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시(詩) (7)
-놈들의 포위망이 너무 조밀해졌어. 더 이상 숨어 있는 걸로는 안 될 것 같으니…… 뛰게.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팟-
아난타는 등에 하양을 업은 채로 뛰었다. 용종의 피를 물려받은 까닭에 의지만으로도 구현되는 기초 마법들은 달리는 속도를 더해 주고, 힘을 증강시켰으며, 실드를 겹겹이 쌓아 외부 충격을 튕겨 내는 중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공격들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반격을 가하기도 어려운 상황.
다행히 목에 건 회중시계가 빠르게 돌아가면서 차정우의 사념체가 발현한 마력이 마법을 강화시켜 주고 있고, 이따금 현신(現身)까지 하면서 적들을 물리치고 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아난타는 달려야만 했다.
장애물이 있어도, 언덕이 있어도, 포위망이 아무리 두껍게 보인다고 해도, 오로지 직선으로.
저만치 앞에서 대장로가 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달려드는 작자들 모두가 탑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들이며 시의 바다가 자랑하는 최정예들이었지만, 대장로는 그들을 상대로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압도적인 힘을 선보이고 있었다.
쾅!
발을 구를 때마다 장장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반이 내려앉고, 하늘에서는 핏빛 벼락이 쉴 새 없이 빗발치면서 포위망을 몇 번씩이나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콰르릉-
정권을 내지를 때마다 불어닥친 광풍과 강기로 이뤄진 소낙비는 닿는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뜯어 버렸다.
벼락, 광풍, 호우…… 그야말로 폭풍우가 따로 없었다.
66층을 형성하고 있던 도시는 이미 거의 다 부서진 지 오래였으니.
핏빛 현자.
무왕의 명성에 가려지고 세월에 흐려져서 그렇지, 그도 한때 탑을 손에 쥐었던 존재가 아니던가.
당연히 충분히 탈각과 초월을 논할 수 있는 고수였으며.
이깟 놈들 따위는 한 트럭으로 가져다 놓는다고 하더라도, 절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콰콰콰쾅!
중앙 관리국과 시의 바다에서도 어떻게 제대로 제재를 가할 수 없었던 존재.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양이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 괜히 잘 숨어 다니기만 해서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무왕만 괴물인 줄 알았는데, 저 영감님도 참 대단하단 말이지.』
차정우의 사념체는 회중시계에서 아난타를 돕다 말고, 이따금 대장로의 압도적인 신위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수십 번도 넘게 본 전투였지만,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찌릿찌릿해질 정도였다.
핏빛 벼락을 부르며 세상을 찢어발기는 존재.
무왕이 전장을 휘어잡으면서 무, 그 자체로써 적들을 압도하는 무신(武神) 혹은 전신(戰神)이었다면, 대장로는 투신(鬪神)이었다. ‘싸움’이라는 범주 안에서는 무왕도 그에게 한 수를 접어 줘야 하지 않을까?
외뿔부족은 대체 어떻게 된 집단이길래 저런 괴물들을 하나도 아닌, 둘이나 배출할 수 있었던 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말도 안 되는 일족인 게 분명했다.
『저 양반이 탈각이나 초월을 한다면, 대체 어떻게 되려나?』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또 이번엔 어떤 일이 빚어질 것인가.
그런 생각을 뒤로 한 채.
쿠릉, 쿠릉, 쿠르릉-
콰르르르!
이미 몇 번이고 스테이지를 박살 내고도 남았을 충격파가 휩쓸고 지나갔다. 붉은 섬광이 연신 번쩍이다 나타난 광경은 모두를 떨게 만들었다.
“……미친.”
“저런 걸 뚫고 대체 어떻게 접근하라는 건지.”
다행히 충격파에 휩쓸리지 않거나, 가까스로 몸을 내뺄 수 있었던 플레이어들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대장로를 바라보았다.
“더 있나?”
대장로는 그런 놈들을 돌아보면서 손을 까닥거렸다. 그을음만 조금 묻은 채로 손을 까닥이는 모습은 별반 지쳐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오른손은 뒷짐을 쥐고 있는 모습이 마치 그들을 도발하는 듯해 더 화나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보는 사람들을 한층 두렵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크하하핫!”
갑자기 커다란 웃음소리가 쩌렁 쩌렁하게 울리더니, 하늘에서부터 막강한 기세가 퍼졌다. 뭔가가 대장로가 흩뿌리고 있던 혈뢰를 모조리 밀어 버리고 지상에 내리꽂혔다.
