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무왕(武王) (15)
한령은 연우가 지시한 대로 에도라를 찾아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연우와 연결된 페어링이 계속 흔들리는 게 분명히 심상치 않은 일에 휘말린 게 분명했지만.
지금은 그쪽으로 가기보다 연우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 더 집중했다.
어차피 자신이 연우에게 손을 보탠다고 해서 전황을 크게 뒤집을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에도라를 계속 찾다 보니 자꾸만 이상한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고작 이것으로 끝난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연우 등은 당장 마을에 연달아 일어난 사건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니 걸리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 이번 일을 꾸민 주동자.
겉보기엔 페이스리스로만 보인다.
분명 놈이 화이트 드래곤과 다우드 형제단을 포섭하고, 외뿔부족 내에 심어 둔 세작을 통해 이번 일을 획책하였지만…… 아무리 봐도 녀석은 겉으로만 내세운 미끼일 뿐이었다.
한령은 한때 청화도에서 도무신으로 불렸던 까닭에, 페이스리스의 중심이 되는 검무신과 창무신이 어떤 성격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시에는 자신들이 정점이며 지배자라고 여겼었지만. 레드 드래곤에 의해 청화도가 멸망하고, 연우의 권속이 되어 천계의 여러 존재들과 싸우다 보니 이제는 그것이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페이스리스가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아스가르드를 통째로 회유하는 건 불가능했다.
‘칼’이라 불린 궁그닐이 있었지만, 고작 대신물 하나를 가지고 신의 사회가 통째로 움직일 리 만무하지 않은가.
하물며 신왕좌를 자처하며 올림포스를 거머쥔 연우와 대립했을 때, 아스가르드가 처하게 될 정치적 위기를 생각해 본다면 절대 말도 안 되는 수작이었다.
‘뒤에 누군가가 있다. 분명.’
특히 페이스리스가 녹턴에게 가르쳐 준 진실은 애당초 페이스리스가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여태껏 21층의 마지막 구획으로 갈 수 있었던 건, 단 두 명밖에 없었다. 애당초 그곳은 플레이어가 도전했을 경우, 죽지 않으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는 조건이 달려 있었으니까. 즉, 살아남은 두 사람이 바로 마지막 구획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왕과 연우.
그중 무왕이 올포원의 환영을 강제로 끄집어낸 장본인이었고.
연우는 없어진 환영 때문에 겨뤄 보지도 못하고, 공동 1위로만 기록되어 나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기록에서도 저 밑에 있었던 검무신이 알고 있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걸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것도 모순일 뿐이니, 결국 하계를 제멋대로 감상할 수 있는 천계의 인물 중 누군가가 개입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천계의 인물이 하계에 그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인과율에 저촉되는 행위, 그것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격이 지고할 가능성이 컸다.
그런 존재가 몇이나 되겠는가. 하물며 잔뜩 성이 나 있을 올림포스와 척을 질 각오를 할 존재는 거의 없었다.
연우와 척을 져도 별반 타격이 없으면서도, 이런 큰 음모를 꾸밀 수 있는 작자.
어디일까?
아니, 누구일까?
‘더군다나 그 흑막은 이런 혼란 중에도 끝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애당초 놈들의 목적은 무왕 암살이 아니었던 거야. 그건 성공하면 좋고,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은…… 자신들의 목적을 숨기기 위한 가림막에 불과해. 다른 뭔가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한령의 머릿속으로 적이 될 만한 후보군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걸리는 점이 있었다.
흑막이 이런 일을 꾸미면서까지 노릴 만한 주요 인물이라면…… 사실상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영매.’
시조 소호 금천의 말씀을 떠받 든다는 최고 제사장은 일족을 보호하는 ‘눈’을 지니고 있으니. 그 ‘눈’은 올포원의 〈천리안〉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탁!
한령은 바삐 움직여 영매가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곳, 영소에 도착했을 때 볼 수 있었다.
“이런, 이런. 생각보다 빨리 읽고 오셨네용?”
