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25화 (625/862)

25화. 무왕(武王) (19)

쾅, 콰콰쾅!

격진이 일어날 때마다 대지가 들썩였다. 폭발 소리가 귓가를 때리고, 시커먼 화염 등이 눈가를 어지럽게 만들지만.

“하아…… 하아…… 하아……!”

에도라는 신마도에 겨우 의지한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 바빴다.

일족 내에서도 손꼽히는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 대해와 같은 내공을 지니고 있다지만.

그리고 영매의 자질을 통해 타고난 선천지기(先天之氣)를 이용한 양생술(養生術)로 회복 속도를 돋우고 있다지만, 워낙에 입은 피해가 막대해서 도저히 쉽지가 않았다.

“이것 참, 아무리 덤벼 봤자 안 된다는 걸 잘 알 법한데도 계속 이러시네용. 아무리 신격을 터득했어도, 저도 만만치 않다구용.”

라플라스를 막아서고 있는 건 한령이었다. 아홉 자루의 칼을 바닥에다 꽂은 채로 칼춤을 추는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기까지 했다.

라플라스가 영매와 에도라가 있는 곳으로 오려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으니까. 물론, 마해의 왕이나 되는 녀석을 물리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버티는 것이 고작.

하지만 그마저도.

쩌저저정!

칼자루가 라플라스의 신력과 부딪칠 때마다 수수깡처럼 분질러지면서 위기가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라플라스는 그들과 다르게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아주 여유로웠다. 내지르고, 휘두른다. 한령의 오른팔이 퍼석, 하고 부서지면서 흩어졌다.

‘어머니 ‘눈’만큼은……어떻게든 지켜야 해.’

라플라스와 그 권속들이 이런 혼란을 틈타 뭘 원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눈.

〈심안(心眼)〉을 가져가려는 게 분명했다.

에도라처럼 영매의 자질을 타고난 아이들은 오랜 수고와 노력 끝에 〈혜안(慧眼)〉을 열 수 있다. 혜안은 편견과 망집을 해체하고, 그 속에 있는 진리를 통찰할 수 있게 만드는 눈. 그 뿌리는 이데아에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혜안은 어디까지나 차기 영매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 중 한 가지일 뿐. 이것이 제대로 개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을 더 필요로 했다.

바로 영접(靈接)이었다.

영매는 외뿔부족의 시조이자 수호신인 소호 금천의 뜻을 일족에게 중개하고 설파하는 무녀(巫女), 즉, 제사장일지니.

영접이라는 고유한 방식을 통해 소호 금천과 ‘접촉’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접촉이 나아가 소호 금천을 대변할 수 있게 되면, 영접은 저절로 신접(神接)으로 승화하게 된다. 되도록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소호 금천을 대리하여 그의 권능을 펼쳐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혜안은 심안으로 거듭나게 되니. 소호 금천의 가호를 통해서 이데아를 관찰하고, 이를 통해 세상 구석구석에 시선을 닿게 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미래시(未來視)까지 가능케 했다.

달리 괜히 영안(靈眼)이나 신안(神眼)이라는 이칭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니었다.

외뿔부족이 지난 수천 년 동안, 초월종으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탑 내에서 최강의 종족이라며 위명을 떨칠 수 있게 된 이유였다.

물론, 신접을 비롯해 심안까지 여는 게 결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외뿔부족의 긴 역사 동안 영매가 있었던 시기보다 없었던 시기가 훨씬 많았으며, 있었다 하여도 그 기간이 짧았던 경우가 왕왕 있었다.

다만, 이번 대의 영매는 달랐다.

무왕이 왕좌에 앉는 것과 거의 비슷한 무렵에 탄생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뿔부족은 대장로가 핏빛 현자로 있을 시절에 닦은 기반을 더 크게 일굴 수 있었다.

손꼽히는 무력을 가진 부족장과 세계에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제사장. 이 두 명이서 일족을 이끌진대 어찌 흔들릴 수 있을까?

더군다나 후계도 탄탄했다.

대장로의 무공, 혈뢰를 이으면서 이미 무력적으로 소싯적의 무왕과 견줄 만하다고 평가받는 판트.

이미 영접을 넘어 신접까지 다다른 에도라.

일족의 부흥에 대해서 더 이상 걱정할 게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눈’을, 심안을 가져가겠노라고 나타난 존재가 있었다.

라플라스.

한때, 최고 관리자였으며, 지금은 플레이어라는 말도 안 되는 직위를 가진…… 신격.

녀석이 어떻게 심안을 가져가겠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방금 전의 습격으로 소호 금천과의 채널링은 모두 임시 폐쇄된 상태. 결계가 전부 망가진 것은 물론, 영소까지 거의 반파되었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영매가 소호 금천의 어여쁨을 받는 자리라고는 하나, 쉬지 않고 권능을 발휘하면서 세상을 관조하는 게 쉬울 리 만무한 일.

