보이지 않는 다른 무언가가 자신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탈각에 필요한 외부 환경 변화가 정지되었던 것이다. 뭐지? 이번에도 올포원이 나타나는 걸까?
[시차 괴리]
그것을 감지한 건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연우는 사고 속도를 가속하면서 원인을 찾고자 했다. 방해 요소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그곳에.
무왕이 그의 사고 시간과 비슷하게 생체 시간을 맞춘 채로, 차갑게 눈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방해하지 마라, 이놈아.』
마치 버릇없는 아이를 혼내듯이.
혹은 제 먹이를 다른 누군가에게 뺏길까 싶어 살의를 번들거리는 맹수처럼.
『이건 내 승부다. 주제넘게 어딜 끼어들어?』
“……!”
그 순간, 한없이 느려졌던 시간이 되돌아왔고.
파아앗!
무왕이 어느새 탈각을 전부 끝내면서 진각을 크게 구르고 있었다.
콰아아앙!
하지만 그건 여태껏 보던 진각과는 격이 달랐다.
지면을 내려찍는 순간,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지가 그대로 내려앉았다. 마을의 지반이 그대로 내려앉으면서 먼지가 뿌옇게 올라 안개를 형성하고, 무왕을 중심으로 일어난 기세가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하면서 단숨에 사방팔방으로 뻗쳐 나갔다.
그 과정에서 그나마 겨우 남아 있던 심상 세계의 잔재들도 모조리 산산조각 나면서 우수수 쏟아졌다.
그리고.
고오오오!
하늘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내려앉아 탑 외 지역에 있는 모든 존재들의 육신을 그대로 짓눌렀으니.
탈각이 취소된 연우도.
주변에 있던 부족원들도.
망자 거인과 그들을 어떻게든 막으려던 아스가르드의 신격들도.
심지어 여태껏 상대하고 있던 녹턴도.
아니, 그것을 넘어 저 멀리 서 있는 탑의 세계까지도.
[신의 사회, ‘말라흐’가 강한 충격에 빠집니다!]
[신의 사회, ‘데바’의 소속 신들이 모두 강한 충격을 받습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격에 공황 상태에 잠깁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침묵합니다!]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이 새롭게 나타난 존재에 강한 탄식을 흘립니다!]
……
[비마질다라가 찬탄합니다!]
[케르눈노스가 눈을 크게 뜹니다!]
……
[모든 신들이 격의 주인을 찾고자 방황합니다!]
[모든 악마들이 무왕의 존재를 감지하고 경악성을 지릅니다!]
[천계가 공항 상태에 잠겼습니다!]
[탑 내 세계의 여러 층계가 시련을 작동하는 데 있어 알 수 없는 방해를 받습니다!]
분명히 초월도 아닌 탈각인데도 불구하고.
고작 아직 반신(半神)을 이룬 것인데도 불구하고.
무왕은 이미 사위를 압도하는 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세상 속에 오로지 그밖에 존재하질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재해.
언젠가 그를 가리키는 용어였다는 말만큼 지금의 무왕을 칭할 수 있는 단어도 없을 듯 보였다.
그는 필멸자도, 초월자도, 휩쓸리게 만드는 재해였다.
그런 기세를 앞에 두고…… 연우는 어째서 무왕이 자신의 개입을 막았는지 알 것 같았다.
애당초 걱정하던 그의 마음과 다르게.
이 승부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었던 것이다.
“나의 새로운 난관이자 역경이 되어 주겠다고 했겠다?”
콰드득, 콰득!
무왕이 가볍게 목을 풀 때마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그는 고개를 비딱하게 외로 꼬면서 비웃음을 던졌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꾸나. 2라운드란다, 제자야.”
그 말과 함께.
파밧!
무왕이 어느새 녹턴 앞에 등장해 주먹을 날렸다. 그저 단순한 정권에 불과했지만, 위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녹턴은 비록 빛무리에 잠겨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이미 무왕의 기세에 압도되고 있다는 것쯤은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콰아아앙!
그렇게 서로 간에 일격이 부딪치고.
녹턴의 오른팔 부위가 갈가리 찢기면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 * *
연우에게 무왕의 어기전성이 도착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아니, 이건 어기전성도 아니었다.
혜광심어(慧光心語).
오로지 의지만으로 의사를 전달한다는 경지.
『내가 지금부터 벌이려는 승부, 똑똑히 봐 두어라. 하나도 놓치지 말고, 전부!』
무왕이 내뿜는 아득한 기세를 느끼면서, 전성기 시절의 아버지가 돌아오면 저랬을까 하고 아주 잠깐 생각하던 연우는 순간 무왕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쾅, 쾅, 콰아앙-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공간이 부서져 나가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돌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녹턴은 언제부턴가 폭풍우 속에 표류하고 있는 돛단배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완전한 압도(壓倒).
연우는 무왕이 얼마나 대단한 경지를 딛고 있는지.
어째서 크로노스가 무왕을 보면서 탄식을 흘렸는지를 완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탑의 세계에 지속적으로 천계의 메시지가 빗발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말라흐’의 서기장, 메타트론이 침묵합니다.]
