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시(詩) (3)
“너……!”
연우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라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그를 부를 뻔했지만, 곧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기전성으로 돌렸다.
『네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당황스러움과 함께 조급함이 가득 묻어났다.
연우는 그제야 일기장에서 오래 전에 보았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나에게 실망한 이후, 시의 바다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연우가 이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의식중에 방어기제로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는 말이 옳았다.
여러모로 레온하르트는 그에게 애증의 대상이었으니까.
그가 발데비히처럼 동생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려다가 결국 지쳐 나가떨어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결국 동생에 대한 복수를 위해 시의 바다마저도 나와 환상연대를 만들었다는 사실까지도.
다만, 동생의 마지막을 지켜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연우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동안 그의 손을 뿌리쳐 왔다.
애당초 떠올릴 생각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의 바다의 비밀 집회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녀석은 아직 시의 바다와의 관계를 끊지 않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적으로 간주해야겠지.’
여기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화아악!
연우의 그림자 중 일부가 지면을 따라 촉수처럼 길게 쭉 뻗쳐 나오면서 레온하르트의 그림자를 깊숙하게 찔렀다.
“흡!”
순간, 레온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육신, 아니, 그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영혼을 관통한 듯한 통증 때문이었다.
실제로 연우가 각성한 음령술은 그림자를 기반으로 둔다. 정확하게는 그림자라는 물리적 공간을 빌려, 이데아에 새겨진 상대의 관념적 공간을 강제로 침범하는 것이다. ‘존재’를 직통으로 연결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나’라는 존재를 담고 있는 작은 세계, 즉, 소우주(小宇宙)를 확장시켜 상대는 물론, 자연 공간과 그 너머에 있는 이데아에까지 강제로 각인(刻印)시키는 것.
그것이 연우가 터득한 〈음검(陰劍)〉이며, 새로운 권능일지니.
여기에 노출된 존재는 연우를 능가하는 격을 지니거나, 혹은 맞대응할 수 있는 기술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레온하르트 역시 새로운 아홉 왕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하이 랭커.
조금만 더 영력을 갈고닦는다면 초월은 불가능할지라도, 탈각은 충분히 노려볼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금세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은 ‘보이지 않는 손’을 감지하지 못할 리가 만무했다.
그는 연우에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재주가 있다는 사실에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무슨 일인가?”
그러다 옆에 있던 동료가 무언가 수상쩍다 여겼는지, 의심에 젖은 얼굴로 레온하르트를 불렀다.
워낙에 은밀하게 이뤄진 집회이다 보니, 조금만 수상쩍은 행동이 벌어져도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차하면 바로 검을 뽑을 생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 이상 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어느새 연우의 그림자에서 삐져 나온 다른 그림자 가지가 녀석의 그림자를 관통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녀석의 육체가 나무토막처럼 빳빳하게 굳었다. 숨소리가 옅어지고, 두 동공에서는 초점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겉보기엔 별 차이가 없는 데다가, 아주 은밀하게 이뤄져서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아악!
연우의 그림자에서 삐져나온 검은 가지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의 그림자를 관통하고 말았으니.
“종말이 곧 닥쳐 ‘그분’이 오실……!”
단상 위에서 한창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던 자도 도중에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마치 이 공간에 흐르던 시간이 아예 멈춘 것처럼,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이들이 정지하고 말았다.
[‘죽음의 태엽’이 작동합니다!]
[영역에 노출된 모든 이들의 기능이 정지합니다.]
“허!”
레온하르트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그로서는 이렇게 플레이어를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연우의 재주가 신기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동안 화이트 드래곤을 어렵지 않게 무너뜨리고, 탑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2년 만에 나타나서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모습만을 보이고 있으니 충격을 받을 수밖에.
검략가라고 불리면서 탑 내의 갖가지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그로서도, 그 메커니즘을 도저히 추론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연우가 터득한 음검은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신비한 기예였고.
이를 바탕으로 터득한 음령은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체재로 운영되고 있었다.
의념 통천.
진정한 의미의 그만의 ‘신화’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었다.
“우선 네가 왜 이곳에 있는지부터 묻도록 하지.”
연우는 그런 레온하르트의 충격을 무시한 채로, 팔짱을 끼면서 차가운 어투로 물었다.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면서, 천천히 얼굴을 덮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 순간, 이번에는 연우의 두 눈이 크게 떠지고 말았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화상으로 흉측하게 망가져 있었다.
* * *
“…….”
칸은 말없이 팔짱을 낀 채로 연우와 레온하르트를 번갈아 보았다.
저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몰라도, 이 일에 자신이 끼 어들 곳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말을 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어기전성으로 말을 하더라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연우가 감지한 레온하르트는 모든 게 망가져 있었다.
얼굴은 아예 뭉개져 있었다. 피부는 화상으로 이리저리 문드러지고, 코는 짓눌려 입과 연결되어 있다시피 했다.
한쪽 눈은 실명했는지 초점이 잡히질 않았으며, 다른 쪽 눈마저도 눈꺼풀이 망가져 제대로 감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성대도 망가졌는지 숨을 쉴 때마다 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억지로 말을 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거기다 로브로 가려져 있어서 여태 몰랐지만, 손발도 형구(形具)로 속박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죄수가 따로 없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2년 전에 봤을 때는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 텐데.
