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시(詩) (5)
“아, 아, 아!”
레온하르트는 몇 번 목을 가다듬어 보았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착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성대가 다치기 전의 목소리.
그리고.
신체도 ‘징죄’를 받기 이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아니, 갖가지 노폐물이 빠지면서 오히려 더 강화된 측면이 없잖아 있었다. 마력 기관의 효율이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맘에 드나?”
연우는 그런 레온하르트를 보면서 피식 웃으며 물었고.
레온하르트는 연우의 동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상회복.
연우는 그의 육체를 ‘재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영혼도 깨끗이 치료해 주었다.
신도 계약을 통해서.
“절망에 빠진 신도를 구원해 주는 건, 신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지.”
“자네는…… 신이라도 된 건가?”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연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이런 일들은 도저히 말이 되질 않았으니까.
“비슷해.”
“…….”
이적(異蹟).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지 않을까.
하계에 존재하는 플레이어들로 서는 도저히 이루지 못할 일들. 신들의 손길이 닿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연우는 레온하르트에게 ‘새 삶’을 살 것을 권고했다.
올림포스에 귀의해라.
우리를 위한 신도가 되어라. 그런다면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것이니.
레온하르트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뒤로 거대한 무언가가 들어선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신의 사회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를 자랑한다는 올림포스가 자신을 가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동안은 외롭다는 감정이 강했다면, 지금은 어딘가 의지할 곳이 생겨 마음이 든든해졌다. 배경이 생긴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가짐이 달라질 줄이야.
그렇기에 레온하르트는 이제 연우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도저히, 쉽게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은 경외감.
상대는 이제 자신이 숭배를 해야 할 대상이었다.
“……죽으라는 끔찍한 농담이 없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처음 연우가 던진 말엔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아찔한 농담이었다.
“이것에 대한 대가는…… 뭐지?”
레온하르트는 연우가 자신을 치료해 준 게 공짜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꺼려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 역시 여전히 죄인이라는 생각은 못 벗어던지고 있었다. 이렇게 망가지면서까지 살았던 것은 전부 지난날에 대한 속죄였을 뿐.
“없어.”
“없…… 다고?”
“정우 녀석을 위해 뛰어 준다. 그것 외에 더 뭐가 필요하나?”
“…….”
“그래도 뭔가를 하고 싶다면.”
연우가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난 뒤에 환상연대를 다시 접수해라. 그리고 시의 바다로부터 떼어 내서, 올림포스를 위한 성전(聖殿)이라도 지으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가능하다면 성기사단(the Crusaders)이나 전사(Paladin)들을 나중에 만들어도 좋고.”
신의 이름하에 움직이는 조직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의 무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모시는 신과 사회의 격이 높아지는 건 당연했다.
이미 아르티야도 성향이 조금씩 바뀌면서 연우를 위한 선전 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이미 층계 내에서 연우의 위명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거대했으니.
그것도 전부 신화였다.
“꼭…… 꼭 그러도록 하지.”
레온하르트의 눈가에 열망이 잔뜩 피어올랐다. 실의에 젖어 절망에 빠진 사람이, 다시 자신을 쏟 아부을 수 있는 신념을 되찾았을 때 보이는 눈빛이었다.
황홀(恍惚).
혹은 광신(狂信)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칸은 또 누군가가 코 꿰였다는 생각에 멀리서 그런 레온하르트를 불쌍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보다.”
연우는 레온하르트의 상념을 깨면서 말했다.
“이 집회가 도망치는 최고 관리자를 잡기 위해서 있는 거라고 했었지?”
“맞네. 그가 66층에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거든.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모두 자신들이 숨어 있는 조직에서는 어느 정도 위치가 되는 이들이기도 한 터라…… 포위망을 구축하기 훨씬 쉽다는 것도 있고.”
연우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의 바다뿐만 아니라, 그들의 손길이 닿아 있는 여러 클랜들의 시선도 알게 모르게 함께 움직인다면 그만큼 잡기가 수월해질 테니까.
“그렇다면 이 틈에 섞여야겠어.”
연우는 여전히 정지되어 있던 인물들 중에서, 간부 급 인사이지만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존재를 물색했다.
그러다 한 놈이 눈에 띄었다.
처음 레온하르트가 연우를 불렀을 때 제지하려던 작자.
“저놈이 좋겠군.”
[망자의 술(術)]
그쪽으로 손을 내뻗자마자.
퍼석!
녀석은 마치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그대로 고운 입자로 변해 제자리에 무너졌다.
대신에 녀석의 그림자가 그대로 연우에게로 딸려 오면서 발끝에 흡수, 잿빛 아지랑이가 피어올라오면서 연우의 상반신을 감싸 안았다.
우드득, 두득, 골격이 뒤틀리는 소리가 나면서 얼굴을 비롯한 체형이 크게 변했다. 그러고 난 뒤에 나타난 모습은 분명히 방금 전에 죽어 사라진 간부의 것이었다.
흡수한 영혼에서 사념을 떼어 내 위장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기질까지 똑같아지기 때문에 절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이제 더 놀랄 것도 없다는 듯이 덤덤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자의 이름은 라스라네. 집회를 이끈 간부들 중에서도 가장 말단이지. 내 감시역이기도 했고.”
“잘됐군. 떨어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부탁이 있네만.”
“……?”
“이 일이 끝나거든, 혹시 그놈을 내가 가져갈 수 있겠나?”
“왜?”
“그놈이 그동안 제일 많이 날 괴롭혔었거든.”
레온하르트가 차갑게 눈빛을 일렁였다.
