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38화 (638/862)

13화. 시(詩) (10)

검은 그림자와 완전히 동화된 하데스의 식령검은 이미 단순한 권능의 범주를 넘어서, 이제 자체적으로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게걸스럽게 라플라스의 본체를 먹어 치우는 거대 톱니 이빨에서는 식탐만 잔뜩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워낙에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기 때문일까, 먹어 치우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끼아아아!

끼끼긱!

톱니 이빨이 움직일 때마다 라플라스의 본체에서 울려 퍼지는 기괴한 울음소리는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은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었지만, 또 어떻게 보면 희열에 찬 웃음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하. 하.

재. 미. 있. 어. 용.

아니, 그건 웃음소리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존재가 잡아먹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라플라스는 아주 크게 웃고 있었다. 사념에 가득 담긴 희열은 유열(愉悅)의 수준을 넘어서 열락(悅樂)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보통 식령의 위기에 빠진 녀석들이 보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

『이놈, 완전히 미쳤구나, 아들아.』

‘공감입니다.’

새카만 스킨헤드에다 토끼 귀를 달고 있을 때부터, 중저음으로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낼 때부터 진즉에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웬만한 미친놈들을 많이 보아 왔다고 자부하는 크로노스도 라플라스만큼은 질린 눈치였다.

계속 상대하고 있다가는 정말 덩달아 미칠 것 같은지라, 연우는 녀석의 눈깔에다 박은 비그리드를 더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야! 그만 밀어! 자꾸 이 끔찍한 새끼 감촉이 느껴지잖아!』

‘누가 검의 형태를 계속 유지하라고 했습니까?’

『뭐야? 이놈의 새끼가……!』

연우는 크로노스가 길길이 날뛰건 말건 간에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비그리드를 그대로 거세게 내리그었다.

검뢰가 다시 한번 더 터졌다. 녀석의 거대한 몸뚱이를 따라 검붉은 불길이 사선 모양으로 쭉 그어졌다.

녀석을 어떻게든 더 잘게 쪼개어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하데스의 식령검에 먹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의 태엽이 감기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현재 속도는 4배속입니다.]

……

[시간의 태엽이 감기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습니다!]

[현재 속도는 8배속입니다.]

[신체에 막대한 과부하가 전해집니다!]

푸화악!

활짝 열린 틈 사이로 역겨운 냄새를 풍겨 대는 체액이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하나하나가 혼돈의 성질을 띠고 있어서 닿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녹아내릴 수 있는 독극물들.

하지만 그것들은 연우에게 닿기도 전에 이미 그를 따라 감도는 엄청난 열기에 증발해 사라졌다.

물론, 설사 닿는다고 하더라도 무채독이 있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 그의 체질은 음령(陰靈).

오히려 이런 것들이 그에게 효과적일 때도 있었다.

하. 하. 하.

하. 하.

그렇게 갈기갈기 조각나고 있는 와중에도, 라플라스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와 함께 촉수가 튀어나오고, 심상 개변과 함께 갖가지 이적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며 연우를 방해하려 들었지만 결코 그를 둘러싼 망령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만하라고, 이것아!』

콰쾅, 콰콰쾅-

『아아악! 막내라고 낳은 아들 녀석이 아버지를 끈적끈적하고, 어둡고, 막 이상한 데에다가 밀어 넣어서 학대한다! 이게 고려장이 아니고 무엇이냐!』

크로노스의 절규가 이어지는 것은 덤이었다.

『이거 진짜 기분 나쁘다고! 그만해!』

그러다.

스걱!

마지막으로 비그리드가 열어젖힌 눈깔 안쪽에는, 스킨헤드의 토끼 귀 흑인이 이상한 세포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런. 정말 여기까지 오셨네용?”

라플라스는 ‘짝!’하고 박수를 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가가 씰룩대고 있는 것이, 죽음의 위기에 놓여서도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연우는 이 기괴한 취미를 가진 변태를 내버려 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아,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머리통이 있는 쪽으로 비그리드를 휘둘렀다.

