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시(詩) (2)
[이곳은 66층, ‘세기말 도시의 관’입니다.]
‘여기가 맞나?’
연우는 순간적으로 확 닥쳐오는 황량한 바람에 목깃을 세워 입가를 가렸다.
‘여기는 뭔가를 꾸미기에 그다지 적합하지는 않을 텐데?’
연우로서는 빠르게 공략하기에 바빠 제대로 스테이지를 관찰할 기회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동생이 남긴 일기장을 통해 각 층계의 특색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억 속에 66층은 별다른 특징을 찾기가 어려운 스테이지였다.
세기말 도시.
이곳은 이름처럼 종말을 맞은 도시의 음울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마천루를 이루었을 회색 콘크리트 건물은 대부분 붕괴되거나, 녹색 넝쿨 따위로 감싸져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고.
원래는 잘 닦여 있었을 아스팔트 도로는 관리가 되질 않아 대부분 갈라져 그 틈 사이로 꽃이나 잡초 따위가 자라고 있었다.
사고 난 차량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녹슨 표지판 근처엔 터진 고무 타이어나 쓰레기 따위가 놓여 있었다.
원래는 지하철역이었던 곳으로 짐작되는 지하 통로는 온통 어둠에 젖어 이따금 쥐나 두더지 따위를 토해 내는 중이었다.
‘갖가지 핵전쟁으로 완전히 붕괴되고 만 문명의 잔해…… 아마 그런 설정이었지?’
연우로서는 좀비 따위가 나오는 아포칼립스류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소라 크게 낯설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내전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아프리카나 중동에 가면 볼 수 있는 곳이긴 했다.
다만, 이곳은 그보다 더 극악한 환경이기는 했다.
버림받은 도시이다 보니 사람 따윈 찾아보기도 힘들며, 방사능이나 생체 가스 같은 것들이 남아 생존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지 때문이었다.
물론, 무채독을 지닌 연우에게는 별다른 피해도 주지 못했지만.
여하튼.
무언가를 획책하기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장소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반대로 뒤집으면, 외부의 눈을 피해 비밀 결사 집회를 가지기엔 적합한…… 그런 장소란 뜻이기도 하겠지.’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정우와 아난타도 여기에 온다는 말을 남기고 연락이 끊겼다고 했었지?’
연우는 판트로부터 66층에 대한 단서를 받은 상태였고, 도일에게서도 정보를 받으면 같이 취합해서 결과를 도출해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브라함이 먼저 사라지고, 정우 등이 그 뒤를 쫓아 종적이 끊어졌으며, 이제는 칸이 집회를 위해 움직이는 곳이 모두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곳에 뭔가 있다.
연우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현재.
그는 타인이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 변장을 마친 상태였다.
검은 코트 대신에 집회를 위해 붉은 피풍의(避風衣,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망토)를, 머리는 하얀색으로 염색하고, 얼굴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가면을 썼다.
비그리드도 아공간에 던져 두고, 등에는 길고 짧은 두 자루의 창을 걸어 두었으니 겉보기로 ‘영왕’을 알아보기란 힘들 테지.
기세도 잘 갈무리했으니, 아홉 왕쯤 되는 작자가 아니면 그를 측정해 낼 수도 없을 터였다.
연우는 칸이 움직였다는 곳으로 향했다.
인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하철역.
탑의 시스템으로도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적힌 간판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위태롭게 달려 있었다. 역사(驛舍)로 통하는 지하 계단은 빛 한 점 들지 않았지만, 연우는 대수롭지 않게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빛에 구애를 받는 경지는 뛰어넘은 지 오래였으니, 한참 아래로 내려가다가 벽을 따라 플랫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너무 어두컴컴하고 조용해서 실수로라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장소.
이따금 히든 피스를 찾아 스테이지를 구석구석까지 배회한다는 플레이어들이 있다지만, 그들도 그냥 지나칠 게 분명한 장소였다.
그런데도 연우는 별다른 동요 없이 개찰구를 지나 승강장까지 도착했다. 아래쪽 선로 쪽에 녹이 잔뜩 슨 철길이 보였다. 저 위로 무엇이 지날까 싶었지만.
부아앙!
30분가량을 넘게 기다렸을 때 즈음, 저 멀리서 소름 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선로를 따라 승강장 쪽으로 달려왔다.
『지금 역사 안쪽으로 외선 순환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전선 바깥으로 한 걸음 이상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노이즈가 잔뜩 낀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전기나 마력 장치가 전혀 없어 보이는 곳에서 움직이는 열차. 당연히 평범할 리가 없었다.
연우는 승강장에 멈춘 열차에 올라탔고, 열차는 곧 문이 닫히면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은 아무도 없나?’
