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27화 (627/862)

2화. 진혼제 (2)

연우가 처음 폐관 수련에 들어가기 직전, 영매는 그를 따로 불렀다.

영소(靈沼)에 위치한 모옥이었다.

전통적으로 영매와 그녀의 후계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든 입장이 불허된다는 곳.

시조 소호 금전을 상징하는 태양조(太陽鳥)가 내려앉은 솟대가 유달리 인상적인 그곳에서, 영매는 에도라에 의지한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지?”

에도라의 도움으로 상반신을 일으킨 영매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떴다.

그녀와는 언제나 어기전성으로만 대화를 나눴던 까닭에, 연우는 영매의 목소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게 들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그러면서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중후한 내력이 있어 사람의 의식을 저절로 홀리게 만드는 마력이 담겨 있었다.

영매는 눈가를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장례식이 한창 치러지는 동안, 그녀는 영소에서 기력을 북돋고 있던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제사장인 그녀가 직접 장례식을 주관하고, 소호 금천에게 그의 품으로 회귀한 존재의 영혼에 안식을 달라고 제사를 지내야만 옳았지만.

라플라스의 습격으로 인해 크게 다친 까닭에 도저히 그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필요한 절차는 에도라가 거의 다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영매는 눈을 가리고 있는 상태이면서도 엷게 웃고 있었다. 마치 연우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고 있다는 듯이.

듣기로 원래 영매는 선천적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청람가에서도 오랜만에 신기를 타고 난 아이가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장애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매로서의 수련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매는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장애를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선천적으로 앞을 볼 수 없으니, 오히려 속세의 편집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고.

그 너머에 있는 진리를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심안을 곧바로 터득하면서, 역대 영매들 중에서도 가장 신기가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최연소로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무왕도 바로 그런 열성적인 모습에 반해 청혼을 했다던가?

왕좌에 앉은 순간, 50여 개나 되는 가문의 영애들과 혼인을 맺고 자식을 낳아야만 한다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존재는 영매가 유일했으니.

그녀도 무왕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에 있는 모습에 반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동안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결실이었던 판트와 에도라가 여러 형제들 중에서도 단연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지금도 마찬가지.

연우는 분명히 영매의 눈을 보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평상시라면 아주 불쾌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영매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너무 따스하기 때문일까.

오래전에 잊었던 시선을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

어쩐지 가슴 한편이 저며 왔다.

연우는 그런 마음을 꾹 억누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두 번째입니다.”

첫 대면이 아니라는 소리. 영매의 표정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호호! 내 기억에는 없는데. 언제였담?”

하지만 연우는 대답 없이 엷게 웃었고.

영매도 뒤늦게 연우의 말뜻을 깨닫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얄궂구나.”

연우가 라플라스 때문에 위기에 빠진 그녀를 구하러 왔을 때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함부로 언급할 수 있는 사안이 절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도 어느 정도 상처를 회복한 듯 보였기 때문에 장난치듯이 던진 것이다.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쉽게 하기 힘든 장난일 테지만. 연우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으로 영매와의 심리적 거리를 단숨에 확 좁힌 셈이었다.

“이런 면을 보면, 제 스승을 너무 똑 닮았단 말이지. 겉보기엔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는데 말이야.”

연우는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다. 사실 그이는 녹턴이 자신과 가장 닮았다고 했지만, 내가 봤을 때는 전혀 아니야. 가장 닮은 건 너지.”

영매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자, 옆에서 가만히 그녀를 부축하던 에도라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가슴이 살짝 울렁였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건 제가 기분이 나쁩니다.”

“뭐? 호호호! 과부를 앞에다 두고 이렇게 대놓고 욕을 해도 되는 거니?”

“사실 영매님도 아시잖습…….”

“사모(師母, 스승의 부인)라고 부르렴.”

“……사모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스승님의 성격을요. 아마 제가 제일 많이 당했을 겁니다.”

“호호호! 그이가 인성이 참 그렇긴 했지.”

그런 무왕을 확 휘어잡고 살았던 것이 영매이기도 하니, 사실 연우의 눈에는 그녀가 더 대단해 보였지만.

굳이 그걸 언급하지는 않았다.

