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34화 (634/862)

9화. 시(詩) (6)

“밥은요? 좀 먹겠대요?”

트와이스가 던진 질문에 빙왕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이라고 크게 다르겠나.”

“하!”

트와이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2년 전, 페이스리스의 갑작스러운 방문 이후.

특별한 건 없어도, 심심하지는 않던 그들 파티는 모든 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페이스리스를 따라 잠시 어딘가를 방문하겠다고 나섰던 녹턴이 한참 뒤에 돌아와서는 방에 틀어 박힌 채로 여태 두문불출을 했던 것이다.

곡기도 제대로 입에 대지 않으려고 해서 몇 번씩이고 빙왕이 옆에서 챙겨 주긴 했지만, 그마저도 거절하기 일쑤라 이제는 지칠 지경이었다.

삶에 의욕이 없는 사람을 옆에서 계속 챙겨 주다 보면, 그 사람마저도 덩달아 무기력증에 빠지기 마련이었으니까.

아무리 빙왕이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힘든 것이다.

더구나 저러면서도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설명하질 않으니 더 답답해질 수밖에.

다만, 외뿔부족 마을에서 변고가 있었고, 그로 인해 언제부턴가 무왕이 보이질 않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걸 봐서는 그것과 관련된 게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트와이스는 미간을 찌푸리다, 결국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빙왕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결국 가시려는가?”

“지금까지 기다려 준 것만 해도, 사실 오래 기다려 준 것 아닌가요?”

그들은 용병이었다.

의뢰를 받아 하루하루를 먹고사는 용병.

날품팔이와 다를 바가 없는 삶인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2년을 같이 쉬었으니, 그녀로서는 의리를 다 지켜 준 셈이었다.

빙왕도 이해한다는 듯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트와이스가 마지막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는 건,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긴 그도 그렇지. 은퇴를 한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네는 아니니까.”

“할아버지는 어쩌시려고요? 계속 저 화상 옆에 있으시게요?”

“어쩌겠나. 내가 없으면 조만간에 아사라도 할 판국인데.”

트와이스는 뺨을 크게 부풀렸다.

“할아버지가 계속 저 화상을 옆에서 챙겨 주시니까, 저렇게 생떼 부리는 거잖아요!”

“어쩌겠나. 싸움이야 기가 막히게 할지 몰라도, 세상일에는 한없이 무지한 어린아이인 것을.”

“대체 그 ‘어쩌겠나’는 몇 번이나 나오는 건지……. 그냥 내버려 두고 저랑 같이 가죠?”

“어쩌겠나.”

“아, 그럼 저도 이제 몰라요! 할아버지 알아서 하세요! 저는 그냥 갈 테니까!”

트와이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심통이 단단히 난 채로 발끝에 걸린 돌멩이를 뻥 하고 걷어차면서 돌아섰다.

빙왕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가 손녀처럼 아꼈던 아이다. 앞으로 딴 곳에 가서도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 물론, 가진 재주도 좋고 똑똑하기도 하니 제 앞가림은 충분히 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러다 트와이스는 한참 걷다 말고 도중에 뚝 하고 걸음을 멈추면서 이쪽을 잠깐 돌아봤다.

미련이 잔뜩 담긴 얼굴.

“정말 같이 안 가요?”

“잘 가시게. 몸 조심히 하고. 이따금 연락도 하시고.”

“아, 진짜!”

트와이스는 마지막 제안까지 거절당하자,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발끝에 걸린 또 다른 돌멩이를 다시 뻥 하고 걷어찼다.

그러고는.

“진짜! 나만 나쁜 년이지!”

씩씩대면서 이쪽으로 되돌아왔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운 나머지, 빙왕은 저도 모르게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허허허!”

“웃지 마요!”

트와이스가 빽 하고 소리를 질러 대도, 빙왕의 웃음소리는 도무지 그치질 않았다.

* * *

‘사부님, 전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이 우둔한 제자는 아직도……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녹턴은 가부좌를 튼 채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몇 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잔상은 도무지 지워지질 않았다.

그는 고뇌했다.

그리고 찾고 싶었다.

무왕이 자신에게 남긴 메시지는 무엇이며.

삶의 의미는 또 무엇인지.

* * *

집회의 참가자들은 수뇌부를 따라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했다.

