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시(詩) (9)
콰아앙!
라플라스의 몸뚱이가 단숨에 튕겨 나면서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비록 디아블로처럼 완전히 찢어 놓지는 못하더라도, 적잖은 상처를 입었던 건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팟!
그런 녀석 앞으로 공허가 활짝 열리면서 연우가 나타났다. 한 손에 검붉은 뇌전이 번뜩이는 비그리드를 든 채로, 앞으로 깊숙하게 내찔렀다.
쿠르릉-
검뢰팔극은 어느새 오극(五極)으로 접어들면서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중이었다.
라플라스의 얼굴은 온통 짜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언제나 웃음기 가득하던 스킨헤드였지만, 지금만큼은 웃는 낯을 유지하기 힘든 듯 보였다.
“그래도 저에게는 은인이기도 하고 해서 봐 드리려 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에서 최고 관리자를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잃었으니까. 이는 그들로서도 적잖은 피해였다. 특히 자신이 지키는데도 불구하고 디아블로를 잃은 건 오만이 부른 참사나 마찬가지였다.
“이래서야 짜증 나서 더 이상 그러기도 힘들잖아용!”
검뢰가 닿기 직전, 라플라스의 몸뚱이가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터졌다. 그리고 휘몰아 치는 막강한 기운은 그 자리에다 끝도 없이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그림자를 토해 냈으니.
그것은 괴물이었다.
한 치의 앞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어두운 안개 사이로, 수천수만 개의 다발로 이뤄진 촉수가 드글거리고 수십 개의 눈이 끔뻑이고 있는 이형(異形)의 괴물.
타계에서나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 혼돈과 무질서가 빚어낸 창조물은 일찍이 연우도 마해에서 본 적이 있던 라플라스의 본체였다.
녀석은 연우가 있는 쪽으로 촉수를 거세게 내리쳤다. 해(亥)의 루피를 단박에 때려잡았던 충격파가 검뢰오극과 부딪치면서 사방으로 폭발이 번져 나갔다.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검은 안개 곳곳으로 수도 없이 많은 명멸이 맺히길 반복하고.
이. 블. 케. 는.
오. 라. 고. 하. 지. 만.
저.는.
절. 대. 안. 봐. 줘. 용.
그어어어-
라플라스는 엄청난 양의 사념을 마구 발산하면서 스테이지를 마해와 비슷한 환경으로 뒤바꿔 놓고자 했다.
〈최고 비상 권한 발동〉
〈심상 개변〉
[최고 관리자의 요청에 따라, 66층에 주어진 모든 환경적 조건이 변화합니다!]
마해의 왕이 부리는 심상 개변만 하더라도 보일 수 있는 권능이 절대 작지 않을 텐데, 거기다 최고 관리자로서의 권한까지 사용하니 스테이지 전체가 들썩였다.
비록 연우 뻗은 그림자로 뒤덮였다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스테이지의 본질은 시스템에 있는바. 그것을 직접 작동하니 여태껏 보이던 스테이지 환경이 전부 뒤바뀌었다.
그렇게 나타난 곳은 마해였다.
수많은 마물들이 득실거리던 곳.
끼아악!
꺅! 꺄아악!
물결이 거칠게 출렁일 때마다 기괴한 울음소리가 퍼지면서 온갖 기괴한 형태를 자랑하는 괴물들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라플라스의 명령에 따라 오로지 연우를 잡아먹고 말겠다는 일념만 머릿속에 담은 것들이었다.
하나하나가 이미 웬만한 신격들쯤은 쉽게 잡아먹을 수 있는 것 들이었지만.
「주군에. 게. 살의를. 드. 러 내는. 자. 죽어. 마땅하. 다.」
연우 뒤편으로 공간이 갈라지면서 두 개의 인페르노 사이트가 나타나더니, 곳곳에서 공허가 열리며 권속들이 줄지어 쏟아졌다.
샤논과 한령, 레베카 등, 이제는 연우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는 것들. 연우가 음령을 달성하고 ‘죽음’의 개념에 더 가까워지면서 더더욱 깊은 어둠을 간직한 이들이 일제히 마해로 뛰어들었다.
죽음의 권속들과 이형의 괴물들이 한데 뒤엉켜 난전을 치르는 모습은 마치 세상의 종말을 그린 성화를 보는 듯, 기괴하면서도 찬란하고, 또한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리고.
[죽음의 태엽이 감기는 속도가 더욱더 빨라집니다!]