“참 재미나.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참 유쾌하단 말이지.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것은 제 잘난 맛에 사는 까닭에 이야기를 나눠 봤자 재수만 없고, 그나마 딸이 좀 낫긴 하다지만 매번 말도 안 듣고 예민하게만 굴어서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너는 그런 게 없어.”

영매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 짙어졌다.

“혹시 여기 들어와서 살 생각은 없니? 데릴사위도 우리는 환영인데 말이지.”

“그건 저희 아버지께서 반대하실 것 같아서 안 될 것 같습니다.”

웅, 우우웅!

연우의 등에 걸려 있던 비그리드가 호응하듯이 잘게 떨렸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래도 사위가 되라는 말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구나.”

“어머니.”

에도라는 살짝 얼굴이 붉어진 채로 그만하라며 영매의 팔뚝을 살짝 꼬집었다.

그럴수록 영매는 더욱 놀리기 바빴지만.

“이것 보렴. 제 엄마가 자기 부끄러운 말 했다고 이렇게 하는 딸이 또 어딨담?”

결국 에도라는 샐쭉하니 입술을 내밀고 말았다.

연우는 그런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기력을 찾지 못하고 내내 식음을 전폐했다는 말을 들어 걱정이 많았는데,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을 듯싶었던 것이다.

그만큼 에도라가 옆에서 그녀를 잘 챙겨 주었단 뜻이겠지.

“여하튼 가벼운 잡담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기로 하고.”

영매는 따스한 목소리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내가 자네를 이리로 부른 것은 줄 게 있어서야.”

“……?”

줄 게 있다고?

연우는 무엇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영매가 슬그머니 내미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것은 열쇠였다.

통짜로 된 금을 일일이 세공하여 만든 손바닥만 한 크기의 열쇠.

“이, 이건……?”

“호호. 역시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어떤 용도인지 단번에 알아맞히는구나. 맞다. 금급 무서고의 열쇠란다.”

“……!”

외뿔부족의 무서고(武書庫)는 금, 은, 동, 철급의 단계로 이뤄지며, 그중에 연우는 동급과 철급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탄생했던 것이 천익기공이었고, 이후 천익기공은 아트만 시스템으로 변해 그의 육체를 단단히 받쳐 주는 기반이 되었다.

그런 무서고를, 그것도 대대로 왕과 그의 허락을 맡은 이가 아니면 아무도 입장할 수 없었던 곳을 들어가게 해 주겠다고?

“현재 왕좌는 공석이고, 나는 그 권한을 대리하고 있는 중이란다. 당연히 너에게 이곳을 내어 줄 자격은 충분하지.”

영매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했지만, 어느새 깊게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이의 소망은 네가 일족의 지난 비원을 해결해 주는 것이었지. 알다시피 〈양도〉는 이미 에도라에 의해 비밀이 풀렸고, 이번에 신접을 겪으면서 그 이상으로 개척하는 데 성공했단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걸로는 부족했지.”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에도라는 양도를 발휘하여 영매를 라플라스로부터 지키는 것은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해내지 못했다.

무왕이 기대를 걸던 태극혜 반고검의 잠재력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그건 다른 반쪽인 〈음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란다. 양도와 음검은 따로 존재할 때에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어. 하나로 합쳐져야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테니…… 그때야 시스템이 주는 저주를 꺾을 수 있겠지.”

“…….”

“그리고 알다시피 우리는 음검의 완성을 더 이상 미룰 수가 형편이야. 우리 일족은 원한을 절대 잊지 않아. 너를 쫓아 그이의 복수를 하려 들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비원을 해결해야만 해.”

영매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여는 게, 가능하겠니?”

연우는 아주 잠깐 대답하지 않고 고민했다.

무왕이 녹턴을 상대로 보였던 마지막 모습들이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바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동작 하나하나, 호흡 하나하나, 묘리 하나하나까지, 전부.

무왕이 보였던 신위를 전부 따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 할 수 없다면 쫓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았고.

거기에 자신을 대치시켜 보았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추구할 것들 전부에 무왕의 손길이 묻어 있다는 것을.

그가 앞으로 걸을 길 곳곳에 무왕의 숨결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연우는 무왕이 영매를 보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불멸(不滅).

“스승님의 업이 저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필멸이라던 그 점괘가 틀렸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Yes or No와 같은 대답도 있을 테지만.

