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시(詩) (4)
새로운 시스템의 화신을 만든다?
그걸 대체 어떻게 해내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시의 바다가 노리는 게 정말 그것이라면, 올포원의 대체재라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보아하니 올포원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눈치고.』
레온하르트는 연우가 실력을 키운 것은 물론, 하계의 존재라면 절대 알 수 없을 사실까지 알고 있는 걸 보고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
특히 올포원의 정체가 시스템의 화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자신 역시도 시의 바다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이리저리 탐문을 해 보고, 그렇게 모은 정보의 조각들을 맞추어 알아낸 사실들이었으니까.
검략가(劍略家)라는 별칭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옛 아르티야의 모사 역할을 담당했으며, 환상연대를 일군 희대의 지략가. 시의 바다가 그가 이중 첩자였단 사실을 알아내고 나서도 죽이지 않고 처벌을 하는 것에 그쳤던 것은, 그만큼 그가 가진 재주가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맞네. 천마증, 그리고 주신 혹은 창조신. 이게 가장 중요한 키워드지.』
“……!”
『자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옛날부터 시의 바다는 올포원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 왔다. 시스템을 극복하려던 무왕이나, 76층에서 층계를 넘을 준비를 오랫동안 해 오던 여름여왕과는 반대로, 저들은 음지에서 올포원을 제지했었지.』
이유는 몰라도, 오래전에 시의 바다가 하계로 내려오려던 올포원을 막아 낸 건 아주 유명한 일화였다.
덕분에 그때껏 이름만 알려졌을 뿐이지, 인지도는 없었던 시의 바다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확 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올포원을 ‘저지’할 수는 있을지언정 ‘제거’는 하지 못했던 게 현실이었고.』
레온하르트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에 수뇌부에서 머리를 쥐어짠 것이라네.』
그 말에 언뜻 연우의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시스템의 소스 코드가 천마증과 연관이 있나?”
『……그것까지 생각이 미쳤나? 나도 알아내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었는데.』
“너와는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질이 다르니까.”
『자네…… 최고신이나 개념신의 사도라도 된 건가?』
“뭐?”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정보들을……?』
레온하르트가 흔들리는 것도 당연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나다고 해도, 일개 플레이어인 그로서는 연우가 어떤 여정을 걸어왔고 경지를 내디뎠는지를 짐작하기 힘들 테니까.
‘올림포스의 주신이라고 했다간 아예 까무러치겠군.’
그동안 천계의 존재들과 계속 부딪쳐 왔던 까닭에, 연우로서도 이런 반응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 껴질 정도였다.
일일이 호기심을 해결해 줄 이유는 없었지만.
“나도 정확한 건 몰라.”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연우가 영 미심쩍었지만, 그래도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렸다.
『……천마증은 이를테면 바이러스화된 코드라네. 감염된 상대를 좀먹어가 결국엔 존재를 해체시키지. 하지만 반대로 시스템에 ‘유일하게’ 접근할 자격이 있는 천마의 코드가 일부 묻어 있기도 해.』
연우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탑을 세운 장본인은 천마. 당연한 말이겠지만, 탑을 구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도 당연히 천마일 터. 접근 권한도 그가 유일하게 지니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천마증은 그런 존재를 이루는 데이터 중 일부라고 한다. 그것에 감염되었다는 것은…… 즉, 시스템에 접근할 자격을 조금이나마 보유하게 되었단 뜻!
‘그렇다는 건, 시스템의 소스 코드를 그대로 끌어와 접촉시킬 수도 있단 뜻일 테니…… 천마증을 잘만 이용한다면 새로운 시스템의 화신을 만들 수 있다는 게 바로 이런 뜻이었군.’
물론, 대략적으로 이론은 맞을지 몰라도, 현실은 엄연히 다른 법이지만.
‘천마가 그렇게 안일하게 시스템을 관리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시의 바다로서는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이라고 여겼을 테지.
그들의 제안을 받은 주신들로서도 나쁠 건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있다간 신격이 해체될 뿐이니, 차라리 새로운 올포원이 되는 게 낫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다면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탑의 시스템을 맘대로 갖고 놀 수 있을 테니.
탑 내 세계에서만큼은 ‘황’과 다를 바 없는 확고한 위치에 앉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 집회에서 하려던 건, 대체 뭐지?”