그래서 영매는 항시 성역, 영소를 떠나는 법이 거의 없었다. 연우가 지난 시간 동안 외뿔부족의 마을을 쉴 새 없이 들락날락하며 영매와 친분을 다졌어도, 실상 얼굴을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영매는 영소가 망가졌을 때부터 큰 충격을 받은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고.

에도라는 그런 어머니를 어떻게든 지키고자 했지만, 아직 심안이 되지 못한 혜안만으로 라플라스를 막는 데는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어떻게든……!’

그래도 에도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곧 왕위 쟁탈이 끝날 것이라고.

제아무리 페이스리스가 꼼수를 부렸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아버지를 꺾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조금만 더 이대로 버틴다면 아버지가 놈들을 무찌르고, 어머니를 구하러 올 것이라고 말이다. 그 속에는 연우도 있을 테지.

그래서 에도라는 〈양도〉를 발휘할 수 있을 기회를 엿보았다. 한령이 시간을 끌어 준 덕분에 회복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조금만 더 기력을 되찾는다면 라플라스에게 한칼 정도는 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도 ……라야.”

에도라는 호흡을 고르다 말고, 갑자기 흐느끼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고개를 그쪽으로 홱 하고 돌렸다.

‘눈’이 너무 아픈 나머지, 눈가를 가리고 있던 영매의 손 틈 사이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순간, 에도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아무 말도 듣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어쩐지 뒷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위기감이 바짝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떠나셨구나.”

“……!”

영매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동공에 초점이 잡혀 있질 않았다. 마치 먼 곳을 응시하는 느낌. 에도라는 어쩐지 어머니의 ‘눈’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같이 받았다.

“못난 사람 같으니.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었는데…… 마지막으로 그딴 말장난이나 하고.”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

결국 에도라는 운기행공을 중단하고, 영매를 돌아보면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콰아앙!

「컥!」

커다란 폭발 소리와 함께, 한령이 잘게 부서진 채로 튕겨 나 에도라의 앞쪽에 나뒹굴었다.

그는 어떻게든 칼에 의지하면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마저도 너무 쉽게 부러지면서 다시 쓰러져야만 했다. 팔다리의 곳곳이 잘게 부서져 형체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홍홍홍. 그럼 안 돼용. 한령, 당신은 제가 관리자로 있을 때부터 응원했던 플레이어였기도 하고, 은인인 ###의 권속이니 계속 놀아 드리고 있는 겁니당. 하지만 계속 까불면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용.”

라플라스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검지를 까닥였다. 더 이상은 놀아 주기 힘들다는 뜻인 듯했다.

이미 ‘눈’은 코드 해킹을 통해 전부 이쪽으로 이관된 상태. 남은 건 원본 데이터의 완전 삭제였다. 이런 훌륭한 기능을 다른 사람과 공유해서 좋을 건 없지 않은가.

은인이나 다름없는 연우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그건 차후 그에게도 좋은 일일……!

「미안하지만, 계속 더 까불어야겠군.」

라플라스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한령이 던진 비웃음 때문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황급히 몸을 뒤로 내뺐고.

콰르르릉!

그런 그를 노리기 위해 하늘에서부터 검고 붉은 벼락이 잇달아 강렬하게 떨어졌다.

콰콰쾅!

쿠쿠쿠-

“……이런. 잘못하다가 제가 큰일 날 뻔했군용.”

라플라스는 자신이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 초토화된 것을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뺨 위로 흐르는 식은땀이며 경직된 표정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쐐애애액-

그런 라플라스를 사냥하기 위해, 별안간 옆쪽의 공간으로 공허가 활짝 열렸다. 연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타나 비그리드를 매섭게 휘두르고 있었다. 이미 합일을 이룬 덕분에 검뢰는 아주 강렬했다.

콰콰콰콰-

라플라스는 ‘호이짜!’ 하고 외치면서 뒤로 멀찍이 떨어지면서도, 권능을 잇달아 발동시켰다. 곳곳에 뿌려 둔 신력이 작동했다. 공간이 어지러워지면서 갖가지 기괴한 존재들이 출현하거나, 촉수 따위가 다발로 쏟아졌다.

플레이어면서도, 타계의 신으로부터 비롯된 마해의 왕이기 때문에 발현된 권능이었다. 심상 개변을 따라 물리적 법칙이 제멋대로 틀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런 것들을 잇달아 쏟아 낸다고 해도,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고.

연우는 어느새 라플라스의 앞까지 다다라 검뢰를 쏟아 내고 있었다.

