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진혼제 (3)
[진행을 선택하였습니다.]
[시스템이 버그로 지정한 해당 대상을 제거하기 위한 백신을 투여합니다.]
[성질 변화가 시작됩니다!]
* * *
“내가 이 자리에 앉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는 자는 지금 어서 나오시오!”
판트는 내공을 한껏 담아 일갈을 내질렀다.
사자후(獅子风).
마치 백수의 왕, 사자가 포효를 내지르듯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투기가 가득했다.
무왕의 장례식은 그가 이룬 업적이며 경지를 기리는 뜻에서 한 달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고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왕좌를 비워 둘 수 없다는 중론에 따라, 왕위 경쟁이 새롭게 개시되었다.
새로운 왕을 뽑는 자리는 원래대로라면 축제와 연회에 가까워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렇질 못했다.
외뿔부족은 위대한 무왕에 대한 슬픔이 가시면서, 그 자리에 분노가 가득 찬 상태. 그들은 전쟁을 개시하려 하고 있었다. 레드 드래곤과 전쟁을 벌일 때와는 전혀 다른, 부족의 명운을 건 복수전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은 새로운 부족장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강하길 간절히 바라였으며, 강렬한 카리스마로 일족을 이끌어 주길 염원했다.
어중이떠중이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강한 지도력과 무력을 동시에 겸비한 존재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판트가 나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아르티야의 멤버이기도 했지만, 그는 그런 걸 전혀 신경 쓰는 투가 아니었다.
이미 필요에 따라서는 아르티야를 탈퇴하고, 일족을 동맹 자격으로 참여시켜도 좋다고 연우로부터 허락을 받은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판트는 왕위 경쟁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먼저 나서서 기세를 떨쳤다.
대지가 울리고, 하늘에서부터는 핏빛 벼락이 쉴 새 없이 내리꽂혔다. 녀석을 따라 퍼지는 돌풍은 왜 그리도 거센지, 거기에 맞서서 과연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덕분에 부족원들은 하나같이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페이스리스가 난리를 칠 때 이미 판트의 무위가 기존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아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지만, 실제로 겪어 보니 짐작했던 것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수없이 많은 실전을 겪었는지, 대장로로부터 얼마나 혹독한 가르침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소싯적의 무왕과 비교해도 절대 크게 뒤지지 않을 거라고 대장로가 말했을 때에는 그저 다들 제자이니 그렇게 말하는 줄로만 알았건만, 절대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었다.
때문에 정작 긴장하게 된 것은 내심 새로운 왕이 되려 마음먹던 왕족들이었다.
무왕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판트의 형제들까지도 대부분 나설 준비를 하고 있던 차에 판트가 먼저 승기를 잡아 버렸으니.
자칫 잘못 덤볐다간 뼈도 추리지 못할 게 뻔했다.
그래서 다들 서로 간에 눈치를 보기 바빴고.
“아무도 없는 것이오?”
콰르르릉, 콰릉, 콰르르!
판트가 짙은 분노와 함께 혈뢰를 아주 크게 떨치는 순간, 마을이 와르르 떨렸다.
순간, 대장로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졌고.
긴장한 얼굴로 눈치를 주고받던 형제들 중 몇 명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나섰다. 여기서 계속 미뤘다간 부족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할 수 있었다.
판트는 그들을 보면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웃었다.
저들에게는 이렇다 할 원한 따윈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옥좌에 앉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보여 주기엔 부족함이 없을 듯했다.
그렇게.
콰르르르!
새로운 왕을 가리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 * *
[백신 프로그램이 해당 대상의 성질 변화를 방해합니다.]
[해당 대상이 방화벽을 설치하여 백신 프로그램의 접근을 차단하고자 합니다.]
[실패합니다.]
[실패합니다.]
……
[방화벽이 파괴됩니다.]
[백신 프로그램이 진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해당 대상의 코드 소스를 추적하여 삭제를 개시하려 합니다.]
[해당 대상이 백신 프로그램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를 작동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코드를 생성하는 중입니다.]
[실패합니다.]
[실패합니다.]
……
[성공하였습니다.]
[생성된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백신 프로그램을 삭제 및 축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방화벽이 새로운 백신 프로그램의 접근을 차단합니다.]
* * *
“아빠, 아빠! 판트 아저씨가 왕이 되었대!”
『그래?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해낸 모양이네.』
차정우의 사념체는 신문을 보다 말고, 문을 활짝 열면서 우다다 달려오는 세샤를 보고는 방긋 웃었다.
그와 아난타, 세샤가 모옥에서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며 체력과 마력을 정비하는 동안, 판트는 이따금 그들 가족을 찾아와 말벗이 되어 주곤 했다.
