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29화 (629/862)

4화. 시(詩) (1)

“골치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저번에 이낙 녀석이 덤빌 때 때려치울걸. 젠장!”

판트는 어김없이 오늘 아침에도 수북하게 쌓인 서류의 탑을 보면서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분명히 어제도, 엊그제도, 그 전날에도 이만한 양쯤 되는 서류들을 처리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주어지는 서류들은 도통 줄어들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왕이 되면 저절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로서는 날벼락 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분명히 그동안 그가 봐 왔던 왕, 아버지는 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녔던 기억밖에 없었건만.

놀러 가고 싶으면 놀러 가고,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그러면서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한량 생활의 끝판왕.

‘색시가 많은 건 덤이고. 하렘! 이것이야말로 모든 남자들의 로망 아니냐고!’

판트가 왕의 자리를 탐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어머니 영매와 여동생 에도라의 잔소리로부터 탈피하기 위해서.

그런데 정작 왕좌에 앉고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하루 일과가 딱딱 자로 잰 듯이 모두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늦잠 따윈 허락되지 않는다.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죽 한 사발 정도로 식사를 간단히 하고, 6시에 장로 및 주요 간부들과 조회(朝會)를 가지며 갖가지 보고를 듣고, 끝난 뒤에는 조강(朝講)이라고 해서 선왕들의 무공 이론을 탐독하여 연구해야만 한다.

정오부터는 주요 현안을 검토하고, 오후 3시부터는 본격적으로 탑 곳곳에서 빗발치는 서류 등을 검토해야만 한다. 이것을 끝내고 나면 보통 밤 8시는 되어 이때야 비로소 겨우 저녁 식사를 들 수 있고…… 11시가 되면 바로 취침하거나, 시간을 쪼개어 무공 수련을 해야 한다.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이 일일이 정해져 있었다. 식사는 매번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면서 녹색 채소만 줄줄이 나오는 판국이니. 이따금 단백질 섭취를 위해 주어지는 고기는 퍽퍽한 닭 가슴살이나, 소의 우둔살이 전부였다.

어딘가에 얽매이는 것을 죽어도 싫어하는 판트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시간표였다.

이대로 있다간 없던 공황 장애라도 생길 판국이라, 때로는 시위를 해 보기도 했지만.

-그럼 일러바치겠습니다.

-뭘?

-대장로님께요.

-……젠장!

스승님에게 몰아서 일러바친다는 말이 돌아오니 욕지거리밖에 나오질 않았다.

대장로는 언제나 사고만 치고 다니던 무왕에게 실컷 데인 나머지, 이번 대 왕은 단단히 잡고자 했다.

그렇다 보니 판트로서는 늘 쥐여살 수밖에 없었다. 대장로에게 반항할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아직 혈뢰를 극성으로 깨우치지 못했는데 덤비길 어딜 덤빈단 말인가.

아니, 보통 왕이 명령을 내리고 길잡이 역할만 해 주면,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은 아랫사람들이 도맡아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나중에 아버지도 겉보기에만 한량 같았을 뿐, 실제로는 성실한 축에 속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는 저항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사실은 영매가 옆에서 매번 잔소리를 해서 생긴 결과였지만.

그나마 이 짜증 나는 스트레스를 풀 데라고는 간간이 덤비는 경쟁자들을 때려눕히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다들 그의 실력과 권위를 그럭저럭 인정하는 편이라 더 이상 경쟁자도 나타나질 않았다.

하!

판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꼭대기에 있던 서류를 가장 먼저 뽑아 읽기 시작했다.

매번 이 지겨운 자리를 때려치운다고 징징거려도, 정말 그만뒀다간 이제야 겨우 수습되어 가는 일족의 질서가 다시 어지러워질 걸 알기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그때.

초점 풀린 판트의 눈에 이채가 살짝 스치더니.

팟!

판트의 신형이 아래로 움푹 꺼졌다. 갈 곳을 잃은 서류가 나풀나풀 바닥에 떨어지고, 판트는 어느새 자신의 뒤편에 다가와 있던 괴한의 후방을 점하면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파지직, 콰르르릉-

지난 2년 동안 단련해 이제는 8성에 다다른 혈뢰가 거친 천둥을 일으키면서 튀었다. 그 기세 그대로 단숨에 괴한을 휩쓸려는데.