“스토옵!”

바로 그때, 녀석이 갑자기 양팔을 높이 위로 번쩍 들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비그리드의 날카로운 칼날이 목젖 앞에서 바로 멈췄다.

“뭐지?”

“항복할게용! 그러니 봐주시죵?”

연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여태껏 실컷 싸워 대고, 그렇게나 방해를 해 놓고서. 뭐? 항복?

“말하라는 건 다 말해 주고, 협력하라는 것도 다 할 테니까, 이 칼 좀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용?”

“…….”

“제 깜찍한 귀를 보시고도 해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건 아주 나쁜 사람이란 뜻이라구용.”

토끼 귀가 귀엽게 움찔움찔 떨렸다. 그러면서 가지런히 모은 양손을 입가에다 붙이며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눈을 끔뻑끔뻑하는 모습이…… 당장에라도 대갈통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는 흑인 근육 마초남이, 비음 섞인 중저음 목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려 봤자 끔찍하기밖에 더할까. 그런 녀석을 보면서. 연우는 라플라스의 목 바로 앞에 대고 있던 비그리드를 내렸다.

“좋아. 봐주지.”

“오. 그럼……!”

“대신에 조건이 있다.”

“뭐죵?”

연우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일단 죽어.”

퍽!

[플레이어, ‘라플라스’를 식령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죽음의 개념이 ‘라플라스’에 새겨지는 데 성공했습니다.]

[모든 죽음의 신들이 만족합니다.]

[모든 죽음의 악마들이 기꺼워합니다.]

* * *

「이것 참, 우리 사이에 너무하시단 말이죵. 어떻게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토끼 귀를 가진 생명체에 칼을 갖다 댈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죵? ### 님은 분명히 전생에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이었을 게 분명해용.」

살라샬라.

중얼중얼.

망령으로 다시 깨어난 라플라스는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비 맞은 중처럼 자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분명히 항복 의사를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일단 칼부터 휘두르고 본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외형은 크게 바뀌지 않은 상태였지만.

연우는 제발 그딴 괴상한 차림을 그만하라고 말했지만, 녀석은 도통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자신의 진짜 정체성이라나? 이 모습을 유지하게 해 주지 않는다면 절대 협조하지 않겠다고 어린애처럼 완강하게 버티는 통에 그냥 그러라고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연옥로에다 처박아서 악업이 전부 소진될 때까지 활활 태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서는 시간만 크게 지체하게 될 테니까.’

이미 시의 바다에서는 자신이 폐관 수련을 끝내고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터였다.

지금은 한시가 촉박한 상황. 녀석을 심문하는 데 시간을 허투루 날릴 수가 없었다.

녀석이 항복하겠다고 했을 때 잠시 멈칫거렸던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로 꿍얼대서야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네가 말하는 우리 사이가 뭔데?”

「무슨 사이겠어용. 우락부락한 근육과! 땀으로! 영혼의 교감을 나눈 절친 사이죵! 설마 그새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보내었던 그 즐거운 시간들을 잊으신 건가용?」

“…….”

연우는 한순간 녀석을 그냥 연옥로에다 처박아 버릴까 하는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아들아.』

그때, 크로노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취미였던 것이냐?』

‘…….’

근엄한 척하지만 속내는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말투였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진중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찌 그렇게 자상하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연우가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다시 저 변태 놈 안에 박히고 싶으신 게 아니면 조용히 계십시오.’

『…….』

크로노스는 계속 연우를 자극해서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뒤로 스리슬쩍 발을 뺐다.

『……내가 낳은 건 자식이 아니라 괴물이었어.』

크로노스의 시선이 토끼 귀 마초남에게로 향했다.

『그보다 저 시끄럽게 떠드는 놈 주둥이 좀 닥치게 해 줄 수 없겠니? 이러다간 정말이지 귀에 딱지가 앉겠구나.』

연우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그때, 아난타와 대장로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친 덴 없으신가요?”

