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무왕(武王) (18)
“…….”
“…….”
“…….”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탑을 부술 듯이 흔들어 대던 파격적인 기세도,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섰던 대성역도 모두 사라졌건만.
그래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방을 뒤흔들던 힘들이 언제 있었냐는 듯 말끔하게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내려앉은 동요는 절대 작지 않았다.
그만큼 무왕이 그들에게 각인한 충격이 크다는 뜻이었다.
대장로도. 백선가주도. 다른 부족원들도. 망자 거인, 사룡…… 그리고 크로노스, 차정우, 연우며 녹턴까지.
심지어 이곳을 지켜보고 있던 천계의 시선까지도.
[신의 사회, ‘말라흐’가 침묵합니다.]
[신의 사회, ‘데바’가 침묵합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침묵합니다.]
……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침묵합니다.]
……
모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반응해야 할지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황(皇)의 탄생.
그리고 소멸.
이를 두고 누가 감히 평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다.
“……사자 소환.”
한참 뒤에야, 연우가 겨우 입을 뗐다. 목이 멘 나머지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웅, 우웅-
모두가 돌처럼 굳어 있는 와중 칠흑왕의 세 형틀만이 연우의 의지에 따라 잘게 떨릴 뿐이었다.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나유.”
[소환하신 대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차갑기만 한 메시지.
그런데도 연우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사자 소환.”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나유.”
[소환하신 대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자 소환.”
몇 번씩이나.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나유.”
연우는 똑같은 주문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소환하신 대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소환하신 대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권능이 실패했다는 메시지만 연신 떠오를 뿐이었다.
[소환하신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해당 대상에 자세한 검색 및 탐문 결과, 존재가 이 지역을 포함한 모든 우주에서 완전히 삭제되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해당 대상에 대한 더 이상의 검색이 불가합니다.]
[오류 원인: 존재 삭제]
[오류 원인: 존재 삭제]
[해당 대상에 대한 권능 발현이 불가합니다.]
그러다 더 이상 무왕이라는 존재를 부를 수 없다는 확인 사살과도 같은 메시지가 떴을 때, 연우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고 말았다.
탈각과 초월을 이룬다는 것은 윤회전생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뜻.
그런 존재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저승으로 간다는 개념이 아닌 소멸을 의미한다. 영혼마저 완전히 흩어지는 것이다.
하물며 황이라는 위대한 자리에 오른 채, 가이아의 저주로 신화와 격이 모두 흐트러지고 만 존재에게 재생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칠흑으로 건너갔다고 알려진 차정우의 영혼과는 전혀 다른 케이스인 셈이었으니.
그러니 칠흑왕의 권능이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없어진’ 존재를 다시 부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완전히 자각하고 만 이 순간.
연우는 이 모든 일들을 만들어 낸 원흉을 찢어발겨야 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콰릉, 콰르릉!
연우를 주변으로 검은 불꽃이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 비그리드가 검뢰를 잔뜩 끌어 올렸다.
그때까지 녹턴도 넋을 놓아 버린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검뢰가 곧장 치달을 게 분명한데도, 그는 저항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 순순히 죽음을 맞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검뢰가 폭발하려는 순간.
“잡아!”
그 순간, 대장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여태 대기하고 있던 판트와 외뿔부족의 대전사들이 일제히 연우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들 대부분이 검뢰에 날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검뢰가 갑자기 거짓말처럼 툭 끊어졌다.
연우가 멈칫거리는 사이, 판트와 대전사들은 연우의 팔다리에 잔뜩 매달리며 그가 움직일 수 없도록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연우는 그들을 떨쳐 내려 마력을 잔뜩 끌어 올렸지만, 그마저도 도중에 불발되었다. 아니, 오히려 역으로 작용해서 연우를 강제로 구속하고자 했다. 크로노스가 대장로의 생각을 읽고, 합일을 이룬 상태를 이용해 연우의 몸을 속박하려 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쌓은 격이며 힘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그들을 밀어낼 것처럼 위태롭게 굴었다. 만약 결계를 부수기 위해 힘을 전부 소진해 지친 상태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떨치고 나왔으리라.
대장로까지 가세하여 전력을 다해 연우를 강제로 눌렀다. 그러고는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가 있던 녹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라! 어서!”
순간, 녹턴의 눈동자에 흐릿하게나마 초점이 돌아왔다.
“……왜 절 살리려 하시는 겁니까?”
그는 여전히 혼란에 잠긴 눈으로 연우를 붙잡은 대전사들과 대장로를 바라봐야만 했다.
“당신들에 있어서 나는, 당신들의 왕을 시해한 역도에 불과할진대.”
“그렇지. 나도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든 네 녀석의 모가지를 꺾어 버리고 싶으나!”
평상시 점잖기로 유명한 대장로였지만, 그마저도 지금은 얼굴이 잔뜩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연우처럼 화가 치밀어 오른단 뜻이었다.
“한데 어째서……?”
“그게 놈의 뜻이었으니까!”
“……!”
“그 빌어먹을 놈은, 아주 빌어먹게도 남은 제자들을 걱정했다! 너와 카인, 모두를! 그게 그놈의 뜻인데 따라 주지 말라고? 헛소리! 그건 오히려 놈의 뜻을 더럽히는 짓밖에는 되지 않을 테지!”
“…….”
녹턴은 한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왕이 떠나기 전에 남겼던 말들이, 여전히 가슴 속에 낙인처럼 강렬하게 박혀 있었다.