이번에는 지하철이 아닌 도시의 외곽. 회색 콘크리트의 숲이 빠르게 지나가자 앙상하게 메마른 나무들로 가득한 숲과 벌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어디 다른 집결지라도 있는 걸까?’

아까 전부터 계속 인원이 불어나고 있었다. 수뇌부가 자꾸 어딘가와 통신을 하고 있는 걸 봐서는 실시간으로 명령을 하달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전형적인 포위망이야. 우리가 있는 위치는…… 대략 북서쪽. 진형의 왼쪽 날개 끝쯤 되는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인력들이 튀어나온 거지?’

못해도 천 단위는 훌쩍 넘는 것 같았다.

66층이면 상당히 높은 층계. 거기서 이만한 인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시의 바다가 가진 저력이 아주 대단하단 뜻이었다.

66층에 들어온 뒤로, 감각을 계속 곤두세우고 있었던 연우로서는 조금 놀랍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체 이들이 쫓는다는 목표들이 어디 있는지를 감지할 수가 없어 미간을 찌푸려야만 했다.

『그래도 크로이츠가 자네를 따라간 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네.』

그런 와중에 레온하르트가 불쑥 던진 말은 저쪽을 주시하던 연우의 이목을 옆으로 끌어당겼다.

크로이츠.

환상연대의 부대장이었으며, 지금은 아르티야에 투신한 환영기사단의 수장.

『크로이츠는 시의 바다 쪽이 아니었나 보지?』

두 사람은 주변의 이목이 있어 어기전성을 이용한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몸이 치료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상태로 입술을 달싹였다.

『저쪽 사람이었다면 내가 옆에 두지 않았겠지. 내가 가장 아꼈던 친구라네.』

『혹시 시의 바다 쪽에 연루될까 싶어 내게 보낸 거였군.』

『비슷하네. 자네와의 개인적인 연결 고리를 만들 생각이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잘 안 됐지만.』

연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크로이츠는 시의 바다 쪽과 연관이 있다는 보고를 받지 못했으니까.

그만한 인사가 첩자였다면, 도일의 조사에서 걸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겠지.

『대체 놈들의 인원은 얼마나 되는 거지?』

『나도 몰라. 내가 보았던 건 저들이 가진 한쪽 단면이 전부였으니.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지.』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렸다.

『탑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에게 속고 있다는 것.』

연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계는 물론, 천계와 관리국에까지 마수를 뻗치는 곳을 두고 평범한 클랜이라 할 수 없겠지.

더구나 트리니티 원더였던 이예의 소속도 시의 바다로 표시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즉, 시스템이 초월자의 사회로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만큼 비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여태 외부로 크게 드러나는 일 없이 조용히 지낼 수 있었던 걸까?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나 권력욕을 갖고 있기 마련일 텐데, 그렇게 기나긴 시간 동안 비밀을 지킬 수 있었단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역시 하르모니아부터 찾아서 끌어내야 해.’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을 무렵.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붉은 포탈이 열리면서 세 명의 인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하나같이 연우의 피부를 따끔거리게 할 만한 강자들.

‘제법 강한데.’

특히 세 명 중 가장 중앙에 서 있는 흑발의 사내는 연우로서도 쉽게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만큼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순간.

두근!

연우의 심장께에 자리 잡은 드래곤 하트가 크게 요동쳤고.

흑발의 사내도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두 눈을 부릅뜨면서 이쪽을 홱 하고 돌아봤다.

하지만 연우와 달리 그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그때는 연우가 재차 마력을 갈무리하고 인파 속에 몸을 숨긴 뒤였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흑발 사내가 무언가를 찾기 위해 연신 두리번거리자, 그와 같이 왔던 묘령의 여인이 머리끝을 손으로 돌돌 말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발 사내가 짐짓 굳은 얼굴로 물었다.

“66층, 분명히 폐쇄되었겠지?”

“무슨 소리야? 시스템 권한으로 락이 걸린 걸 마지막으로 확인한 게 바로 너면서?”

여인은 ‘얘가 왜 이러나’ 싶은 얼굴로 바라봤고.

같이 온 세 사람 중 나머지 한 사람이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왜 그러나? 놈들의 기척이라도 벌써 감지한 겐가?”

흑발 사내는 여전히 미련이 남은 듯한 얼굴로 주변을 더 둘러보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아무래도 내가 잘못 느낀 모양이야.”