연우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열차 안쪽을 조용히 거닐었다. 동생도 일기장에서 발견하지 못한 히든 피스를 찾아낸 셈이었지만, 그렇기에 아무 정보도 없어 바짝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열차는 그 뒤로도 역사가 나타날 때면 정지하고, 문을 열며, 몇 초가 지난 뒤에는 다시 문을 닫고 출발했다. 그러는 내내 아무도 타질 않았다. 누구 하나라도 올라타면 그 뒤를 밟으면 될 텐데. 연우는 아쉬운 마음에 가볍게 혀를 찼다.
연우가 내린 곳은 그가 있던 곳에서부터 20개 정도 떨어진 역이었다.
그곳은 여태 보았던 다른 역사들과는 달랐다.
세기말과 어울리지 않게 갖가지 전광판이 가득해 환하게 안쪽을 비추고 있었다. 플랫폼 바깥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이곳으로 움직이라는 듯 화살표 모양의 전광판이 달려 있었다.
“이름.”
그때, 연우 옆으로 로브를 푹 뒤집어쓴 플레이어가 다가왔다. 어둠에 가려져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아보기 힘든 모습.
연우는 상대가 랭커 급의 인사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중이떠중이가 흘러오면 바로 제거해 버리는 임무를 맡은 문지기인 모양이었다.
“아벨.”
“그런 이름은 못 들었는데?”
“병신 같은 소리를 잘도 하는군.”
연우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면서 왼쪽 소매를 걷어붙였다.
순간,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빛에 부딪혀 왼쪽 팔뚝이 환하게 빛났다. 기괴한 형태를 자랑하는 문신이 형광을 뿌리며 나타났다.
시(詩).
저들이 소속원을 알아보기 위해 찍는다는 인장(印章).
“제 본명을 밝히고 다니는 형제도 있나? 그딴 머저리가 있다면 이쪽에서 먼저 손절을 해 버릴 생각인데.”
연우는 출발하기 직전, 도일이 이미 파악해 뒀던 첩자 한 명을 급습했었다.
아무리 자기 신념이 확고한 작자라 할지라도, 연옥로의 불길을 이용한 고문에는 당해 낼 수가 없는바. 녀석을 통해 ‘시’를 진즉에 왼쪽 팔뚝에 새겨 두었던 것이다.
‘시’는 카피를 방지하기 위해 소속원에 따라 다른 모양을 자랑한다. 그래도 공통적인 특징도 있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보기가 쉬웠다.
이것이라면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겠지.
하지만.
“종말은.”
‘이런. 암구어가 있었나?’
집회에 이런 게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한 연우로서는 잠시 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고.
팟!
순간, 문지기가 움직였다. 팔찌 형태로 손목에 감겨 있던 채찍을 휘두르려던 것이지만.
그보다 먼저 녀석의 그림자가 위로 길쭉하게 치솟으면서 녀석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음령술(陰靈術) - 영기(影氣)]
음령을 이루면서 음의 속성을 띠는 것들은 모두 연우의 의지에 종속되게 되었으니.
그중 하나가 바로 그림자라, 이제는 자신의 그림자만이 아니라 타인의 그림자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보다 약한 존재들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림자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과 연결된 본체도 어느 정도 구속하고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하물며 필멸자들의 그림자 따위야, 그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시 그림자가 완전히 씻겼을 때.
로브 사이로 드러난 녀석의 눈은 흐리멍덩하게 변해 있었다. 그 사이 망량이 체내에 다량으로 주입되면서 영혼이 동면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제 녀석은 연우의 망석중이 인형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귀찮게.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나?’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계속 세워 두고 싶지만, 그래서는 다른 자들에게 들키기 쉬웠다.
가벼운 암시 정도면 되겠지. 연우가 손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녀석의 동공이 다시 초점을 되찾으면서 한 걸음 뒤로 주춤 물러섰다.
“형제여, 어서 오시오. 의심한 것을 사과드리겠소.”
암구어를 댔을 뿐만 아니라, 연우의 신분이 높다는 암시를 무의식에다 깊숙하게 밀어 넣은 것이다.
연우는 소맷자락을 아래로 내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요즘 들어 세상이 워낙에 어수선하다 보니, 여러 이단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어지럽히려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럴 때일수록 같은 형제와 자매라 하여도, 경계에 경계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할 것이오.”
“이해해 주어서 감사하오.”
“위쪽에 형제들은 꽤 모였소?”
“생각보다 많은 형제분들이 부름에 응답을 하신 듯하오.”
“아무래도 간만에 있는 집회이다 보니 그렇겠지. 하면 어디로 가면 되오?”