-그놈에게 비롯되었을지는 몰라도, 시스템이 낳은 허상이라 하여도, 결국 너로써 살았던 건 너였다. 아니냐?
-그러니 방황하지 마라. 쫄지도 말고. 두려워도 마라. 그럴 필요가 뭐 있어? 너는 오롯이 너로 잘 살고 있는데,
-사춘기가 참 더럽게 길긴 길었어. 그렇지?
녹턴의 심장이, 크게 울렁였다.
-그게 스승으로서, 부모로서, 그리고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 말이다.
-대견하구나.
녹턴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스승님의 손길이.
언제였던가.
‘녹턴’으로서 처음 눈을 떴을 때에도 그랬다. 무왕은 바로 옆에 있었고, 그 뒤로도 줄곧 그의 곁에 머물면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어려운 것들을 곧잘 해내고 나면 잘했노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없는 기억을 찾으려 방황하고 날 때면 기운 내라며 등을 두들겨 주셨다.
그 따스한 손길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래서.
녹턴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아야 한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것이 스승님이 유일하게 자신에게 남기신 유지(遺志)였으니까.
“그러니 가라! 그리고 두 번 다시는 눈에 띄지 마라! 그게 나와 우리 일족이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다음번에 마주쳤을 때는.”
대장로는 그런 녹턴을 보면서 살벌하게 살의를 드러냈다.
“네놈의 목을, 내가 직접 이 손으로 꺾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녹턴은 주먹 쥔 오른손을 왼손 바닥에 갖다 대는 외뿔부족의 전통적인 인사를 보인 후, 자리를 떠났다.
포권(包拳).
사승 관계에 있어 사문의 존장께 갖추는 예. 즉, 녹턴은 무왕의 제자로서 대장로에게 감사의 뜻을 보인 셈이었다.
대장로는 녹턴이 완전히 이탈할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로써 무왕이 남긴 마지막 유지를 지킨 셈이었으니까.
제자들에게 길이길이 남아 불멸(不滅)을 이룰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후에 무왕의 불멸이 어떻게 자리 잡을지는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미래에 벌어질 이야기들은 자신 같은 늙은이가 아닌, 연우나 녹턴 같은 이들의 것이었으니까. 그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그 이야기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것밖엔 없었다.
“놔! 놓으란 말이야!”
그동안에도 연우는 여전히 발버둥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샌가 망자 거인이며 사룡들, 심지어 샤논과 레베카 등도 나타나 연우를 붙잡고 있는 통에 지상이 들썩일 정도였다. 현신한 크로노스가 그런 아들을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로는 가만히 그들을 둘러보다가, 여전히 날뛰고 있는 연우의 따귀를 다짜고짜 쳐 올렸다.
짜악!
소리는 엄청 컸다. 연우의 볼에 시뻘건 손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크로노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망자 거인이며 사룡들도 전부 대장로를 홱 하고 돌아봤다. 판트는 연우가 대장로에게 달려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연우의 행동은 겨우 정지되었고.
대장로는 여전히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
“……못 볼 꼴을 보여 드렸습니다.”
연우는 한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듯한 얼굴이 되었다. 판트 등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연우에게서 떨어졌다.
다행히 연우는 더 이상 녹턴을 쫓으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제자리에 앉은 채로 있을 뿐.
“너에게도 미안하다. 상심이 가장 큰 건 너일 텐데도. 어리광만 부린 것 같아.”
연우는 판트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순간, 판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딴청을 부렸다.
“으으음? 요새 하도 싸워서 그런가, 왜 환청이 들리는 것 같지? 우리 인성 가득한 형님이 아우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리가 없는데 말이지.”
연우는 그런 판트를 보면서 피식 웃음을 흘리다, 곧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대장로는 그런 연우를 가만히 보다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크로노스와 판트 등도 뒤를 따랐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듯 보였다.
* * *
“미안하게 되었소.”
대장로는 크로노스에게 곧장 고개를 숙였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식에게 손을 올린 셈이니,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크로노스는 전혀 그런 걸 개의치 않았다.
『아니오. 원래 저놈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놈이라, 좀 맞아야 정신을 차려서. 앞으로도 옆에서 보면서 엇나가는 것 같거든 호되게 야단쳐 주시구려.』
대장로도 그제야 안심하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띨 수 있었다.
“부모가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시는군.”
『하하. 가정 교육은 본인이 가장 어려워하는 분야라. 어른이 있다는 게 그래서 좋은 것 아니오?』
두 사람은 짤막하게 서로 농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크로노스가 살짝 웃음기를 지우면서 물었다.
『이제 이후의 일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원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연달아 터진 터라…… 일족들 모두가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소만. 아마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겨우 정리할 수 있겠지.”
『이럴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리시오. 어른이 중심을 잡아 주질 못하면, 모두가 흔들리거든.』
크로노스는 언젠가 자신이 겪었던 경험들을 토대로 진심에 찬 조언을 해 주었고.
대장로는 안경을 고쳐 쓰면서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짧게 인사와 통성명을 나눈 것인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벌써부터 마음이 통하고 있었다.
“……바람이 꽤나 차군.”
무왕이 그렇게 날뛰었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이렇게 대기가 식을 줄이야. 녀석이 남긴 흔적이 참 빠르게도 사라지는구만. 대장로는 그렇게 작게 중얼거렸다.
* * *
연우가 생각을 정리하다 말고 갑자기 다시 일어난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느껴지질 않아. 페어링이.’
에도라를 찾으라고 보내었던 한령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무왕과의 일에 정신이 없던 나머지 미처 그쪽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는데, 한령에게서는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아무래도.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