우락부락한 구릿빛 근육과 스킨헤드를 한 채, 머리 위에는 기다란 토끼 귀를 달고 있는 괴상한 모습을 한 라플라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주변에는 그와 비슷한 기질을 지닌 존재들이 여섯이나 더 모여 안광을 예리하게 빛냈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의 앞에는.
“하아…… 하아……!”
피투성이가 되어 신마도에 의지한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에도라와 그녀를 도우려다 크게 다친 여러 수호 전사들, 그리고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영매가 있었다.
영매의 얼굴을 가린 손 틈 사이로는…… 눈물이 뚝, 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퍼퍼퍼펑!
“어…… 째서!”
왈츠는 어떻게든 목소리를 쥐어짰다.
“어째서입니까, 어머니!”
이유를 묻기 위해서.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어머니가 어째서 저쪽 편에 서서 자신들을 이리 저버리려 하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
그녀를 돕고자 목숨을 걸고 같이 탑 외 지역으로 왔던 결사대는 이미 모두 죽은 지 오래였다. 여름여왕이 날린 마법 폭격에 의해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모조리 휩쓸려 버린 것이다.
그렇게 비명 하에 스러지면서도, 그들은 마지막까지 여름여왕에게 묻고자 했다.
어째서 자신들이 아닌 저들의 손을 들어 주시느냐고. 혹시 저들에게 묶인 나머지 억울하게 조종을 당하고 계시는 건지, 아니면 어떤 약점이라도 잡히신 건지. 이유를 말씀해 주신다면 어떻게든 도와 드리겠노라고 말이다.
그만큼 이들은 머릿속에 ‘충성’이라는 단어밖에 담고 있지 않았던 충신들이었다.
레드 드래곤에 있을 시절부터 여름여왕을 위한 것이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 뒤로 왈츠를 따랐던 것도 오로지 여름여왕의 자식 중 맏이이며 가장 정통성 있는 후계자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화이트 드래곤이 급속도로 몰락하면서 이탈자들이 많은 와중에도 끝까지 남았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왈츠 역시도 여름여왕의 권능들이 자신에게로 제대로 계승되지 않은 것을 느끼고, 혹여 그녀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 혹은 다른 계승자를 염두에 둔 건 아니실까 하고 이따금 의심을 하면서도, 끝까지 그녀를 믿었던 건 전부 이런 충신들이 있어서였다.
만약 여름여왕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살아남아 있다면, 이런 충신들이 있는 한 언제고 간에 자신에게로 와 주실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름여왕은 그런 왈츠의 모든 기대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본 드래곤이라는 추악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별달리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적에게 목줄이 묶여 강제로 조종을 당하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마법을 난사하는 솜씨하며, 좌중을 휘어잡는 드래곤 프레셔는 분명히 소싯적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았으니까.
드래곤 하트를 잃기 전, 전성기 시절 때 말이다.
마지막 남은 용종으로서,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탑의 세계를 지배해 왔던 절대자가 되돌아온 것이다!
결국 그녀의 손에서 빚어진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수하들은 줄줄이 녹아내리고.
마지막에는 왈츠, 그녀 하나만이 남아 버렸다.
하지만 왈츠도 그들처럼 언제 스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주 위태로웠다.
애당초 왈츠가 가진 힘도 대부분 여름여왕에게서 기원한 것인 데다가, 아난타와 싸우면서도 이미 체력이 크게 빠지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대지를 휩쓸면서 당장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처럼 위협적이게 구는 검은 불길은 도저히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끝까지 버티려는 이유는 단 하나.
이유를 듣고 싶어서였다.
여름여왕이 왜 저쪽에 섰는지. 그리고 권속들을 이리 무참하게 저버리는지를.
너희들이 약해서 버렸노라고, 기대에 못 미쳐서 폐기 처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래서 대답을 기다렸지만.
콰콰쾅!
여름여왕은 대답해 줄 가치도 없다는 듯, 무감한 눈빛 그대로 헬 파이어로 이뤄진 폭격을 계속 날려댔다.