[‘르 인페르날’의 수장, 바알이 침음을 흘립니다.]
심지어 각각 절대선과 절대악을 상징하는 무리들의 수장들까지 큰 충격을 받았을 정도이니.
이제야 겨우 스승님의 발꿈치를 쫓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저만치 멀리 가 버리시고 만 것이다.
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계속…… 강해지시고 있어.’
분명히 탈각밖에 시도하지 않으셨을 텐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갈수록 녹턴의 공세를 무위로 돌리고 반격을 가하는 힘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직 탈각을 완성되지 않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예전부터 느꼈지만, 정말 사람 같지 않단 말이지. 난 저런 아저씨한테 대들었던 건가? 젠장. 정말 되도 않게 객기 부리다가 황천길 갈 뻔했었잖아.」
연우의 감각을 일부 공유하고 있던 차정우도 헛바람을 들이켰다. 크로노스는 아예 침묵하고 있었고.
그런데 갑자기 무왕에게서 그런 혜광심어가 도착한 것이다.
자신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으라고.
『사실 약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서 그동안 마누라가 아니면,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던 건데 말이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무왕은 녹턴과 격전을 치르고 있으면서도, 마치 연우와 담소를 나누듯이 여유롭게 말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웃음기마저 다분히 묻어 있었다. 아니, 장난기라고 해야 할까. 연우는 어쩐지 무왕의 그런 태도가 평상시와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무왕의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불안감.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가 힘든, 그런.
『내가 언제부턴가 외부 일에 신경을 거의 끄다시피 하면서 은거를 했던 건, 사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올포원을 넘을 수 없으리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연우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부릅떴지만.
『궁둥이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뛰지 말고, 그냥 잠자코 들어!』
“……!”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계급장 떼고 붙으면 내가 이겨. 그건 확실하다. 내가 오죽 잘났냐? 하지만 전투는 그럴지 몰라도, 전쟁을 벌이면 결국 내가 진다. 전부 놈이 가진 신위 때문이지. 올포원(All for One)…… 참 웃기는 말이지? 모든 것이 하나를 위해 존재한다니, 세상에 대체 그딴 사기극이 어디에 있는 건지. 하지만 놈은 그걸 해낸 존재다.』
“……?”
『그놈은 시스템의 화신이다. 탑의 시스템을 이루는 코드 중 일부가 자체적으로 의지를 갖고, 플레이어로 재조립되었지. 스스로 격을 갖추고, 자아를 만들어 내었어.』
시스템의 일부가 플레이어가 되었다고?
순간, 연우는 올포원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빛에 휩싸인 모습 안쪽으로 느껴지던 수도 없이 많은 존재들. 그리고 성별과 나이를 분간하기 힘든 애매한 목소리.
애당초 그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잠깐.
그렇다면…… 여태껏 올포원의 환영이면서도, 사람의 형상을 띠던 녹턴은 무엇이 되는 거지?
『때문에 놈은 자신을 이루는 코드를 이용해 시스템에 자체적으로 접속하여 제 입맛대로 사용할 수 있다. 절지천통(絶地天通)을 운운하면서 77층을 기준으로 천계와 하계를 가르는 게 가능했던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지.』
“……!”
『또 어디 그뿐일까? 탑에 들어온 이상, 그게 플레이어가 되었든, 네이티브가 되었든, 관리자며 신과 악마 같은 초월자들까지, 그리고 나와 부족원들도 전부 시스템에 종속되거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그 말은 곧 우리 모두가 시스템에 ‘신앙을 바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도 하다.』
아!
연우는 그제야 무왕이 어째서 여태 이처럼 강한 무위와 자질을 갖추고도, 결코 올포원을 능가할 수 없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신앙을 단순히 정의하자면 ‘신도들이 신에게 바치는 신실한 마음’이기도 하지만, 범위를 넓게 잡으면 ‘여러 존재들이 신을 인식하는 정도’이기도 했다.
애당초 신격이란 세상의 법칙을 작동하는 부품과도 같은 존재. 당연히 얼마나 ‘많은’ 필멸자들이 신격을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높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존재감과 더불어 격도 커지기 마련일지니.
그래서 이런 요소들도 전부 신앙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시스템은 무수히 많은 신앙을 채굴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였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물론, 천계에 갇힌 신과 악마들도 시스템을 인식할 수밖에 없음이니. 그만한 존재들이 저절로 신앙을 갖다 바치는 한, 시스템은 나날이 더 강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생성된 올포원도 똑같이 단단한 격을 지닌 터.
올포원(All for One).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AII)은 탑에 상주하는 모든 존재들을.
하나(One)는 시스템, 즉, 비바스바트를 가리켰다.
무왕이 제아무리 날고 긴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시스템에다 신앙을 가져다 바치는 신도에 불과한 이상, 올포원을 절대 넘을 수 없는 것이다.
탑의 세상에 존재하는 한.