쾅!
덕분에 스테이지의 지면을 채우고 있던 낙진이 위로 붕 떠올라 희뿌연 안개를 만들어 낼 정도였다.
순간, 대장로의 눈살에 맺힌 주름이 더 깊어졌다.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작자가 나타났으니까.
오의 로시난테.
관리자들 중에서도 가장 미치광이인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처음 다른 관리자들과 함께 나타났을 때만 해도 이지적인 눈빛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것이 보이질 않았다.
“외뿔부족의 대장로, 아르하트! 그대는 이미 본 관리국에서 위험인물로 지정된바. 지금부터 구축에 들어가 주마.”
[중앙 관리국의 표결에 의해 시스템이 플레이어, ‘아르하트’를 위험군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시스템의 가호가 약화됩니다.]
낡은 안경 아래, 대장로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관리국이 언제부터 파벌 놀이를 하고 다녔는지 모르겠군. 되도록 플레이어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게 너희들의 기본 방침 아니었나?”
“방침과 정책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인지라.”
“그럼.”
대장로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
“도로 엎을 수도 있겠군.”
그 순간.
화아악!
한순간, 새로운 기세가 퍼져 나갔다.
여태껏 흘리던 투기와는 한껏 다른 기세.
대장로의 육체가 눈부신 배광(背光)으로 휩싸였다.
여태껏 선보이던 혈뢰의 선홍색과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로시난테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너, 설마……?”
“길을 열어야 하는지라.”
『로시난테! 놈을 막아라!』
그때, 디아블로가 다급하게 소리를 쳤다.
로시난테는 반문하지도 않고, 본능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꽉 쥐면서 빠르게 튀어 나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플레이어, ‘아르하트’가 탈각(脫殼)을 시도합니다!]
배광이 가라앉은 순간, 새로운 형태의 기세가 휘몰아쳤다.
신력이었다.
그리고.
콰아앙!
그런 배광을 뚫고, 대장로가 대포에서 쏘아진 탄환처럼 튀어나와 로시난테에게로 쇄도했다.
[탈각이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아르하트’의 계급이 ‘플레이어’에서 ‘반신(半神)’으로 상향 조정 되었습니다.]
……
[초월을 준비 중입니다.]
……
[66층이 반신, ‘아르하트’의 임시 성역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고작 반신, 데미갓을 이뤘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대장로는 이미 66층의 스테이지를 자신의 성역으로 삼고 있었다.
그만큼 그가 이룬 경지며 격이 다른 존재들을 압도한다는 뜻. 움직임도 그만큼 빨라 단숨에 로시난테에게로 치닫고 있었다.
로시난테는 반사적으로 대각선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대장로는 관성의 법칙을 무시하고 달리던 도중에 멈춰서 검을 회피, 그러고는 손을 벼락처럼 뿌려 녀석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녀석이 입고 있던 흉갑이 우그러지면서 박살 났다. 조각들이 허공으로 수도 없이 튀어 올랐고, 충격이 내려앉은 자리에는 사람 머리통만 한 바람구멍이 뚫려 있었다.
[시스템 오류!]
[시스템 오류!]
[알 수 없는 영향으로 인해 데이터를 복원할 수 없습니다.]
원래 관리자는 시스템의 의지를 대변하는 존재. 때문에 상처를 입어도 시스템에 의해 ‘데이터 복원’이 이뤄져야 하지만, 대장로가 심은 신력이 이를 방해하면서 오류를 일으켰다.
결국 로시난테는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면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즉사하고 만 것이다.
최고 관리자의 죽음.
그것도 한낱 플레이어가, 아니, 반신이 해냈다고?
천계의 초월자들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그들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신의 사회가 큰 충격에 빠집니다.]
[대부분의 악마의 사회가 외뿔부족에 대한 진지한 검토를 하고자 합니다.]
플레이어들은 물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천계까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충격에 빠진 가운데.
화르륵!
하늘에서부터 브레스가 잔뜩 쏟아졌다.
어느새 본체로 돌아간 디아블로가 하늘에서 아가리를 젖혔다가 내리고 있었다. 쉴 틈을 주지 않고 곧장 대장로를 치워 버리고자 한 것이다.
더불어.
[최고 관리자, ‘유(酉)’가 축복을 내립니다!]
[관리국의 가호가 따릅니다.]
[관리국의 축복이 따릅니다.]
