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무왕(武王) (16)
화아아!
무왕은 자신을 따라 흐르는 격풍(激風)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다르긴 다르군.”
그는 사실 자신이 이룬 성취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탈각과 초월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룰 수 있는 것이었던 데다가, 별다른 대처법도 없이 격만 올려서는 올포원에게 좋은 일만 해 줄 뿐이었으니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태극혜 반고검을 완성하고 나면 이룰 것.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초월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왜 많은 존재들이 그토록 여기에 목을 맸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천계에 있는 저 머저리들이 한 번 이룬 초월에 대해 그토록 많은 미련을 두는지도.
초월은 한 번 이루고 나면 절대 되돌릴 수가 없다. 한 번 깨고 나온 ‘알’은 두 번 깰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되도록 영혼이 완숙을 이룰 때까지 기다렸다가 초월을 이루는 것이 좋았지만, 보통 일반적인 존재들은 탈각과 초월의 위치에 다다르는 것만으로도 조급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무왕은 그런 기존의 초월자들과 정반대였다.
올포원이 있어 인내해야만 했었어도, 어쨌거나 그의 영혼은 이미 성장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고.
그 와중에도 업은 나날이 쌓이고 쌓여 이미 웬만한 신격들쯤은 발아래로 여길 정도로 탄탄했다.
그런 것들이 단번에 개화를 이뤘으니, 얼마나 크고 폭발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무왕은 끓어오르는 힘을 느끼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실제로 무왕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천지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마음만 먹는다면 저 멀리 있는 탑도 통째로 뒤흔들 자신이 있었다. 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막강한 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거 잘못하면 정말 곧바로 하늘로 날아오르겠는데.’
무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혀를 차야만 했다.
외뿔부족 내에서 우스갯소리로 하는 소리 중에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는 말이 있었다. ‘깃털처럼 가벼워져 하늘로 오른다’는 뜻이었는데, 보통 경지에 다다른 존장들이 수명이 다해 조용히 눈을 감을 때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몰골이 딱 그 꼴이었다.
힘 조절에 조금만 실패해도 곧장 몸이 바스러질 것 같았던 것이다. 승화가 이뤄지는 속도는 그만큼 빨랐다.
어떻게든 최대한 초월이 이뤄지는 속도를 늦춰 보고자 하고 있지만, 그리 쉽지는 않을 듯했다.
‘주어진 시간은 대략…….’
그는 재빨리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5분 정도인가?’
생각보다 적었다.
입맛이 조금 썼다.
‘그 안에 어떻게든 저놈들을 다 처치해야겠구만.’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그것밖에 되지 않았다는 뜻이었지만.
결계 안에 갇힌 존재들을 바라보는 무왕의 눈빛은 다른 어느 때보다 살벌하게 번뜩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아주 넘쳐흘렀으니까.
결계에 갇힌 건 녹턴만이 아니었다. 아스가르드의 신격들도 있었다. 이왕에 제자 녀석에게 자신의 가공할 모습을 자랑할 겸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했던 놈들까지 싹 다 치워 버릴 속셈이었던 것이다.
『젠장! 왜 이렇게 안 열려! 열려! 열리란 말이다아!』
『천계가 감지되질 않아!』
『으아아! 개 같은! 어째서 우리가 하계에서 이딴 수모를 겪어야 하는 거냐고!』
아스가르드의 신격들은 방금 전부터 천계로 되돌아가지 못하자, 침착함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갇힌 상태에서 대신격, 아니, 개념신도 아득히 상회하는 존재의 격을 바로 앞에서 느끼고 있는데 어떻게 당황하지 않고 있을까!
그들은 오히려 먼저 간 토르가 부러울 정도였다.
『어, 어어? 오, 온다!』
그러다 누군가가 무왕이 이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괴성을 질렀다. 신격들의 경악한 시선이 모조리 그쪽으로 향하던 그 순간.
“아주 내 앞에서 잘난 척 장난 아니게 했었지? 그대로 돌려줄게.”
쾅!
무왕은 가볍게 정권을 내질렀다. 겉보기엔 아주 부드러운 동작이었지만, 그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권이 맞닿은 공간이 콰직 하고 주저앉더니, 삽시간에 균열이 퍼지면서 신격들이 뭉쳐 있던 지역까지 덮쳤기 때문이었다.
콰콰콰!