그리고 바로 그때.
『구원 요청! 구원 요청!』
갑자기 연결 고리를 통해 76층에 거주 중인 클랜 본진에서 긴급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설마?’
『부유성 라퓨타가 결계를 깨고 76층에 진입했다! 본진이 위험에 처했다! 구원을 바란다!』
『환상연대도 함께 출몰!』
『아르티야 산하 조직들이 속속 출현 중이다! 철의 왕좌, 숲의 아이들…… 젠장! 너무 많아!』
『반복한다! 반복한다! 아르티야가 침입해 왔다! 서둘러 구조를 바란…… 크아악!』
『여, 여왕님……!』
『이곳은 위험합니다! 여왕님이라도 서둘러 피하십시……!』
치칙, 치치칙!
치이익-
다급한 어조로 빗발치던 메시지는 곧 노이즈가 끼면서 전부 중단되고 말았다.
그 순간, 깨닫고 말았다. 결사대가 외뿔부족을 치는 동안, 아르티야는 역으로 빈집털이를 시도했다는 것을.
빠르게 치고 빠졌어야 했는데, 여기서 너무 오랫동안 시간을 잡아먹은 것이다. 아마 연우는 외뿔부족 마을에 나타났을 때부터 아르티야를 그쪽으로 이동시킨 것이었겠지.
거기다 여기 있던 결사대도 전멸하고 말았으니…… 사실상 화이트 드래곤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대답을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는…… 저희는…… 결국 어머니께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였던 거군요. 하, 하하하……!”
왈츠는 무공의 상승 묘리인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수로 연거푸 폭격을 계속 흘려 내면서, 눈을 차갑게 번뜩였다. 눈가에 살짝 맺혔던 눈물은 고열로 인해 금세 증발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다 시커먼 매연이 확 하고 일어나 두 사람 사이를 아주 잠깐 가렸다.
그 때문에 왈츠는 미처 보지 못했다.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던 여름여왕의 눈꺼풀이 아주 잠깐 파르르 떨리는 것을.
“결국 당신들은 전부 다 똑같았던 거야!”
왈츠는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그건 비명이었다. 그리고 절규였다.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울분이었다.
부모는 외뿔부족에 버림을 받았고, 자신은 배려를 가장하면서 다가온 이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 결국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러다 드디어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붙잡았으나, 그마저도 끝내 썩어 있었으니.
애당초 자신이 걸어왔던 삶은 전부 망가져 있던 것들투성이었던 셈이었다. 제대로 된 것 하나 없는, 모든 게 엉망인 삶.
최선을 다해서 살면 될 줄 알았다. 이를 악물고,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또 버티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빌어먹을 사슬들을 전부 떨쳐 내고 우뚝 서서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자신처럼 구렁텅이에 빠진 이들도, 밝은 하늘 아래 서 있을 수 있노라고.
하지만 결국엔 다 끝나고 말았다.
세상에 정말 운명이란 게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너무나 기구하지 않은가. 애당초 자신이 잘못한 건 없는데,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버렸을 뿐이며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인데, 왜 모든 게 최악으로 몰려가 이리 비참한 꼴을 맞아야 한단 말인가.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냐며, 왈츠는 그런 마음을 담아 하늘에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하, 하하하!”
그래서 마지막에 왈츠는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내뱉은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자신을 옥죄는 운명을 향한, 끝까지 농락만 일삼는 하늘을 향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왈츠는 이 빌어먹을 운명을 끊어 낼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을 멋대로 농락한 것들에게 제대로 엿 먹일 방법을.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살아가는 것도 제 뜻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죽음만큼은 유일하게 제 뜻대로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왈츠는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미련을 놓아 버렸다. 더 이상 저항하기를 멈추고, 검은 불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었다.
검고 붉은 혓바닥이 탐욕스럽게 그녀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자 했다. 뜨거웠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육체와 반대로 정신은 희열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걸 끝낼 수 있었다. 지긋지긋한 것들을 떨쳐 내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왈츠에 있어 삶이란 오로지 고통으로만 가득한 굴레였으니까. 이 자유만큼은,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었다.
