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권
1화. 진혼제 (1)
『빌어먹을……! 어찌 필멸자 따위에게 이딴 수모를 겪는단 말인가!』
토르는 분개한 외침을 터뜨리고 말았다.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울화 때문에 도저히 냉정을 되찾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연우와 무왕. 두 사제지간에게 당한 오욕은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왔던 그로서도 가장 최악이었다.
반신(半神)도 되지 못한 존재들에게 이깟 수모라니.
그것도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 신의 사회 전체가 그런 결과를 맞은 게 아니었나……!
더구나 그 뒤에 벌어진 후폭풍도 적잖았다.
[신의 사회, ‘천교’가 화전 양면을 펼친 ‘아스가르드’에 신의가 없노라고 비난합니다!]
[신의 사회, ‘데바’가 ‘아스가르드’에 대한 평가를 하향 조정합니다.]
[신의 사회, ‘딜문’이 과거에 빼앗긴 영역을 수복하는 것에 대한 논의에 착수합니다.]
……
[악마의 사회, ‘니플헤임’이 ‘아스가르드’와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아스가르드’를 대규모 사회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
[비마질다라가 상대할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라며 일축합니다.]
[케르눈노스가 ‘아스가르드’에 대한 존재를 잊고자 합니다.]
[동맹군이 협상을 파기한 ‘아스가르드’에 죄를 묻고자 합니다!]
대표적으로 천계 내에서 차지하던 아스가르드의 위상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치고 있었다.
심지어 평상시에는 그들로서도 별반 신경을 쓰지 않던 약소 사회들도 아스가르드의 전력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거나, 심지어 그들에게 종주권을 내어 주었던 산하 사회에서도 신뢰가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딜문과 같이 과거에 충돌이 있었던 곳들은 새롭게 날을 세우기도 하고, 적대 세력인 니플헤임은 아스가르드를 압박할 만한 수단을 전방위로 물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위상을 올리긴 어려워도, 떨어뜨리긴 아주 쉬운 법이니.
이미 아스가르드에 대한 평가는 ‘신뢰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머저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특히 토르의 화를 더 부채질하는 것은.
[신의 사회, ‘말라흐’가 이번 사건에 대한 입장 표명을 유보합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아스가르드’가 보인 무례한 행태에 불쾌한 심정을 표출하며 어떠한 성명도 발표하지 않습니다.]
절대선과 절대악을 대표한다는 양 진영의 주축들이 그들에 대해 아무 의견도 내비치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은 항상 사회 간에 갈등이나 분쟁이 벌어지면, 중재를 빌미로 개입을 시도하려는 편이었다.
때로는 내정 간섭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심각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는데.
동맹군과 연합군이 한창 부딪칠 적에도 어떻게든 숟가락을 얹으려 했던 곳이, 지금만큼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저들에게 명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 아스가르드는 올림포스가 저쪽으로 완전히 넘어간 후, 더 이상 전쟁을 벌여 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의 도움으로 동맹군과 휴전 협상을 벌이고 있던 중이었고.
그러면서 뒤로는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시의 바다 쪽과 손을 잡아, 연우의 친지들을 인질로 잡으려는 시도를 했다.
천교가 화전 양면(和戰兩面)이라며 길길이 날뛰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시도가 실패했다는 점이었으니.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은 자신들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한 나머지 모든 협상 중재에서 손을 떼 버리며, 아스가르드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스가르드를 도와줄 만한 존재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한 번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토르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저들이 동맹군의 눈치를 보면서 생긴 일이고, 연우라는 존재로 인해 빚어진 사건이었다.
그가 보기에 천계는 모두 등신들의 집합소였다. 어찌 필멸자에게 이딴 수모를 겪고도 분개하기는커녕, 다들 꼬리를 흔들 생각만 해 대고 있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오딘, 당신은 대체 어디로 간 거요?』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더 강한 존재가 나타나 적들을 무찌르고, 강렬한 카리스마로 흔들리는 내부를 다잡아야 하는 것이건만.
그런 일들을 해내야 할 그들의 주신은 어디론가 실종되어 여태 나타나질 않고 있었다.
『아니지. 이건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기회이기도 한 셈이 아닌가?』
그러다 토르는 도중에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때로 위기는 기회를 낳기도 한 법.
아스가르드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이때, 이런 난관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다면? 흔들리는 아스가르드를 다잡아 새로운 주신으로서의 면모를 보일 수 있다면? 그런다면 새로운 신화도 써 내려갈 수 있을 테니, 이는 새로운 왕의 탄생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그래. 나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이인자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으니……!』
토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오딘은 주신으로서의 사명을 내팽개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그렇다면 이렇게 된 이상, 아스가르드는 새로운 왕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왕좌에 자신만큼 어울리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뭘 해야 될까? 토르는 우선 내부 분열부터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맹군이 선전 포고를 할 수도 있을 테지만.
『흥. 그깟 전쟁 따위, 적당히 영역을 몇 개씩 할당해 주면 곧 다시 잠잠해지겠지.』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이 아무리 아스가르드에 불만이 있다고 해도, 저들은 진영 간의 균형이 흐트러지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
균형이 어긋나는 순간, 즉시 천계가 화약고처럼 터져 나갈 것을 잘 아는 데다가, 그들은 올포원에 대적하기 위해 천계의 여론을 하나로 모으고 있던 중이니 어떻게든 수습하려 들 게 뻔했다.
그런다면 아스가르드는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의 보호를 받으면서, 동맹군의 화를 달래 줄 겸 쓰지도 않는 영역 몇 개를 던져 주면 그만이었다.