그가 부순 것은 단순히 공간이 아니었다. 그 공간 위에 있는 모든 것. 대기, 입자, 법칙, 존재…… 모든 것이 망가졌다. 신격이 이데아를 구성하는 부품이라면, 황은 그런 부품들을 직접 돌릴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건 부품들을 망가뜨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
『으, 으어어!』
『마, 마, 말도 안 돼!』
아스가르드의 신격 중 절반이 그 한 방에 모조리 휩쓸려 사라졌다. 화신체가 망가져 천계로 튕겨 난 건지, 아니면 존재 자체가 삭제된 건지는 현 상황에서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이 알 수 있는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도망쳐!』
정면으로 부딪쳐 봤자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도망치긴 어딜 도망치니?”
콰콰쾅, 콰쾅!
무왕은 신격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손날을 이리저리 그어 댔다. 그럴 때마다 신격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몸이 찢기거나, 육편이 되어 터져 나가는 등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간간이 반격을 시도하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래 봤자 무왕에게는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애당초 그들 모두 무왕이 탈각을 시도하기 전에도 제대로 승부를 낼 수 없지 않았던가. 하물며 그가 구축한 대성역에 갇힌 지금은 독 안에 든 생쥐 꼴이나 다름 없는 신세였다.
결국 녀석들이 줄줄이 터져 나가는 가운데.
『……우리는 이렇게 갈지라도, 되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넌 안 될…… 컥!』
마지막 남은 헤임달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무왕에게 저주를 내뱉었다.
그들이야 천계에 본체가 있으니 여기서 죽어 패널티를 입을지언정 차후를 기약할 수 있지만, 무왕은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가이아의 저주에 완전히 잡아먹힐 것이라고 비웃는 것이다.
하지만 헤임달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날아든 무왕의 손이 단숨에 그의 먹을 낚아챈 탓이었다.
헤임달은 숨이 턱턱 막혀 버둥거렸다. 진짜 숨을 쉬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무왕이 내뿜은 격이 오로지 그에게만 쏟아졌던 탓이었다.
안색이 창백해졌다. 영혼이 바들바들 떨렸다.
헤임달 역시 잠든 오딘이나 토르를 제외하면, 아스가르드에서 손꼽히는 대신격이라지만, 그마저도 도저히 그 정도를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한 격의 차이에 완전히 질리고 말았다.
공포에 완전히 잠식된 녀석을 바라보면서.
무왕은 봉두난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차갑게 빛냈다.
“착각하지 마라.”
얼마나 차갑던지, 그 눈빛에 영혼이 이대로 얼어붙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내가 너희들에게 끝까지 손을 대지 않은 건, 네놈들의 명줄을 끊는 게 내 몫이 아니기 때문이니까. 곧 내 제자 녀석이 방문할 테니, 그때까지 목 잘 닦고 기다려.”
콰직!
무왕은 그 말과 함께 손에 힘을 주어 헤임달의 목을 꺾었다. 헤임달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 타이밍 따윈 없었다. 파스스, 녀석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다.
이로써 아스가르드의 대규모 강림은 끝났다. 하지만 그들은 천계에서도 언제 날아들지 모를 연우의 분노에 대비해 바짝 긴장하면서 있어야 하리라.
패널티로 인해 녀석들 모두 격에 적잖게 손상을 입었을 터, 연우를 감당하기 힘들 테니까. 그동안 계속 불안과 공포에 질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왕이 놈들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다.
“형…… 님.”
그리고 헤임달이 빠져나간 자리에 그릇을 자처하던 창무신 플랑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 배광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무왕을 보다 황홀에 젖은 채로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줄곧 동경하던 친형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을 수 있었기에 만족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사실 그가 바랐던 것은 형의 이런 모습이었는지도 몰랐다.
무왕은 손에서 녀석을 놓았다. 플랑은 다른 그릇들과 마찬가지로 땅에 닿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무왕이 쉴 타이밍은 없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고, 잠시 거리를 벌린 채로 무왕의 학살을 가만히 살피기만 하던 녹턴이 다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촤아악!
녹턴은 무왕의 앞에서 공간을 열고 나타나 손날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공간이 찢기면서 수직으로 빛줄기가 튀어 올랐다. 휩쓸린다면 존재 자체가 잘려 나갈 수도 있는 힘. 시스템에 근거하여 정지 코드가 담긴 에너지였다.