『천마증이 있어 접근 권한을 획득했다고 해도, 소스 코드를 추출하는 건 이야기가 전혀 다르지. 그걸 위한 방법, 알고 있나?』
“아니.”
레온하르트는 연우가 모르는 정보가 조금이라도 있단 사실에 그래도 마음이 편해진 듯 보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스 코드를 ‘수정’하거나 ‘추출’할 방법 따윈 일반인들에게 없어. 다중으로 꾸며진 〈복잡한 보안〉 체계를 뚫어야 하네. 그리고 그것들은 달리 이리 부르기도 하지.』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깔렸다.
『최고 관리자.』
연우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십이지(十二支)로군.”
『맞네.』
자의 이블케를 비롯한 열두 명의 최고 관리자들.
그들의 원래 정체가 보안 체계였을 줄이야.
순간, 연우의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마해에서 벌어졌던 일들.’
거기서 묘의 라플라스는 타계의 신으로서 힘을 가질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로서 각성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의 루피가 사망을 하고, 미의 타넥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가.
‘그 모든 것들이 보안 체계를 허물기 위한 작업들이었다면?’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열두 개로 나눈 건, 아마도 누군가가 함부로 소스 코드에 손을 대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던 것 같지만…… 그래도 완벽한 보안은 아니지. 그들 중 누군가가 체계를 하나로 통합해 버린다면 그만이니.』
“십이지 사이에서 내분이라도 일어났나?”
『그렇다네. 그들 중 누군가가 시의 바다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킨 거지.』
그제야 어째서 라플라스가 시의 바다에 가담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반란은 성공했다네. 정확하게 얼마나 죽고 다쳤는지는 모르지만…… 시의 바다는 중앙 관리국을 접수하는 데 성공했어. 그리고 이 집회는.』
레온하르트는 숨을 살짝 삼키다가 힘겹게 내뱉었다.
『도망친 생존자들을 잡기 위한 병력 소집이었다네.』
“……!”
연우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살아남은 최고 관리자가 있다고?
‘반드시 수중에 넣어야 한다!’
이대로 둔다면 시의 바다가 시스템의 수정 권한을 가져가게 된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음검을 깨우친 지금도 아직까지 올포원과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워. 하지만 시의 바다까지 그렇게 되고 나면…… 생각도 하기 싫군.’
연우는 조금씩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이미 시의 바다가 깔아 둔 판이 있고, 자신은 그것을 뒤집어야만 하는 상황.
섣불리 움직여서는 오히려 상대의 경계심만 살 뿐이었다.
우선 여기에 관련된 레온하르트의 생각이 가장 중요했다.
“그럼 넌 뭘 하려던 거였지?”
여태 묵직하던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담겼다.
『방관.』
“뭐?”
『죄수로 부려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이유는 알고 부려져야 하지 않겠나? 이런 내막들을 알게 된 건 그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였을 뿐이라네. 만약 빈틈을 찾아 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테고.』
흉측하게 뭉개진 레온하르트의 입술 끝이 크게 비틀렸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지. 아니, 있다고 해도 나와는 전혀 무관했어. 시스템이니 올포원이니, 나에게는 별세계의 이야기나 다름없었으니까.』
연우는 이해한다는 듯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그가 지닌 특유의 비상한 머리로 선후 관계를 전부 파악했다고 해도, 그것에 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을 게 분명했다.
힘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자포자기했겠지.
예전부터 지금까지, 그로서는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용만 당할 뿐.
그렇게 계속 실패만 거듭해 오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레온하르트에게서 느껴지는 것도 그랬다.
무력감.
“이봐, 레온하르트.”
그것이.
『왜 그러지?』
너무 보기 싫었다.
“정우가 돌아왔다고 하면, 넌 어떻게 할 거지?”
『……그게 무슨 소리지?』
우울함에 젖어 있던 레온하르트의 눈이 살짝 커졌다. 흉측하게 망가진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에 비친 것은 레온하르트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지키고 싶어 했던, 소중한 친구와 똑같은 얼굴.
“녀석이 되살아난 건 아니다. 하지만 사념체만은 남아 있어 제 의사를 표시할 수 있지. 그리고…… 난 녀석을 되살릴 방법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근접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지 않나!』
레온하르트는 연우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동생을 두고 떠난 것에 대한 원한을 삭이지 못하고, 우스운 꼴이 되어 버린 자신을 고소하다며 비웃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를 직시하는 연우의 두 눈은 깊었다.