연우는 한순간 가슴 한편이 찌릿하게 울리는 것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무뚝뚝한 음색으로 물어볼 뿐.
“어쩌다 그렇게 된 거지?”
『배반에 대한 대가지.』
“배반?”
『시의 바다는 절대 배반을 용서치 않거든.』
시의 바다를 나온 것 때문에 저렇게 됐다고? 하지만 2년 전에 환상연대를 만들었을 때는 저렇지 않았을 텐데?
연우의 머릿속으로 한순간 의문이 스쳤지만, 곧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중 첩자였나?”
『비슷해.』
레온하르트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표정을 지을 수 없는 얼굴은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았지만, 음성에는 회한이 짙게 묻어났다.
“환상연대가 시의 바다가 부리는 위장막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레온하르트는 시의 바다를 나와서 환상연대를 일궜다.
신생 거대 클랜에 손꼽힐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8대 클랜에도 들어갈 만한 곳을.
연우도 비슷한 업적을 이뤘다지만, 그래도 수중에 아무것도 없던 이가 단기간에 해내기엔 아주 어려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면. 시의 바다가 있어서 지원을 해 주었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정확하게는 환상연대를 이루는 여러 조직 중 상당수가 시의 바다와 관련이 있지. 여기에 참가한 이들도 상당수가 시의 바다 소속이다.』
어떤 명분으로 그들을 설득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당시에 연우가 차정우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연우에 대해 일찌감치 정체를 추론했던 시의 바다로서도 이익이 된다 싶었기 때문에 이를 승인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저것을 요구하였겠지.
연우와 접촉을 하라거나, 아니면 결탁하라거나. 그런 유의 요구.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이런 명령을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성공하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만약 레온하르트가 정말로 시의 바다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생각이었다면, 연우가 부재중인 동안 어떻게든 아르티야와 동맹 체재를 갖추려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그동안 화이트 드래곤을 몰아붙이는 데만 집중할 뿐, 전혀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연우는 그제야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나에 대한 시의 바다의 관심을 가리고, 그동안 저들의 뒤를 조사했던 거였나?”
레온하르트는 그동안 그를 지원해 준 시의 바다를 농락해 왔던 것이다.
시의 바다가 연우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갖고 있단 것을 깨닫고,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도록.
-시의 바다에 투신했었다고 들었는데?
-그랬었지.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금방 나왔었다네.
-거긴 내 집이 아니지 않나.
-모든 게 잘못 돌아가고 있었지. 배신자들은 서로가 잘났다며 뛰어다니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어떻게든 바로잡고 싶었다네.
처음 환상연대의 주인이라면서 그의 앞에 정체를 드러내던 날.
녀석은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말들을 하면서도, 곳곳에 다른 무언가의 의도가 숨어 있음을 자신에게 가르쳐 주려 했다.
하지만 연우는 평상시라면 충분히 그런 메시지를 읽어냈을 텐데도 불구하고, 분노에 젖은 나머지 전혀 간파하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에 다다르고 말았으니.
시의 바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레온하르트가 수작을 부리고 있단 것을 깨달았을 테고, 여기에 대해 제재를 가한 게 틀림없었다.
그게 바로 지금과 같은 몰골이었으니.
연우는 자신으로 인해 레온하르트가 이렇게 되었단 사실에, 그동안 그런 것도 모른 채로 그를 멸시해 왔단 사실에, 그런 수모를 겪고도 여전히 그가 자신을 보호하려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럴 시도만 했던 거지. 별반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그마저도 자신의 실수라며 미안해하고 있었다.
아직 모든 게 낯설기만 한 탑의 환경에 모두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혼자서 개미 구경을 한답시고 쭈그려 앉아 개미가 지나다니는 것을 관찰하고 있던 플레이어.
첫인상부터 특이해도 그렇게 특이할 수가 없었다.
연우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섣불리 나오지 않았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나 있을까.
“……그럼 여기에 있었던 건?”
『환상연대장의 자리에서도 강제로 끄집어 내려지고 말았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곤 죄수 생활밖에 더 있겠나? 집회나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게 하라는 말에 끌려왔던 차였는데…… 자네가 보이더군.』
여기서 만난 것 자체가 우연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실.’
용신안으로도 그렇고, 녀석과 접촉된 그림자도 절대 한 점 거짓된 말이 없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스륵.
연우는 레온하르트와 연결된 그림자 가지를 조용히 거두었다. 레온하르트도 보이지 않는 손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왜 그러나 싶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가 여태 보았던 연우는 절대 의심을 거두는 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연우는 어떤 말을 꺼내기도 어려워졌다. 만약 여기서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계속 이런 신세로 지내야만 했을까?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연우는 화제를 돌렸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연우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본론이 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두 눈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올포원을 사냥할 준비.』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연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정확하게는 올포원을 대체할, 시스템의 새로운 화신을 만들기 위한 준비지.』
순간, 연우의 머릿속으로 번뜩 꽂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2년 전에 여러 신의 사회들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사건.
“……혹시 그 새로운 화신을, 천마증에 젖은 주신들 사이에서 뽑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