무왕은 의기 통천을 이용해 몸을 뒤로 바짝 물렸다. 조금씩 시스템 코드에 대한 활용법을 깨우쳐 가는 녹턴은 확실히 격의 차이에 상관없이 까다로운 상대였다.
이래서 태극혜 반고검이 필요했던 건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무왕은 몸을 팽이처럼 돌림과 동시에 잇달아 정권을 내질렀다.
전사경(轉絲勁)에 입각한 암경(暗勁)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퍼퍼퍼펑!
수도 없이 많은 폭발이 터져 가는 가운데.
둘의 손발이 크게 아우러지면서 순식간에 수 합이 오고 갔다. 팔과 팔이 부딪치고, 정강이와 정강이가 부딪쳤다. 주먹을 내지르는 자세, 각도, 폼과 타이밍까지 모든 게 동일하게 충돌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복사해서 붙여 넣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거울을 가져다 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똑같았다.
그 스승에 그 제자. 녹턴은 무왕이 어딜 가더라도 자신의 수제자라고 말하던 아이였다. 그 때문일까? 녹턴은 그렇게 스승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어도, 정작 자신도 그와 똑같은 무공을 펼치고 있단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동일한 무공을 펼치고 있다고 해서 위력까지 같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의 충돌에선 어디까지나 무왕의 압승이었다.
팔이 부딪칠 때면 녹턴의 팔이 뜯겼고, 정강이가 부딪치면 정강이가 부서졌다. 주먹이 충돌하면 주먹이 산산조각 났다. 무왕은 연거푸 녹턴을 몰아붙였고, 그럴 때면 녹턴은 올포원의 권능 중 하나인 〈불사〉를 사용해서 몸을 재빨리 복원하여 재차 반격을 가했다.
『당신은…… 당신은……!』
녹턴의 목소리에는 울분이 가득했다. 그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지난 인연을 완전히 단절하고 싶어서였다. 자신을 모르모트 취급한 사부를 눈앞에서 치워 지난 세월들을 전부 부정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였다.
자신만의 의식(儀式)인 셈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자살을 생각해 보기도 했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나선 자리에서 녹턴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히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왕에게 단단히 종속되어 있단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가 내딛는 걸음, 손을 내뻗는 동작과 자세, 호흡, 심지어 바쁘게 뛰는 심장 박동까지. 그 모든 것들에 무왕의 손길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가 무왕을 상대하고자 하는 사고방식까지도, 전부!
의식적으로 올포원의 권능들을 사용하려 한다지만,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익숙한 것을 좇고, 기존에 완성된 습관들을 바탕으로 반응하고 행동한다. 그가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상 무왕의 작품이었으니, 그것을 완전히 떨쳐내는 건 불가능했다.
무왕과의 싸움이 계속될수록 녹턴은 더더욱 그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여기서 무왕을 어떻게든 처치한다고 해도 평생 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사실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를 가장 자괴감에 들게 만드는 것은.
무왕이 마지막까지 자신을 모르모트로 취급한다는 점이었다.
막내 사제에게 싸움을 끝까지 지켜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무왕은 실제로 그와 충돌하는 내내 현란하고 화려한 동작들보다는 깔끔하고 위력적인 초식들을 순서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녹턴이 가진 모든 것들을 끄집어내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연우더러 도움이 되라면서. 더 높은 곳으로 오르라고 말하면서, 정작 녹턴의 자존심은 아무렇지 않게 뭉개 버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끝까지……!』
결국 마지막까지 자신은 믿었던 스승님에게 농락을 당하고만 있다는 사실이.
녹턴을 더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던 열등감이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그것이 울부짖었다.
하지만 무왕은 그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쳐 내고, 안쪽으로 바싹 들어오면서 팔꿈치로 녹턴의 가슴팍을 가격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만 한 바람구멍이 휑하게 뚫렸다.
녹턴이 헛바람을 들이켜면서 뒤로 크게 밀려났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멍청한 것.”
그런 녀석을 본 무왕은 혀를 차면서 가볍게 꾸짖었다.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 있냐는 듯한 태도.
그런 태도가 녹턴을 더 열 받게 만들었다.
“아직도 모르겠냐?”
『무엇을 말이오!』
“제자를 셋이나 기르고, 자식은 수십 명도 넘게 낳았다지만.”
무왕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중에서도 수제자라 할 수 있는 건, 유일하게 딱 하나.”
녹턴은 어쩐지 그 말에 숨이 저절로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바로 너였다는 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