“만약 그렇다면, 너도 같이할 테냐?”
『…….』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흉측한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그, 게…… 사실인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어 하는 얼굴.
말이 안 된다고 여겼지만, 진실이길 애타게 갈망하는 눈.
연우는 대답 대신에 아까 전부터 숨죽여 이곳을 보고 있던 존재를 불렀다.
“발데비히. 보고 있지?”
『발데비히라고?』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한쪽으로 홱 하고 돌아갔다.
그곳에서 길게 쭉 뻗어진 그림자를 따라 무언가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오래전에 헤어졌다가 소식이 끊어졌던 친구, 발데비히가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그때보다 키나 덩치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지만, 맑은 눈만큼은 발데비히가 틀림없었다.
『자…… 네?』
「오랜만이군, 친구.」
연우는 재회한 두 사람을 보면서 팔짱을 풀었다.
“정우와 관련된 건, 나보다 발데비히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지. 함께할 건지 말 건지는 다 듣고 나서 정해.”
그 말을 남긴 채, 연우는 두 사람이 해후를 즐길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줬다.
* * *
“대체 언제 깬 거야?”
“방금.”
“그럼 말이라도 해 주지. 그런데 저것들은 어떻게 하려고?”
칸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멈춘 집회 참가자들을 보고 있으니 영 속이 쓰렸다. 그로서는 온갖 고생을 하면서 다 낚았다고 생각했던 걸 막판에 그르치게 된 셈이었으니까.
“별 차이 없어.”
“뭐?”
탁!
연우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영역에 노출된 모든 이들의 기능이 재가동합니다.]
그러자 정지했던 참가자들이 거짓말처럼 다시 움직였다.
“……것이니, 우리는 모두 세상이 겁화에 휩싸여 정화될 그 날을 위해……!”
단상에서 뭐라 지껄여 대던 간부도 계속 소리를 질러 댔고, 다른 참가자들도 하던 일들을 마저 이어서 했다.
정지했던 시간이 되돌아온 듯한 모습.
연우는 다시 손가락을 튕겨 그것들을 도로 정지시켰다.
[죽음의 태엽이 작동합니다!]
[영역에 노출된 모든 이들의 기능이 정지합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해.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기억을 조작하거나, 암시를 거는 것도 가능하고.”
“허!”
칸은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대체 폐관 수련을 하며 무슨 재주를 익혔기에 이런 게 가능한 걸까? 차이도 적당히 나야지, 이 정도면 경외심밖에 들지 않았다.
연우는 이미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전부 자신의 그림자에 종속되어 영혼도 망령으로 격하되었다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들은 이미 죽어 그의 꼭두각시 인형으로 전락한 지 오래란 뜻이었다.
연우는 이들을 치우지 않고 최대한 활용할 생각이었다.
‘이들 틈에 섞여 들어서, 생존했다는 최종 관리자를 도중에 낚아채야 한다.’
수정 권한은 그만큼 중요한 열쇠였다.
‘브라함은 이 모든 사실들을 알아내고 66층을 방문했을 게 분명해. 정우 녀석도 마찬가지로 브라함의 행적을 읽었던 거고.’
연우는 그제야 조각조각 났던 퍼즐들이 하나로 맞춰지면서 온전한 그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생존자 근처에 브라함과 동생이 같이 있을 테지.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단서가 있을 게 분명했다.
‘관건은 저들의 ‘눈’을 어떻게 피해서 가냐는 건데.’
저들이 영매의 ‘눈’을 가져간 이상, 이쪽의 움직임을 읽힐 수도 있는 것이니까.
비록 아직은 생존자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어서 그런지 이쪽 상황을 알아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발데비히와 이야기를 끝내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무언가를 다짐한 듯, 눈빛이 단단해져 있었다.
“어떻게 할지, 정했나?”
레온하르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하겠다. 지난 속죄를 할 수 있게 해다오.』
“좋아. 그럼 우선 치료부터 하지. 그런 몸으로 싸워 봤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치료할 방법이, 있나?』
레온하르트의 눈이 살짝 커졌고.
연우의 한쪽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쉬워.”
『어떻게?』
“죽었다 살아나면 돼.”
『……?!』
레온하르트가 불안감에 본능적으로 뒤로 주춤 물러섰지만, 그보다 연우의 손길이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