차정우와 판트, 둘 모두 ‘연우의 인성질에 괴로운 동생들’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던 까닭에 금세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판트는 이따금 차정우 앞에서 자신이 아버지를 이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외쳐 대곤 했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룬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판트 아저씨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왕 아저씨?”
차정우는 그런 딸이 너무 귀여운 나머지 손으로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사념체의 회복 속도는 최근 들어 탄력을 받아 이제 이렇게 물리적인 접촉도 자유로웠다.
『왕저씨라고 부르자꾸나.』
“왕저씨?”
세샤는 별 이상한 호칭도 다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좋아. 헤헤헤! 이제부터 판트 아저씨는 왕저씨야!”
곧 어감이 좋다면서 밝게 웃어 댔다.
차정우는 세샤에게서 저 말을 들었을 때 판트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참 기대가 되었다.
그때, 아난타가 과일이 한가득 든 바구니를 들며 차정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뭐 보는 중이야?”
『바깥세상 이야기.』
“어떻게 되고 있는데?”
『별거 있나. 형이 시킨 대로 잘 돌아가고 있지.』
차정우의 사념체는 보고 있던 신문을 접으면서 탁상에다 아무렇게나 던졌다.
-아르티야, 정복을 선언하다!
아주 노골적인 타이틀을 달고 있는 신문은 이제 탑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8대 클랜의 질서가 결국 종식되고, 아르티야의 세상이 도래했음을 선언한 것이다.
76층에 대한 공략이 끝나고, 화이트 드래곤과 다우드 형제단의 잔당들에 대한 토벌이 전부 끝났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아홉 왕의 자리도 새롭게 재편되고 있었으니.
올포원.
영왕, 차연우
혈검, 칸
폭시 테일, 도일
소무왕(少武王), 판트
마희, 에도라
대주교, 휼
검략가, 레온하르트
달의 아이
아홉 개의 자리 중에서 무려 다섯 개가 아르티야 소속이거나 그들과 관련된 인물로 채워진 것이다.
아난타는 그걸 보면서 기분이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르티야.
차정우가 세웠지만 무너졌던 곳이, 결국 친형의 손에서 다시 깨어나 모든 복수를 마친 셈이었으니까. 이제 사실상 올포원을 제외하면 하계에서 그들을 해코지할 수 있는 작자들은 전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눈을 뜨고 난 뒤에 세상이 크게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접하게 되니 새삼 신기하기만 했다.
『시의 바다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차정우의 사념체는 여전히 그들의 골치를 썩이는 존재를 떠올리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여태까지 벌어진 사건들의 최종 흑막이며, 아난타에게는 애증의 대상이 수장으로 있는 곳.
그들이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엇을 꾸미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든 찾아야만 했다.
『그보다 몸은 좀 어때?』
“멀쩡해. 대장로께서도 회복이 아주 빠르다고 해 주셨고.”
『다행이야.』
아난타가 잠에서 깨어난 뒤, 대장로는 일족의 공동 보고에서 영약을 상당수 빼내어 그녀에게 주었다. 장로원의 재가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빠른 속도로 회복할 수 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전성기 시절의 힘을 거의 다 찾은 상태였다.
『나도 마력이 꽤나 많이 보충되었어. 그럼…… 역시 움직여야겠지?』
차정우의 사념체의 말에 아난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지만, 더 이상 미룰 수는 없겠지.』
폐관 수련에 들어간 연우는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브라함의 소식은 여전히 깜깜무소식이니. 그들로서는 나날이 걱정이 산더미처럼 커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시의 바다를 쫓다가 종적이 사라진 것일 수도 있고.
브라함 역시 본체가 데바의 창조신인 브라흐마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실종된 제우스나 오딘 등처럼 어디론가 끌려간 것일 수도 있다.
물론, 후자는 대개 천마증을 겪었던 이들에게만 빚어진 현상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마음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세샤에게는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노라며 말을 해 뒀고, 따로에 도라에게 맡아 달라고 부탁도 한 상태.
사실 두 사람만 이대로 가기엔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그들 말고도 동행이 한 명 더 있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럼 가자.』
아난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탁상 위에서 째깍째깍 돌아가던 회중시계를 추슬러 품속에다 갈무리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섰을 때.
“준비는, 다 끝났나?”
대장로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핏빛 현자.
한때, 탑의 전설로 불렸던 그가 헤븐윙과 함께 은거를 깨는 순간이었다.
* * *
[성질 변화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가속화됩니다.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현재 변화율은 89, 90, 91%…… 96%입니다.]
……
[성질 변화가 완성되었습니다.]