“괜찮소.”

“제법 그럴듯해졌구나.”

대장로는 낡은 안경을 고쳐 쓰면서 연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연우가 지난 시간 동안 이룬 경지를 단박에 눈치챈 것이다.

외뿔부족의 태양지체와는 전혀 상반된 듯한 체질.

“결국 음검을 깨웠나 보지?”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대장로는 연우의 대답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얼굴.

지난 세월 동안 일족이 추구했던 음검의 비밀이 풀렸다는 사실에 소회가 남다른 것이겠지. 그리고 숙원을 해결해 준 대상은 무왕의 제자가 아니던가.

“녀석이 말했던 대로, 녀석의 신화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제자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었구나.”

대장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지금 너도 보았듯이, 나유 녀석에 이어서 나까지 이렇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올포원은 나서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시의 바다는 이 기회를 틈타 다른 걸 노리고 있지. 브라함은 그걸 저지하러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연우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천마증을 앓고 있는 주신들이 모인 자리에, 브라함도 간 겁니까?”

“맞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직접 들어가야 한다는 게 그의 말이었지.”

연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시의 바다. 올포원의 자리를 대체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는 그들의 자리에 뛰어든 건, 아마도 하르모니아에 대한 원망과 애증 때문이겠지.

아무래도 다음 이동할 장소는 온갖 주신들이 모여 있을 전장일 듯했다.

이번에는 지금처럼 쉽게 뛰어들기가 어려웠다.

시의 바다가 어떻게든 방해를 하려 들 게 분명하니, 정확한 속내를 알아내고 부딪쳐야만 했다.

“라플라스, 너희가 꾸미는 게 대체 뭐지?”

연우와 일행들의 시선이 전부 라플라스에게로 향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제게 관심을 가져 주시다니. 관종인 저는 너무나 기쁩니다용.」

“이 이상 장난치면 연옥로에다 처박고 다시는 안 꺼내 주지.”

「홍홍홍! 일단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갈게용. 이블케가 장악한 중앙 관리국은 정확하게 시의 바다로 넘어간 게 아니에용. 그냥 목적이 같아서 손을 잡았을 뿐이징.」

라플라스는 신나게 떠들어 댔다.

「두 곳이 바라는 바는 딱 한 가지예용. 기존 시스템의 무력화. 그리고 새로운 시스템의 탄생이에용. 리셋(Reset).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듯해용.」

“리셋?”

「맞아용! 올포원으로 대변되는 현 시스템은 시의 바다와 이블케가 장악한 중앙 관리국이 추구하는 바와 너무 차이가 나거든용.」

“너희들이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데?”

순간, 여태 장난기 가득하던 라플라스의 두 눈이 처음으로 깊게 가라앉았다.

「뭐긴 뭐겠어요. 현 질서의 붕괴지. 이블케는 올포원과 관리국, 천계로 이뤄지는 삼각 균형이 역동적이어야 할 탑의 사회를 정체시키는 근원악이라고 여기고 있거든용.」

삼각 균형의 붕괴……. 연우는 그제야 이블케의 생각이 어느 정도 엿보이는 것 같았다. 최초의 관리자이자, 국장이기도 했던 녀석은 그동안 기나긴 탑의 역사를 지켜봤을 터.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 어떤 이상을 품고 있다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 시의 바다는?”

「시의 바다가 바라는 바는 이블케의 이상보다 훨씬 간단해용. 종말이거든용.」

연우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시’라고 부르는 것.

종말록. 즉, 계시록의 끝부분을 실천할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은 하나.

천마가 탑의 저 밑바닥에다 처박아 두었다는 존재가 눈을 뜨기만 하면 된다.

그런다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단편의 꿈처럼 덧없이 사라지게 되리라.

“……칠흑왕을 부활시킬 생각인 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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