화르륵!
그렇게 검은 불길이 마지막 남은 의식까지 먹어 치우려던 때. 왈츠는 그때서야 볼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공격을 멈추고, 처연한 기색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여름여왕을.
여태껏 보이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
왈츠는 어이가 없었다. 왜요? 막상 이리 보내려니 갑자기 아까워지기라도 하신 것입니까? 그런 말을 던지고 싶었지만, 이미 성대가 불길에 녹아 버린 뒤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다 왈츠는 어떤 생각에 미쳤고.
무언가를 완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불길이 시야를 가득 물들이기 전에 입술만큼은 벙긋거릴 수 있었다.
-감사해요, 어머니.
왈츠는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검은 불길이 한순간 확 하고 가라앉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
여름여왕은 가만히 서서 왈츠가 사라진 자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이 무표정하게만 보였다.
“언제였던가. 과거에 나유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완전히 집권할 무렵에 일족에 아주 작은 소란이 있었지. 지난 전통에 따르지 않고, 경쟁에서 밀린 왕자 중 한 명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야.”
그때, 뒤에서 대장로가 어느새 나타나 입을 열었다. 여름여왕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무슨 말을 하느냐는 눈빛. 하지만 대장로는 무시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나유는 그런 걸 그냥 내버려 둘 성격이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꽤나 많은 부족원들이 죽어 나갔지.”
새로운 왕이 장로원에서 만장일치하에 인가가 나면, 다른 경쟁자들은 전부 현역에서 물러나 가문으로 되돌아가 평범한 부족원이 된다.
이것은 지난 세월 동안 내려온 일족의 전통이었다. 왕위 경쟁이 지나치게 과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일환이기도 했다. 그리고 강자를 숭상하는 분위기 때문에 보통 경쟁자들은 새로운 왕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나면 스스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거스른다는 것은 새로운 왕은 물론, 장로원의 권위에까지 도전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당연히 무왕은 분노를 내뱉었고, 장로원도 일벌백계로 반란을 다스리고자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한 부부가 도망을 친 게야. 우리들은 그들을 어떻게든 잡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부부가 애를 낳았다는 말이 들리더군. 물론, 그 뒤로도 줄기차게 뒤쫓았었고.”
「……그걸 굳이 나한테 말해 주는 이유가 무엇이지?」
“자네는 자신이 겪고 있는 굴레를 소중한 딸아이한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고개만 돌리면 피안인 것을, 자네는 그러지 못하고 지난 세월 동안 오로지 분노에만 가득 차 살았었지. 그리고 저 아이는.”
대장로는 안경을 고쳐 쓰면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를 아주 쏙 빼닮았으니. 배로 낳지 않았다고 해도, 마음으로 낳은 것 또한 자식이지 않은가?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것이겠지.”
「…….」
여름여왕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대장로를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본 드래곤으로 되돌아가 크게 날갯짓을 해 상공으로 비상했다.
대장로는 그런 여름여왕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한때 그녀와 경쟁하던 존재였기에 그녀의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대장로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면서 손으로 눈을 가만히 가렸다.
“……내 처지도 저 우둔한 용과 다르지 않겠지.”
그리고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비장한 얼굴이 되어 어디론가 천천히 이동했다.
지금 이 순간.
여름여왕이 자식을 위해 안타까운 선택을 내렸듯.
무왕도 제자를 위해 새로운 선택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대장로로서 왕의 마지막 순간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 그리고 그의 유지가 제대로 설 수 있게 보좌하는 것. 그것이 자신이 맡은 임무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대장로는 그것이 자신이 이 자리에서 맡을 마지막 의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에 반드시 지켜 줄 생각이었다.
『판트.』
『……예.』
전음을 보내자,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대장로는 그의 심정을 알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내가 신호를 내리면 즉시 네 형을 붙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