빼앗긴 것이야 추후에 내부를 정비하고 난 뒤에 다시 되찾으면 그만. 잠시 저들에게 맡겨 두었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토르는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연우에 대한 분개는 남아 있었지만, 이럴 때 천교와 절교가 자주 써먹는 고사성어가 있지 않던가.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늦지 않는다. 토르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의 치욕 따위는 얼마든지 나중에 앙갚음할 기회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럼 우선 패널티로 시름에 잠겨 있을 이들부터 달래러 가야겠군.』
토르는 생각을 마무리하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신이 강제로 종료되면서 생긴 패널티는 상당하다. 자신도 아직 격이 흔들리고 있을진대, 다른 신격들은 오죽할까. 우선 저들의 성난 인심부터 달래야 할 듯싶었다.
그런데.
‘잠깐.’
토르가 대신전을 벗어나려다 말고, 문득 든 생각에 걸음에 뚝 하고 멈추었다.
‘올림포스는……? 왜 여태 아무 반응이 없는 거지?’
여러 사회들의 반응을 담은 메시지는 지금도 계속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연우를 주신으로 받들기로 한 머저리들, 올림포스는 보이질 않았다.
순간, 토르의 등골을 따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오소소 솟아오르고.
[올림포스의 국시(國是)가 ‘아스가르드 섬멸’로 변경되었습니다!]
마치 그런 그의 불안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올림포스의 메시지가 곧장 떠올랐다.
국시.
사회의 이념과 방침이, 저렇게나 노골적으로 바뀌었다고?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천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들에게 국시를 공표합니다!]
[국시에 반대하거나 우려를 표하는 모든 의견을 무시할 것이라 발표합니다.]
[지금부터 펼쳐질 전면전에 어느 누구의 개입도 허락지 않으며, 만약 아스가르드를 두둔하거나 도우려 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곳도 적으로 간주할 것을 선언합니다.]
……
[‘올림포스’가 ‘아스가르드’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동맹군, ‘천교’가 지지 의사를 밝혔습니다!]
[동맹군, ‘니플헤임’이 지지 의사를 밝혔습니다!]
[동맹군, ‘동마왕군’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동맹군의 의결에 따라, 지원병의 파병이 결정됩니다.]
……
[신의 사회, ‘말라흐’가 이번 사태에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공표합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이번 전쟁에 자신들은 전혀 무관함을 주장합니다.]
『……!』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딱 하나.
버려졌다.
올림포스와 동맹군의 반발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데다가, 응당 나설 줄 알았던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도 그들을 버리려 하고 있었으니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다른 신격들을 보러 가려는 순간.
콰아아앙!
아스가르드를 둘러싼 대성역이 큰 폭발과 함께 흔들렸다.
[‘올림포스’가 대성역, ‘이그드라실의 세 번째 나뭇가지’를 침입해 왔습니다!]
* * *
[‘말라흐’의 서기장, 메타트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우리는 이번 일에 대해 일절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섬멸’과 같은 빅 이벤트는 지양하는 것이 맞을 터이나, 이번 일과 같은 일을 아무 처벌도 없이 그냥 내버려 둔다면 본 사회의 권위를 앞으로 의심하는 이들이 적잖게 있을 터. 이를 막기 위한 희생이라 규정하였다.]
[메타트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하였습니다.]
[메시지: 그러니 선전 포고를 한 대로 일을 치르되, 부디 불길이 다른 곳으로 튀지 않게 주의했으면 하는 당부를 남길 뿐이니.]
[‘르 인페르날’의 수좌, 바알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신의 진영을 지탱하는 거대 기둥 중 하나를 부러뜨리는 데 우리가 반대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이는 새로운 갈등을 일굴 위험이 있으니, 크게 확대시키지는 말 것을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아가레스는…… 하아! 그 빌어먹을 머저리는 어떻게든 잘 데리고 있어 주었으면 한다. 이건 개인적인 부탁이다.]
메타트론과 바알.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을 지휘한다는 두 수장들은 연우가 전쟁을 개시하자마자 곧장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그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단, 전쟁의 국면이 다른 곳으로 확전될 양상을 보이는 건 용납지 못한다. 이런 내용이었다.
아스가르드야 그들도 축출하는 것이 이득이라 판단하였으니 내린 결정이었고, 확전은 그렇지 않아도 나날이 강해지는 연우의 영향력을 어떻게든 한정 짓겠다는 의도였다.
연우로서도 이번 섬멸전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복수였으므로, 다른 것을 노리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사족을 달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지원병을 파병하겠다고 발표한 천교와 니플헤임의 결정에 고마워하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천교는 옥황상제의 실종으로 인해 한창 정신이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발 벗고 나선 것이니 더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아테나를 위시한 올림포스 군은 아스가르드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다.
목적은 섬멸(蹟滅).
과거 우라노스가 펼쳤던 전쟁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당시에는 병탄을 통한 세력 확장이었다지만, 지금은 아스가르드 중 어느 누구도 살려둘 생각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이것으로 무왕이 되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그에게 재미난 여흥거리는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무왕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 * *
화르륵!
외뿔부족의 상징은 불. 그들의 시조인 소호 금천이 태양신이었던 까닭에 붉은 불은 영혼을 정화하고, 혼탁한 세상을 맑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이렇게 해야만 화장(火葬)된 존재의 영혼이 소호 금천의 곁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도 했다.
마을의 정중앙에 피어오른 불길은 사흘 밤낮이 되도록 이어졌고.
부족원들의 통곡과 오열, 그리고 뒤따른 침묵도 내내 있었다.
그리고.
연우는 소싯적에 무왕이 깨달음을 위해 들어갔다던 동굴에 들어가, 외부 세상과의 소통을 일절 단절하고 폐관 수련을 시작했다.
무왕이 남긴 유산들을 전부 체득하고.
음검을 깨우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