종교에 귀의한 교인이 되었다지만, 다행히 올림포스는 다른 곳들과 달리 사랑이나 자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피식.
연우는 가볍게 웃으면서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고맙네.”
그리고.
[영역에 노출된 모든 이들의 기능이 재가동합니다.]
도망치는 최고 관리자를 가로채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집회 참가자들이 움직이고.
그 속으로 연우와 레온하르트, 칸이 다시 조용히 숨어들었다.
* * *
66층, 세기말 도시의 관.
어느 동굴 속.
“하아, 하아! 빌어먹을 이블케.”
하양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복부를 손으로 짓누르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한때, 최고 관리자였으며, 사(巳)의 칭호를 받기도 했던 그였지만.
그래서 온갖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있고, 시스템에 대한 관리도 중앙 관리국에서 가장 잘 다룬다고 알려진 그였지만, 이 상처만큼은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했다.
가이아의 저주.
이블케가 달아나던 그에게 적중 시켰던 독.
“대체 이딴 걸…… 어디서 가져 온 거지?”
분명히 신화를 흩뜨리는 가이아의 저주는 대지모신이 아니면 쓸 수 없을 텐데? 어떻게 관리자들이 쓸 수 있는 거지? 하양은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수도 없이 굴렸지만,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쫓겨 다니느라, 아스가르드가 이미 무왕을 잡기 위해서 시의 바다로부터 가이아의 저주를 받아 썼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로서는, 그저 ‘이블케가 모종의 세력과 손을 잡은 게 분명하다’고 추측하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무(武)에 소홀했던 자신의 지난 세월을 원망했다.
최고 관리자의 신분은 머리만 잘 쓰면 된다는 생각에 그랬던 것인데. 그것이 지금 자신의 발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물론 중앙 관리국의 모사를 자처할 만큼 뛰어난 머리 덕분에 여러 계략을 짜서 여기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궁지에 내몰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단점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탑 외 지역으로 간다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테니까.”
아난타는 그런 하양을 부축하면서 몇 번이고 그를 격려했다.
외뿔부족 마을까지만 가자. 그런다면 어떻게든 해답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그것은 단순한 희망 고문 따위가 아니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중앙 관리국이라 하여도, 외뿔부족의 마을에 직접적으로 손을 대는 건 힘들었으니까.
외뿔부족은 소호 금천의 후예들. 트리니티 원더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자처하는 중앙 관리국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매는 그동안 무왕을 앗아간 가이아의 저주에 대해 이것저것 연구를 해 왔던 까닭에 해독제를 마련했을지도 몰랐다.
문제가 있다면, 이블케 일당이 움켜쥔 중앙 관리국이 한창 폭주 중이고, 방어막이 되어 주었던 무왕이 부재중이라는 것이지만.
그래도 아난타는 최소한 탑 내에 있는 것보단 나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중앙 관리국의 시선이 여기저기에 너무 많이 깔린 까닭에 탑 외 지역으로의 탈출이 쉽지 않았다.
대장로가 따로 미끼가 되어 저들의 이목을 따돌리고 있다지만, 그것도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째깍, 째깍-
목에 건 회중시계의 바늘이 애처롭게 돌아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흐흐, 흐. 내 꼴도 참 우습군. 명색이 최고 관리자라는 작자가 플레이어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라니.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난 죽은 목숨이었겠지.”
하양은 울컥하고 치솟은 피를 바닥에다 게워 냈다. 2년도 넘는 추격전으로 인해 그는 이미 체력도 마력도 전부 바닥을 기고 있었다. 격도 망가진 지 오래였다.
아난타는 그런 하양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자신들이 발견하는 게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약한 말씀 하지 마시라니까요.”
“하지 않는다.”
하양은 힘겹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남들은 뱀처럼 간사하고 교활하다면서 손가락질하던 두 눈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굳은 의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국장이 남긴 이것만큼은.’
하양은 옷깃 안쪽에 숨겨 둔 목걸이를 꽉 쥐었다.
이것은 열쇠였다.
시스템의 소스 코드를 둘러싸고 있는 최종 보안 체계를 해제할 수 있는 마지막 열쇠.
죽은 클루스가 그에게 남긴 유산인 것이다.
중앙 관리국에서 이블케의 반란이 있고 난 후.
하양은 국장 클루스로부터 ‘마지막 열쇠’를 받고 관리국을 탈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혼자서 따로 마련해 두었던 비상 통로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 뒤로는 지금과 같았다.
쫓기고, 도망치고, 쫓기고, 도망치고…….
그 와중에 하양은 이블케 일당의 뒤에 시의 바다가 존재하며, 그들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목표가 올포원 사냥이라는 것까지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다친 몸으로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반격을 한다는 건 애당초 선택지에도 없었고, 무언가를 획책하려 해도 중앙 관리국의 시선에 걸릴까 조심스럽기만 했다.
만약 2년 전에 브라함이 나타나 그를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진즉에 죽은 목숨이 되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마저도 가이아의 저주 때문에 위태롭기만 했지만.
그때, 그들이 있던 동굴 안쪽으로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양은 상념에서 벗어나 아난타와 함께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장로가 피로 흠뻑 젖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지적인 눈매를 돋보여 주던 안경은 이미 자잘한 생채기로 낡아 버린 지 오래였다.
“마룡이 나타났네. 아무래도 이곳에서도 빨리 피해야 할 듯싶어.”
다시 도망쳐야 한다는 말에 아난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양은 추격대가 누군지 깨닫고 작게 이름을 중얼거렸다.
“디아블로…….”
코드 네임 진(辰). 최고 관리자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최초의 마룡이기도 한 존재가 턱밑까지 다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