연우는 이참에 확실하게 라플라스를 잡아 놓겠다는 듯, 더 맹렬한 속도로 죽음의 태엽을 감았다.
그 순간.
찰칵, 찰칵-
체내 곳곳에서 무언가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맞물린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더 빠른 속도로 회전합니다!]
[연쇄 작용으로 더 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닿았습니다!]
[현재 맞물린 톱니 수: 666개]
[모든 죽음의 신들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들이 당신과 함께합니다!]
[‘죽음’의 개념이 작동합니다!]
그것을 만끽하면서.
“이곳으로 오라.”
연우는 언령(言靈)을 내뱉었다.
톱니바퀴란 ‘죽음’을 신위로 둔 신과 악마들을 의미하며.
그런 톱니바퀴들과 태엽이 함께 이루는 기계 장치는 곧 ‘개념’을 의미했으니.
이는 곧 연우가 죽음, 그 자체가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칠흑왕을 신봉하는 모든 죽음의 신과 악마들은 이제 연우를 단순한 후계가 아닌, 대역으로 인정하면서 그의 신하를 자청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우를 중심으로 뭉친 톱니바퀴와 태엽은 개념을 형성하면서, 연우에게 막대한 권능을 불어 넣는 결과를 낳았다.
동시에.
[6차 용체 각성]
[권능 전면 개방]
[하늘 날개]
콰드득, 콰득-
골격이 이리저리 뒤틀리면서 등 뒤로 하늘 날개가 뒤섞인 용의 날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턱밑까지 올라온 용의 비늘은 이제 칠흑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칠흑색의 비늘과 황금색의 눈이 요요하게 빛날수록.
쿠쿠쿠쿠!
그를 따라 퍼져 나간 기세는 이제 층계를 뒤흔들다 못해 공간을 이리저리 휘둘러 대면서 곳곳에다 왜곡장을 형성할 정도였다.
칠. 흑. 을.
깨. 운. 건. 가. 용.
라플라스는 그런 연우를 보면서 눈에 이채를 뗬다. 수십 개의 촉수가 다발로 묶이면서 다섯 개의 손가락을 단 거인의 손처럼 변해 연우를 덮칠 듯 노려 왔다.
휘리릭!
연우가 해체시켰다가 재조립한 건, 자신의 데이터와 자아만이 아니었다.
그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들.
그중에는 당연히 칠흑왕의 형틀도 있었다.
연우에게 죽음이라는 개념을 가르쳐주고, 수많은 권속들을 안겨 주었으며…… 또한, 공허와 칠흑에 대해서 알려 주었던 것.
이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꾸면서. 음령에 귀속시키면서 드디어 새로운 속성을 터득한 것이다.
“원래는 올포원을 상대할 때에나 선보이려던 것이지만.”
츠츠츠-
연우를 따라 감도는 칠흑색의 기운들이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그 쪽에게 먼저 보여 주도록 하지.”
[‘죽음’이 당신을 좋습니다!]
[공허 속에 깊이 잠든 칠흑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연우는 어느새 칠흑색으로 가득 물든 비그리드를 횡대로 휘두르고 있었다.
공간이 길쭉하게 찢어지면서, 사선에 노출된 녀석의 촉수들이 갈대처럼 무수히 잘려 나갔다.
하지만 라플라스의 공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잘린 단면에서 훨씬 많은 촉수들이 분화하여 달려들고, 검은 안개는 아래에서부터 그림자를 꾸역꾸역 밀고 들어와서 크고 작은 눈들을 떴다.
수백 개의 눈들은 하나같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칠흑을 깨웠다는 것.
아무리 일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는 ‘극권의 군주’라고까지 불렸던 최고 외신의 후예이지 않은가.
최고 관리자가 아닌, 타계의 신으로서는 칠흑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안. 되. 겠. 네. 용.
어느새 연우에 대한 짜증은 그에 대한 관심과 흥미로 변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대체 지난 2년 동안 연우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역. 시.
당. 신. 은.
재. 미. 있. 어. 용.
끼아아, 하하하!
라플라스가 내뱉은 괴상한 웃음 소리가 스테이지를 몇 번이고 흔들어 놓았다.
* * *
『이런 기분, 간만에 아주 좋은데?』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연우의 귓가에 울린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폐관 수련 동안 연우와 대화를 나눌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깊은 잠에 들었고, 그 여파로 연우가 깨어난 뒤에도 여태껏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합일과 함께 권능이 강화되면서 자극을 받아 저절로 깊은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연우와 라플라스가 빚어내는 전투를 아주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쿠릉, 쿠르릉!