……
[가호와 축복이 더해진 대상들의 상태가 ‘광란’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라피스 라줄리가 대연산식을 바탕으로 광역 마법을 걸었다. 거기다 관리국의 권한을 이용, 시스템의 보호까지 더해지면서 마법의 위력은 몇 배로 증폭하고 말았다.
거기에 노출된 플레이어들은 두 눈을 까뒤집은 채로 다시 열의를 불태웠다.
이 힘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그런 자신감이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대장로는 사방으로 내뻗었던 신력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응집된 기운이 꽉 쥔 손끝에 걸렸다.
‘이번에는 쉽지 않겠는데.’
탈각을 이루면서 증폭된 기운을 휘몰아쳐 로시난테를 제거하긴 했지만, 디아블로와 라피스 라줄리까지 전부 한꺼번에 상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
더구나 시스템의 권한이 자꾸만 방해를 하고, 아난타와 하양이 탈출할 수 있도록 길까지 열어야 하는 촉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대로는 힘들었다.
중과부적. 한 손이 열 손을 한꺼번에 당해 내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초월까지 가야 하나?’
찰나의 순간 동안, 대장로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초월을 이루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뒤.
과연 신격을 달성하고 나서도 이들을 한꺼번에 물리치는 게 가능한가? 안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가능하다면 그 뒤에는? 과연 존재를 유지하는 게 가능한가?
올포원이 지난 2년 동안 알 수 없는 이유로 행동을 멈췄고, 77층에서 두문불출 중이긴 하다. 녀석이 막으러 오지 않으리란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판트가 제대로 성장할 때까지 외뿔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당연히 함부로 결정을 내리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디아블로를 상대로 여유를 부리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짓이기 때문에, 대장로는 초월을 시도하려 했다.
그래야만 한순간이라도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스테이지를 잠식합니다!]
관리자와 플레이어들의 머리 위로 공통 메시지가 떠오르더니.
채채챙!
퍼버벅-
별안간 대장로와 아난타 쪽으로 포위망을 형성하던 플레이어들 중 상당수가 흠칫하더니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컥!”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윌슨! 이게 무슨 짓인가!”
그 때문에 갑작스레 급습을 당한 플레이어들 중 상당수가 급소를 찔려 죽거나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들의 그림자가 불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스테이지의 모든 권한에 대해 무단 침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방화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권한이 침해되었습니다.]
……
[주의! 버그가 발생하였습니다!]
[주의! 버그가 발생하였습니다!]
……
[버그로 인해 시스템의 가호가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부여된 모든 효과가 사라집니다!]
……
[축복이 취소되었습니다.]
[가호가 취소되었습니다.]
……
[알 수 없는 이유로 ‘시의 바다’ 소속 플레이어들의 상태가 ‘광란’에서 ‘혼란’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광역 마법이 강제 취소되었습니다.]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우웨에엑!”
라피스 라줄리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피를 한가득 토해 냈다. 마법이 강제로 취소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가 손대고 있던 시스템 권한까지 모조리 차단되면서, 모든 페널티가 고스란히 그녀에게 주어진 까닭이었다.
이는 당연히 마력 기관을 넘어서서 격이 붕괴될 정도로 끔찍한 충격을 낳을 수밖에 없는바.
치직, 치지직-
라피스 라줄리의 몸뚱이는 노이즈가 잔뜩 껴서 금방이라도 존재가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굴었다.
『라줄리!』
디아블로는 그런 동료를 뒤늦게 눈치채 내뱉던 브레스를 도중에 멈추고 그쪽을 돌아봤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메시지에 공통적으로 적힌 단어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알 수 없는 힘(Unknown Effect)’ 혹은 ‘이유’라고 명시된 문구.
그건 시스템도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이, 직접 ‘시스템에 영향을 끼쳐’ 이런 참상을 빚어냈단 뜻이었다.
관리자들의 간섭을 배제한 채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모르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디아블로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놈이다! 무리에 숨었던 그놈……!’
관리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스템의 권한을 직접 잘라 낼 수 있다면 큰일이 벌어지고 만다. 관리국이 필요 없게 되어 버리는 셈이니까.
그리고 그건 나아가 시스템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하는 시의 바다에게도 천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
하지만 디아블로는 이런 모든 참상을 벌인 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 먼저.
촤아악!
어느새 지면을 어둡게 덮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높게 일어났다.
[경고! 이레귤러가 출현하였습니다!]
[경고! 이레귤러가 출현하였습니다!]
……
[경고! 알 수 없는 힘이 막강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
[알 수 없는 힘이 스테이지를 장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