스걱-

무언가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혈뢰가 갑자기 툭 하고 꺼졌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바람이 판트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르륵!

“……!”

판트의 동작이 뚝 멈췄다. 살짝 갈라진 목의 상처를 따라 흐르는 핏물도 핏물이었지만, 어느새 자신 쪽으로 돌아보면서 여유롭게 웃고 있는 괴한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제법이군. 발걸음도 빨라지고. 뇌(雷)의 성질을 경신술에도 접목할 수 있게 된 거냐?”

“형님!”

판트는 ‘으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방금 전 혈뢰가 터졌을 때보다 훨씬 더 컸다.

“이제야 나오신 거유?”

“그래.”

“너무 안 나와서 조만간 수련동을 깨부수고 들어가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었는데! 으하하! 이제야 돌아오시다니. 근데.”

판트는 반가운 마음에 껄껄 웃음을 터뜨리다, 순간 연우를 빠르 게 위아래로 훑었다.

“별반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수? 조금 음울해진 게 전분데?”

폐관 수련을 하고 나오면 막 엄청 달라져 있다거나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물며 이렇게 나왔다는 건 〈음검〉을 깨우쳤다는 뜻일 테고.

판트는 그런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래도 너 하나 때릴 정도는 되지.”

연우는 가볍게 피식 웃었다.

애당초 그는 탈각과 초월을 하지 않는 한, 성장을 이룰 수 없던 차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였던 건, 전부 체질을 바꾸기 위해서였던 것이고.

이제는 수치도 제대로 표기되지 않는 스테이터스 창에도 ‘속성’란은 딱 한 글자만 적혀 있었다.

음(陰).

“흐!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단언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판트는 연우의 대답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2년 동안 달라진 건, 연우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

“그렇지. 혹시 아오? 이제는 이 몸이 드디어 ‘형’이 될 차례일지도!”

그 순간.

팟!

연우가 재빨리 움직이면서 손에 쥐고 있던 비그리드를 휘둘렀고.

까아앙! 판트는 어느새 손날에 맺은 벽천인(勞天刀)으로 비그리드를 가볍게 튕겨 내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절대 막지 못했을 한 수였지만, 지금은 아주 간단했다.

“하하! 말하지 않았수! 이전처럼 호락호락한 내가 아닐……!”

판트는 자신만만하게 내뱉던 말을 도중에 끊어야만 했다. 어느새 눈 깜짝할 새에 새로운 주먹이 눈가로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빠아악!

* * *

아르티야의 일통 이후, 이대로 탑이 붕괴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들썩이던 여론도 어느새 잠잠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적응의 생물이라, 어느새 아르티야의 질서에 순응하고 거기에 맞춰서 지냈던 것이다.

물론, 워낙에 많은 반골이 모인 곳이다 보니, 곳곳에서 아르티야를 타도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긴 했지만, 정작 어느 누구도 그들을 뛰어넘는 기적을 이뤄 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던 중 언제부턴가 랭커들 사이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그동안 멈춰 있던 61층부터의 클리어 랭킹이 바뀌기 시작했다!

각 층계에 기록된 클리어 랭킹은 어디서나 관찰이 가능하다. 그리고 60층까지는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름이 대부분 똑같았다.

###. 비공개 처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아르티야의 수장인 영왕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왜 아직까지도 공개 처리를 하지 않는지를 두고 여러 의문이 나돌기만 할 뿐.

그래도 61층부터는 전혀 없던 랭킹이 새롭게 갱신되었다.

그동안 잠잠하기만 하던 ###이 나타난 것이다.

당연하게도 ###은 1위를 차지했고, 2위와의 점수 차도 도저히 따라잡기가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컸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그게 아니었다.

61층부터 76층까지, 16개 층계의 기록을 갈아 치우는 속도.

그것이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 * *

[이곳은 76층, 십야(十夜)의 관입니다.]

십야.

열 개의 밤이 존재한다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층계답게, 스테이지는 온통 어둠에 젖어 있었다.

그저 하늘에 매달린 달과 총총 박힌 무수히 많은 별 무리가 지상을 비출 뿐.

다만, 달은 여태껏 연우가 지구나 여러 층계에서 보던 것과는 모양새가 아주 많이 달랐다.