무왕은 일찌감치 이러한 사실들을 깨달았기에, 그런 막대한 힘을 가지고도 은거를 택해야만 했다. 아니, 오히려 강했기에 더 실망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마도 무왕 이전에 존재하던 다른 도전자들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여름여왕, 흡혈군주, 페렌츠 백작, 파우스트,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전부…….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시스템도 결국 거슬러 가다 보면 어딘가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
연우는 이 역시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것 같았다.
천마.
그리고 트리니티 원더.
『시조이신 소호 금천이 남기셨다는 태극혜 반고검…… 그것이라면 분명히 올포원의 신위를 ‘끊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어렵다. 애당초 우리 부족원이 오랫동안 궁구했어도 음검을 깨우치지 못한 건, 축복받은 재능이 역설적으로 주는 저주 때문이었으니까.』
무왕의 목소리에 점차 힘이 실렸다.
『하지만 넌 다르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 담긴 엷은 웃음기가, 마치 연우를 대견스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너는 내가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해 주고 있다. 제자 주제에 벌써 이 위대하신 스승님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올라왔으니까. 충분히 네가 가진 것들을 곱씹다 보면, 음검을 깨우칠 수 있을 게야. 그러니.』
무왕은 잠시 말허리를 끊었다가, 이어 나갔다.
『지금부터 나와 녹턴의 싸움을 지켜보고, 녀석이 가진 모든 것들을 파악해라. 그리고 음검에 대한 실마리를 깨우쳐, 태극혜 반고검을 완성해라. 반드시 그런 준비를 끝내고 난 뒤에 탈각을 해 내야만 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그 목소리가.
『그것이 바로.』
너무나 묵직하게 연우의 가슴팍에 내려앉았다.
『이 스승이 너에게 마지막으로 내리는 가르침이니라.』
마지막 가르침이라고?
“스승님,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것이 난데없는 작별 인사라는 사실을 깨달은 연우는 황급히 그에게로 다가가려 했지만.
[반신, 나유의 대성역이 선포되었습니다!]
불현듯, 무왕에게서 방출된 새로운 기세가 좌중을 휘감는다 싶더니, 연우와 여러 부족원들이 있는 구역과 그가 있는 구역을 완전히 갈라놓고 말았다.
화아악!
대성역.
무왕은 스스로가 발산한 격으로 돔을 형성해 녹턴과 자신을, 외부 세상으로부터 격리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연우는 완벽한 방관자 신세였다.
그 순간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 정말 무왕의 작별 인사라는 것을!
쾅! 콰콰쾅!
“이 망할 스승 새끼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이거 열어! 열라고!”
연우의 절규가 구슬프게 울렸다.
하지만 결계는 단단해도 너무 단단했다.
빌어먹게도.
* * *
“그놈 참 누굴 닮아서 그런지 목소리 하나는 기똥차구나. 하!”
무왕은 밖에서 비명을 지르는 연우를 보면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러면서 육체를 따라 퍼져 가고 있는 ‘균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조각난 육체와 영혼의 조각들이 금방이라도 톡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있었다.
산화(散華)였다.
원래대로라면 탈각만 하는 정도로 끝내려 했지만.
문제는 자신이 디딘 경지가, 애당초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다는 점이었다.
애당초 그의 탈각은 남들의 초월에 해당하는 것보다도 더 큰 것이었으니.
결국 영혼의 성숙이 너무 가파르게 이뤄지고 말았다. 그 자신도 도저히 도중에 끊을 수조차 없을 만큼. 고삐 풀린 망아지나 다름없이 초월을 향해 달려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초월이 종국에 다다를 위치까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황(皇).
어느 누구도 쉽사리 닿지 못했다던 곳을 향해 초월이 계속 이뤄지는 한, 결코 영혼의 성숙은 멈추지 않을 터였다.
문제는…… 그만큼 가이아의 저주도 빠른 속도로 발전하여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왕의 신화를 어그러뜨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초월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뜻이었다.
무왕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토록 다다르길 바랐고, 올포원을 능가하기 전까지는 절대 이루지 않으려 미루고 미뤘던 탈각과 초월이었는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도한 순간, 뜻하지 않은 자리를 얻은 셈이었으니까.
“하여간 이래서 사람은 너무 잘나도 문제라니까.”
이를 두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필멸이라는 점괘가 틀린 건 아닌 셈이었다.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지만.
“나쁜 마누라 같으니. 이럴 때는 솜씨가 좀 나빠도 되는 거 아니냐고.”
무왕은 그렇게 투덜거리다, 곧 드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아니지. 산화를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그만큼 강한 흔적을, 유지를 남겨 놓는다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닐지니. 이 몸의 신화가 그놈을 통해 계속 숨을 쉴 게 아닌가? 그럼 그게 곧 바로 불멸(不滅)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무왕은 다른 누군가의 말을 좇아 그대로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불멸을 이루고자 하였다.
하나 남은 제자를 통해서.
그리고.
그로서 점괘는 틀린 것이 될 것이다.
무왕은 어디선가 ‘눈’으로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영매를 떠올리면서 빙긋 웃었다.
“마누라, 보고 있지? 임자가 틀렸다는 걸 지금부터 보여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