육극(六極)!

콰르르릉!

스걱-

압도적인 힘이 발현되면서, 비그리드는 순식간에 라플라스의 목을 자르고 지나갔다.

토끼 귀를 달고 있는 구릿빛 스킨헤드가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몸통은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고, 머리통은 팽이처럼 뱅그르르 돌더니 저만치 높은 상공에서 정지했다.

그리고.

화아악!

라플라스의 머리통 뒤쪽으로, 하늘을 따라 기다란 사선이 그어지더니 좌우로 활짝 열리면서 거대한 크기의 공허가 나타났다.

아니, 거긴 단순한 공허라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그보다 더 깊은 곳. 수도 없이 많은 영혼들이 별빛처럼 반짝이면서 강을 이루며 흐르는 것이 보였다.

연우도 오래전에 가 본 적이 있던 곳.

심연(Abyss).

그 속에서 도저히 크기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용종이…… 어쩌면 그 크기가 행성급 규모였던 기어 다니는 혼돈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 같은 마지막 용이 얼굴의 일부를 드러냈다.

『이미 기존의 목적은 이뤘으니, 장난은 거기까지 하는 게 어떨까요, 라플라스?』

목소리는 시의 바다의 수장, 하르모니아의 것이었다.

그녀가 내뿜는 존재감은 이루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대지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거기에 완전히 압도되어 쭈뼛 굳고 말았다.

자칫 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을 정도의 격이었지만, 다행히 그들은 곧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연우가 어느새 똑같이 격을 발산해 하르모니아의 기세를 몰아내어 그들을 지킨 것이다.

“아쉽네용. 오랜만에 은인도 만나고, ‘눈’의 쓰임새도 더 좀 알아보고 싶었는데 말이죵.”

라플라스는 몸통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태연하게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하르모니아는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손을, 아니, 정확하게는 손톱을 뻗어 라플라스의 머리통을 끌어왔다.

동시에 공허가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아들아.』

“예. 걱정 마십시오. 만용은 부리지 않겠습니다.”

크로노스의 걱정스러운 부름에,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공허 속으로 사라지려는 하르모니아와 라플라스를 쫓으려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들의 원흉이 시의 바다란 사실이 이로써 확실해졌으니, 마해나 관리국이 저들과 어떤 방식으로 커넥션이 되어 있는지를 확인해야 옳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연우는 화가 치밀어 올라도, 일단은 싸움을 계속 벌여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무왕이 소멸하고, 영매가 큰 부상을 입었다. 외뿔부족으로서는 누란의 위기였으니 어떻게든 수습해야만 했다. 거기다 주신과 창조신들의 갑작스러운 이탈하며, 올포원의 알 수 없는 행동 등…… 연우는 연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시의 바다와 연결되어 있을 거란 직감을 강하게 받았다.

모든 것의 흑막이며.

최종적으로 부딪칠 적.

연우는 시의 바다를 그렇게 규정했다.

『날이 갈수록 그릇으로서, 후예로서, 아주 합당하게 발전하는군요. 좋은 자세에요.』

쿠쿠쿠-

하르모니아는 그런 연우의 생각을 읽고, 기특하다는 듯이 살짝 눈가에 곡선을 그렸다. 그렇게 공허가 완전히 닫히려던 그때.

“……엄마!”

여태껏 뒤로 빠져 있던 아난타가 다급하게 뛰어와 소리를 질렀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달리 너무 큰 모습이라지만, 기질은 절대 모를 수가 없었다. 여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가 저곳에 있단 사실에 크게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하르모니아는 놀란 기색도 없이, 원래부터 아난타가 그곳에 있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잘 자라 주었구나. 다행이야.』

그 말을 끝으로.

쿵!

문이 닫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공허가 완전히 닫혔다.

아난타는 힘을 잃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느새 나타난 차정우의 사념체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이젠 바로 무엇부터 할 생각이냐?』

크로노스는 그런 광경을 씁쓸하게 바라보다, 연우에게 물었다. 모든 것이 복잡하게 헝클어진 이때, 우선순위를 빠르게 판단해야만 했다.

“장례식을 해야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진혼제(鎭魂祭)를 지낼 겁니다.”

『어떻게?』

“우리에게 반기를 든 놈들부터 응징할 겁니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감히, 우리에게 덤빌 생각도 할 수 없게끔, 공포를 아로새길 겁니다.”

그날.

천계의 올림포스에는 최고 명령이 하달되었다.

『아테나, 지금부터 아스가르드를 침공한다. 그 성역에 있는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짓밟고, 투항하는 것들도 전부 구축하라. 다시는 아스가르드라는 이름이 바로 설 수 없게,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라. 놈들에게 동조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들까지도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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