[최종 완성률: 103.1%]
[음의 기운이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합니다.]
[존재가 구현됩니다.]
연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사실 그로서도 도저히 시간 개념이 좀처럼 잡히질 않았다.
시차 괴리 스킬을 전개하고 있어 사고 속도가 워낙에 빨라졌던 데다가, 나중에는 자아며 의식까지 해체되어 도중에 기억이 뚝 끊겼던 탓이었다.
자칫 존재가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삭제될 수도 있는 위험도 있었지만.
‘그래도 성공했어.’
연우는 자신의 체질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신령(神靈)의 완전한 해체와 재조립.
그 과정에서 불순물이 모두 사라지고, 완전히 음의 성질로 변한 것이다.
이미 영혼이 완숙의 경지였기에 격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지만.
영혼과 육체는 아예 새롭게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올림포스의 신, ‘타나토스’가 찬탄의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멤피스의 신, ‘오시리스’가 당신을 위한 사자의 서를 작성하고자 합니다.]
[천교의 신, ‘태산부군’이 당신을 보며 고개를 숙입니다.]
[에아의 신, ‘네르갈’이 당신이 이룬 영혼을 보며 깊게 탄식합니다.]
[데바의 신, ‘크시티가르바’가 당신에게 부탁을 하고자 합니다.]
……
[니플헤임의 악마, ‘헬’이 붉은 혀로 입술을 적십니다. 기쁜 마음에 몸을 부르르 떱니다.]
[‘아이쉬마- 다이바’가 이제 당신이 명실상부한 칠흑왕의 진정한 후예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
[모든 죽음의 신들이 당신에게 경탄합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들이 당신을 숭배합니다.]
[죽음의 태엽이 완전히 복구되었습니다.]
[죽음의 태엽이 강화되어 천계에 존재하는 모든 죽음의 신위 속에 있던 톱니바퀴들과 맞물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죽음’의 개념이 이제 당신의 손에 잡혔습니다!]
음령(陰靈).
연우는 자신의 영혼을 두고 그렇게 칭했다.
음검을 깨우치기 위해 영혼의 뿌리부터 아예 음의 성질을 띠는 존재로 바꾸었고, 그로 인해 죽음의 신위는 더할 나위 없이 강화되었다.
신위만 두고 본다면 이제 천계에서도 그와 견줄 수 있는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언제나 고고한 태도만 보이던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처음으로 저런 자세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이대로 탈각만 시도한다면, 음령은 완전히 개화되어 ‘죽음’을 개념으로 하는 새로운 개념신이 탄생할 테지.
모든 죽음의 신위들을 발아래에 두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개안을 환영이라도 하듯이.
팟!
[‘그림자 영역’이 자동으로 설정 되었습니다.]
[수석 사도가 임시 강림합니다!]
그림자가 퍼져 나간 자리를 따라, 아테나가 불쑥 내려앉았다.
“올림포스의 주신을 뵙습니다. 휘하 제신(諸神)들을 대신해 성취를 경하드리며, 일전에 분부하신 일에 대한 보고를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아테나는 부복한 채로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분명 연우의 격이 크게 변하거나 한 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를 보고 있으면 영혼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가 느껴졌던 탓이었다.
그를 둘러싼 기질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일견 두려움마저 느껴질 정도라, 그녀는 재빨리 여태 보관하고 있던 머리통 네 개를 꺼냈다.
방금 전에 죽은 듯, 경악에 잔뜩 젖어 있는 생생한 얼굴들.
토르와 헤임달을 비롯한 아스가르드 수장들의 것이었다.
“아스가르드는 이미 완전히 전멸하였으며, 그들이 있던 대성역은 분부하신 대로 죽음의 대지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현재 올림포스를 비롯한 동맹군은 도망친 잔당을 뒤쫓는 한편, 아스가르드의 멸망으로 이쪽에 날을 세우고 있는 이들을 견제하고 있는 중입니다.”
연우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가볍게 털어 토르 등의 머리를 부서뜨렸다. 흩어진 신력들이 전부 아테나에게로 흡수되었다.
화아아!
아테나의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졌다. 토르를 비롯한 아스가르드 주신들의 신력이라면 아주 대단한 것일 텐데도 불구하고, 흡수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 건네준 것이니. 감읍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연우로서는 이미 아스가르드의 멸망 따윈 의심치 않고 있었다. 오히려 아직까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면, 아테나에게 적잖게 실망했을 게 분명했다.
그보다 그에게는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내가 폐관 수련을 시작한 뒤로 얼마나 지났지?”
아테나의 머리가 더 깊게 숙여졌다.
“대략 2년이 흘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