갑자기 드래곤 하트가 공명을 하는 듯하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었는데, 아무래도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곳에 동족이 있을 리가 없겠지. 흑발 사내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가정에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여름여왕을 끝으로 용종이 멸종하면서 마룡의 개체 수도 급감한 이때. 만약 동족이 움직였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최초이자 모든 마룡들의 왕이기도 한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그를 자극할 정도라면 실력도 그만큼 뛰어나야 할 텐데…… 그만한 존재가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러니 잘못 느낀 게 분명할 것이다.

무언가를 느꼈어도, 아마 66층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하양과 마지막 열쇠의 기운을 감지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서늘하게 남은 위화감은 왜 이리도 피부 끝을 여전히 찌릿찌릿하게 만들고 있는 건지.

흑발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전군에 걸쳐 포위망을 움직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디아블로로군.』

흑발 사내를 한순간 긴장케 했던 연우는 움직이는 포위망 속에 묻힌 채로, 여전히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절대 정체를 모를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진의 디아블로.

관리국장인 인의 클루스와 함께 ‘최강’의 수식어를 지닌 존재.

그리고 녀석과 같이 온 다른 두 사람도 같은 최고 관리자들이었다.

유(酉)의 라피스 라줄리.

오(午)의 로시난테.

라피스 라줄리는 원래 탑의 초창기 시절부터 존재했다고 알려진 존재로, 오늘날 마법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대연산식(大演算式)을 창안한 대마도사 출신이었다.

그리고 로시난테는 겉보기에는 이성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검을 쥐는 순간 저돌적인 성격으로 변하는 광전사(Berserker).

디아블로까지는 아니더라도, 까다로운 존재들인 건 분명했다.

‘애당초 최고 관리자들부터가 한때 탑 내에서 최고 자리에 오르거나, 탈각을 시도하다 올포원에 부딪쳐서 넘어간 이들이 대부분이니.’

괜히 관리국이 천계, 올포원과 함께 3대 균형 축을 이루는 게 아니었다.

그런 곳의 수장이니만큼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관리국은 결국 이블케와 라플라스를 비롯한 반란군 손에 넘어가고 말았고…… 시의 바다는 이걸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올포원마저 대체하려고 한다. 그래서는 3대 균형 축 중 2개가 녀석들에게로 넘어가고 말아.’

연우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천계와 직접적으로 전쟁이라도 치르려는 건가? 아니면 다른 뭔갈 꾸미고 있는 걸까? 이블케, 대체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이블케가 관리자들 중에서도 가장 비밀이 많은 존재라지만, 이건 도저히 그 속내를 짐작하기 힘들지 않은가.

대강이라도 추측할 만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짚이는 게 없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어. 무언가를.’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한 단어.

‘시(詩).’

시의 바다는 ‘시’라는 문장을 통해 서로를 알아본다. 하지만 정작 그 ‘시’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연우도 그동안 궁금해하지 않았었고.

하지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종말’이나 ‘그분’, 그런 단어 따위가 자꾸 귀에 거슬린단 말이지.’

기억 한편, 어디선가 익숙한 단어들이었으니까.

『레온하르트.』

『왜 그러지?』

『시의 바다가 말하는 ‘시’라는 것. 대체 그게 뭐지?』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레온하르트에게 물었고.

『나도 정확하겐 모르지만…… 일종의 예언서라더군. 세계 종말에 대해 언급하는 예언서.』

연우는 어디서 그런 말들을 들었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타계의 신!’

기어 다니는 혼돈이 몇 번이고 운운하지 않았던가.

종말에 대해서.

-모든 우주와 차원의 지식이 총망라된, 태초의 거룩한 말씀과 종말의 성스러운 예지가 담긴, 역사와 시공의 기록이 한낱 필멸자 따위가 감내할 수 있는 물건이라 여기는 것인가? 미쳤구나! 광오하도다, 인간!

타계의 신이 말하는 종말이란 그들의 ‘아버지’, 칠흑왕이 눈을 떠 세상을 멸망시킬 때를 가리킬지니.

달의 아이 하르모니아 역시 자신처럼 칠흑왕의 후예였다.

‘그럼 놈들이 말하는 ‘시’라는 게 계시록을……?’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던 그 순간.

“……온다.”

별안간 무언가가 느껴졌다.

익숙한 기질.

아난타 일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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