아주 컸다.

정말 위성이 맞나 싶을 정도로.

둥근 원형이 전부 보이지 않고, 3할쯤 되는 부분만 지평선에서부터 걸쳐진 형태로 보였던 것이다.

곰보처럼 얼룩덜룩한 표면도 너무 선명하게 잘 보였다. 우주로 나가는 기술만 제대로 구현된다면 곧장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을 듯 보일 정도였으니.

‘저래서는 중력 차가 커서 일반 생명체가 살기 어렵지 않나?’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어차피 온갖 이적과 마법이 빚어지는 세계에서 무엇이 불가능하겠냐는 생각으로 잡념을 지워 냈다.

대신에 별 무리 사이로 유유히 날고 있던 부유성 라퓨타를 찾고 눈을 빛냈다.

위성의 크기에 비하면 반딧불이처럼 너무 작지만, 스테이지에 끼치는 영향력은 그보다 훨씬 큰 곳.

사라진 화이트 드래곤을 대신해 76층을 독차지한 아르티야의 본거지였다.

연우는 하늘 날개를 접으면서 그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마당에는 이미 연우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도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형.”

“잘 지냈나?”

“나야 늘 똑같지.”

도일은 이제 소년티를 거의 벗어던지고, 제법 의젓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목구비도 또렷해지고, 키도 제법 큰 것 같았다.

‘이제는 칸보다 크겠는데?’

칸이 들었다면 화를 냈겠지만.

“시의 바다는?”

“역시 그 정보부터 찾네.”

“그놈들부터 어떻게든 치워야만 하니까.”

연우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무왕은 올포원을 넘어서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연우는 당연히 그것을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의 바다부터 쳐야만 했다.

무왕을 직접적으로 해하고, 영매로부터 ‘눈’을 가져간 놈들이 아닌가. 그 꿍꿍이부터 처치해 둬야만 했다.

거기다 전우주에 걸쳐 아다만틴 노바를 싹 쓸어 간다는 정황부터, 주신들의 실종이며, 마해와의 결탁까지.

‘거기다 탈각과 초월이 그렇게 빈번하게 벌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올포원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도. 시의 바다가 어떤 견제를 했었던 게 분명하다.’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라도.

무왕을 그렇게 만든 놈들을 용서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브라함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브라함을 찾으러 갔다던 정우나 대장로도 언제부턴가 연락이 끊겼다고 하고.’

브라함이 여전히 살아 있는 건 분명했다. 연결 고리가 끊어지지는 않았으니까. 다만, 저쪽에서 접촉을 차단하고 있어서 무슨 일이 있는지를 알 수 없을 뿐. 그래도 이따금 느껴지는 걸 봐서는 억류되어 있거나, 약화가 된 건 아닌 게 분명했다.

연우는 브라함 등이 시의 바다를 쫓아 히든 스테이지같이 외부와 철저히 유리된 곳으로 간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연우와 아르티야도 잠자코 있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일전에 형이 지시했던 거, 어느 정도 결과를 봤어.”

그동안 판트와 칸은 연우의 지시에 따라 2인자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것처럼 외부에 비쳤던 상태.

“판트 형은 그동안 외뿔부족 쪽에 집중하느라 부유성을 비우고 있어서 칸 형이 움직이기가 편했어. 그쪽으로 끄나풀들이 제법 많이 붙었거든.”

연우는 도일이 간략하게 정리한 보고를 건네받았다. 그는 빠르게 내용을 훑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판트에게서도 그동안 차정우와 대장로가 보낸 서찰들을 받아 외워 두었던 상태.

여러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조합되었다가 사라졌다.

“꽤나 많은 인사들이 연루되어 있군.”

“아마 그놈들 중에는 자신들이 엮여 있는지 모르는 치들도 많을걸?”

“조만간에 다 정리해.”

“그렇게 할 참이야. 그리고 그동안 칸 형이 저쪽과 많이 친해져서 마침 그쪽에 집회가 있다는 말에 움직이고 있는 중이야.”

시의 바다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칸은 그동안 그곳으로 합류를 한 척 굴었던 상태였고, 때마침 과실을 따려던 참이었던 모양이었다.

연우의 눈이 빛났다.

“어디냐, 거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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