그런 것보단 이런 대답이 더 나을 듯싶었다.

그리고.

그제야 진지하던 영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고맙구나.”

* * *

그리고 다시 시간은 수련동으로 되돌아온다.

‘스승님의 업을…… 아니, 신화를 내가 잇는다.’

무왕의 족적은 이미 저만치 앞서 나아가 찍혀 있다.

연우는 바로 거기서부터 새로운 족적을 찍는 것이다.

혹 무왕이 힘겹게 밟은 길을 전혀 다른 곳으로 트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연우는 그 무게를 스스로 짊어질 생각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무왕의 유지였으니까.

이미 무서고는 다녀온 상태.

외뿔부족이 지난 역사 동안 수집하고 창안한 절대 비급과 신공 절학들이 전부 연우의 머릿속에 담겨 있었다.

이것들을 토대로 무왕이 남긴 것들을 낱낱이 해체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맞게끔 고치며, 온통 베일에만 둘러싸여 있는 음검을 해석해야만 했다.

아니, 해석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음검이 여태 나에게 열리지 않았던 건, 어쩌면 나와도 잘 맞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양도가 오랜 궁구 끝에 외뿔부족에 열린 것은 그들이 태양지체를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음검은 그래서 열리지 않았다.

연우도 마찬가지. 음검과 가깝지 않기 때문에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다면 거기에 맞춰서 체질을 바꾸든가, 음검을 변형시켜야만 한다.

이미 영혼을 완숙의 경지에까지 올린 연우가 체질을 바꾼다는 건, 근본부터 전부 뒤집는다는 뜻이라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었지만.

그래도 그래야만 음검을 열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볼 생각이었다.

설사 그로 인해 여태 쌓은 것들을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다시 수복하고 쌓아 올리면 그만이다. 이미 한 번 밟았던 길을 두 번이라고 못 밟을까.’

[시차 괴리]

한껏 느려진 의식 세계 속에서.

연우의 두 눈 위로 귀광(鬼光)이 떠올랐다.

* * *

‘양(陽)은 퍼지고 오르는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에 심안을 통해 세상을 넓게 관조하려는 에도라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정신세계를 자연 세계로 확장시켜 동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른다.

‘반면에 음(陰)은 뭉치고 가라앉으니, 기를 발산하는 외뿔에게 맞지 않다. 반대로 뒤집어서, 넓은 바깥세상을 안으로 축소시켜야 해. 도리어 자연 세계를 정신세계 안에 담아야 한다.’

속절없이.

얼마나 많이 흘렀는지는 본인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스승님이 남기신 팔극검은 태극혜 반고검으로 가깝게 다가갈 수는 있어도, 절대 이것으로 깨우칠 수는 없다. 음양을 해석하기 위해 만든 팔극(人極)의 비기가 도리어 어느 수준부터는 성질에 한계를 규정하기 때문이야. 이것을 해체해야만 해. 팔극이 아니라, 기본의 성질대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이때 해체하는 것은 팔극검만이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뒤따라야 해. 스킬도, 권능도, 신위도…… 자아까지도, 전부.’

더 깊게.

‘모든 것을 해체하여 가라앉히고, 음으로 치환하여 새로 뭉치게 한다. 음은 넓게 퍼진 것을 한곳으로 모으게 할 테니.’

아무도 닿지 못할 만큼 아주 깊은 곳으로.

[권능, ‘명토 선포’가 삭제되었습니다.]

[권능, ‘연옥로’가 삭제되었습니다.]

[권능, ‘그림자 영역’이 삭제되었습니다.]

……

[권능, ‘아트만 시스템’이 삭제되었습니다.]

……

[신격이 영락하였습니다.]

[신위가 박탈되었습니다.]

[신화가 해체되었습니다.]

……

[해체가 시작됩니다!]

……

[자아가 소멸하였습니다.]

……

[해체된 기운이 잔재 사념의 명령어에 따라 성질 변화를 시도합니다.]

[경고! 성질 변화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 측정할 수 없습니다.]

[경고! 성공 가능성도 현저히 낮습니다. 실패 시 완전한 소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경고! 시스템이 이상 현상을 감지하여 해당 대상을 버그 혹은 이레귤러로 지정하였습니다. 보안 체계가 발동하여 해당 대상을 제거하려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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