콰콰콰콰-
처음에는 라플라스의 본체가 가진 기괴한 형태를 보고 저게 뭐냐며 질겁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곧 태엽을 통해 전해지는 막강한 기운에 크게 기뻐했다. 신위를 넘어서 개념이 직접 움직인다는 것.
그것이 주는 달콤함은 마약이나 다를 게 없었으니까.
세상의 법칙을 직접 움직인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콰르르릉-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죽음의 태엽이 더 맹렬한 속도로 회전합니다!]
[죽음의 태엽이 감기는 속도가 한계점에 다다랐습니다.]
[죽음의 태엽이 과부하 상태에 잠겼습니다. 마찰열로 인해 톱니 부분이 마모되기 시작합니다.]
……
[주의! 임계점에 다다랐습니다!]
[주의! 임계점에 다다랐습니다!]
……
[죽음의 태엽이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보수 작업이 이뤄집니다.]
[죽음의 태엽이 새로운 형태로 강화되었습니다!]
[죽음의 태엽이 온전하게 작동합니다!]
[태엽의 존재감이 확산됩니다.]
여태껏 연우를 보조하는 역할로만 그쳐야 했던 죽음의 태엽이, ‘죽음’이라는 개념의 중심에서 엔진 역할을 맡게 된다는 점이었다.
신왕(神王).
한때, 천계를 휘어잡으면서 여러 고대신과 개념신들과도 자웅을 겨루었던 크로노스가, 드디어 까마득한 세월을 넘어 격을 복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죽음의 태엽이 새로운 형태를 갖추면서 ‘비그리드’가 새로운 진명(眞名), ‘크로노스’로 변모합니다!]
콰르르르릉!
육극(六極)과 함께 삐져나온 검뢰가 단숨에 연우의 앞을 가로막던 안개와 촉수들을 전부 찢어 버렸다.
여전히 시간의 태엽이 완전히 복구되질 않아 아직까지 ‘진짜’ 크로노스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죽음의 신위를 두고 봤을 때는 전성기 시절의 그가 돌 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을 따라 흐르는 흐름이, 누군가는 ‘천기(天機)’라고 부를 거대한 흐름이 연우를 중심으로 조금씩 왜곡되고, 방향을 크게 바꾸면서 법칙을 강제하는 것이 보였다.
본인이 지닌 소우주를 외부로 확장해서 세상의 흐름을 의지대로 바꾸는 것.
단순히 의념을 세상에다 아로새기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뒤틀고 있는 것이다.
의념 통천보다도 더 한 발 나간 것이 바로.
‘음검(陰劍)이라!’
크로노스는 무릎이 있다면 크게 두들기고 싶었다.
몇 번이고 느낀 것이지만. 권능이나 신위를 빌리지 않고도, 이렇게 세상에 간섭할 수 있는 기예를 개발해 낸 소호 금천이라는 존재가 참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개량하여 연우에게 전달한 무왕이란 존재 역시도!
『막내아들이 이렇게까지 발전하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까!』
연우는 껄껄 웃어 대는 크로노스의 웃음소리를 귓등으로 흘려 들으면서.
“아주버님!”
아난타가 이곳을 보며 던진 것을 단번에 낚아채고, 그것을 손목에 감긴 쇠사슬과 함께 연결시켰다.
찰칵!
[시간의 태엽과 연결되었습니다.]
[태엽이 많이 망가진 상태입니다. 기능 중 상당수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신력이 부여되어 기능 중 일부를 복구합니다.]
째깍, 째깍-
시계 바늘이 빠르게 돌아가고.
[시간의 태엽이 작동합니다!]
[2배속으로 빨리 감기 됩니다. 광속화(光速化)가 이뤄집니다.]
화아악!
팟-
연우는 어느새 공간을 열어젖히면서 눈앞에 난 길을 단숨에 통과했다. 짙게 깔린 검은 안개 사이로 라플라스 본체의 거대 눈동자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 위로.
콰아아앙!
비그리드가 깊숙하게 꽂혔다.
칠흑의 입자가 흩날리면서 흔들거리는 앞머리 사이로, 연우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삼켜라.”
간단한 시동어와 함께.
쿠쿠쿠쿠!
[‘하데스의 식령검’이 플레이어, ‘라플라스’에 대한 식령을 시도합니다!]
비그리드를 통해 라플라스의 본체로 번져 나간 칠흑이 탐욕스럽게 톱니 이빨을 훤히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