“계단을 따라 6번으로 나가시오.”
“66층의 6번 출구라. 꽤나 그럴듯하군. 수고하시오.”
연우는 목례를 한 뒤, 문지기가 가리킨 방향으로 움직였다.
문지기는 그런 연우를 물끄러미 보았다. 두통이 있어서 갑자기 왜 이러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곧 다음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에 고민을 거두고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 * *
‘경계가 삼엄하군.’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역사를 벗어나기까지, 수시로 검문을 해 오는 통에 문지기들을 일일이 상대하느라 짜증이 났던 것이다.
거기다 도처에 숨어 있는 것들은 왜 이리도 많은 건지. 위로 올라올수록 함부로 그림자와 망령을 쓰기에도 힘들 것 같았다.
‘사람도 제법 많고.’
역사 위쪽에 마련된 광장에는 제법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어림잡아 봐도 이백여 명.
이곳이 랭커 급 인사들만 출입할 수 있는 66층인 것을 감안한다면, 말도 안 되는 숫자인 게 분명했다.
‘시의 바다 소속원이 이렇게나 많았었나?’
진짜 소속원들만 있는 건지, 아니면 그들에게 코가 꿰인 이들까지 모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건 분명히 그간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시의 바다가 가진 제력이 대단함을 말해 주는 증거였다.
‘이 집회는 그저 하부 조직 중 한 곳이 진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곳에 올라오자마자, 단숨에 집회장을 덮쳐서 놈들의 영혼을 소울 컬렉션에다 욱여넣고 단체로 고문을 해 브라함 등의 행방을 찾을 생각이었지만.
‘조금만 더 지켜볼까.’
연우는 조금만 더 상황을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간부진도 나오지 않은 듯한 데다가, 본격적으로 집회가 시작되면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집회는 아주 엄숙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써서 정체를 숨기고 있었고, 말도 최대한 나누지 않았다. 그저 중앙 단상을 중심으로 모인 채, 주최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연우는 칸으로 짐작되는 자를 찾을 수 있었다.
가면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다지만, 특유의 기질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으니까.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들에 뒤섞여 조용히 무언가 논의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그동안 칸을 회유하고, 결국 집회로 끌어들인 장본인들이겠지. 칸도 시의 바다와 끈을 만들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들었다.
그러다 순간 칸이 어떤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연우와 눈이 마주쳤다.
연우도 칸을 단숨에 알아봤듯이, 칸도 순간 연우를 알아본 눈치였다.
『눈 돌려.』
하지만 연우의 재빠른 메시지에 칸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딴청을 피웠다.
옆에 있던 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아는 얼굴이라도 있소?”
“하하. 그럴 리가. 그럼 큰일 아닙니까? 잠시 오늘 저녁은 여러분과 무엇을 먹을까 갑자기 고민이 들던 차였습니다.”
“허허. 사람도 참. 칸은 이런 면이 참 신기하오.”
연우는 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칸을 보면서 가볍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른 집회 참가자들을 보면서 몇 번이고 고민했다.
이들을 언제 치는 게 좋을까.
그의 그림자는 이미 지하로 흐르면서 녀석들의 그림자와 맞닿아 있는 지 오래였다.
신호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저들의 그림자가 제 주인을 잡아먹을 터였다.
굶주린 짐승처럼.
* * *
‘덮치자.’
연우는 집회를 가만히 살펴보면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중앙 단상에 간부진으로 보이는 이들이 올라오고, 이런저런 소리를 떠들기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무언가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했었다.
비밀과 보안을 중요시하는 녀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집회를 가진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난 모양이었다.
단상 위에서 무언가 있는 것처럼 거창하게 떠들어 댄다지만, 귀담아들을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개소리에 불과했다.
종말이 어쩌니, 개벽이 어쩌니, 시가 실현된다느니 하는 별 영양가 없는 소리만 흘러나올 뿐.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사이비 교단의 집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브라함의 소식이 끊어진 장소여서 끝까지 들어주려 했지만.
아무래도 그냥 모조리 잡아다가 주리를 트는 게 훨씬 이득일 듯 싶었다.
어차피 집회에 참여할 놈들도 전부 참여한 듯싶었으니까.
그래서 각각의 그림자 속에 미리 넣어 둔 망령들을 건드렸다.
[망령의 벽]
놈들의 발치에 잡힌 그림자들이 아지랑이처럼 출렁이던 그 순간.
텁!
갑자기 뒤쪽에서 연우의 어깨를 짚는 손길이 있었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잠자코 기다려!』
다급한 어조로 가득 찬 어기전성이 연우의 귓가에 꽂혔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목소리.
레온하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