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창조신 (2)
‘이렇게 보니 참 멀리까지도 왔군.’
브라함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헛웃음을 흘렸다.
끝도 없이 넓게 펼쳐진 녹색 평원 위로, 하얀 빛무리가 속속 내려앉고 있었다.
[인스턴스 스테이지, ‘신들의 평원’에 신, ‘오딘’이 입장하였습니다!]
[인스턴스 스테이지, ‘신들의 평원’에 신, ‘마르두크’가 입장하였습니다!]
[인스턴스 스테이지, ‘신들의 평원’에 신, ‘옥황상제’가 입장하였습니다!]
……
신들의 평원.
시스템이 맹약 이행을 위해 임시로 만들어 낸 스테이지에는 그런 이름이 붙었다.
모든 맹약이 완수되고 나면 없어질 곳인데도 불구하고.
‘놈들이 가진 알량한 자존심이겠지.’
이곳에 입장하려는 이들에게는 두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첫 번째는 천마증을 앓았을 것.
두 번째는 각 사회에서 주신격이거나, 그에 걸맞은 위치에 앉았을 것.
즉, 스스로 ‘왕’의 자격을 입명할 수 있는 이들만이 설 수 있는 곳이었다.
신격 중에서도 가장 지고한 위치에 앉은 이들이다 보니, 자부심 이며 오만함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저들은 자신들만이 ‘진짜’ 신이라고 여기는 족속들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무리도, 다스리는 무리도 동등한 개체로 인정하지 않는 작자들.
과거에 이딴 꼬락서니가 싫어서 천계를 등졌던 적이 있었던 브라함이었기에, 또다시 그 꼴을 보고 있으려니 배알이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결국, 세상이 얼마나 넓고 대단한지를 모르는 우물 속의 개구리인 것이다.
탑에 갇힌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얼굴 상태가 여전한 걸 봐서는 아직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도 한때는 저런 것들과 똑같은 상태였으니 할 말은 없는 셈인가?’
브라함은 이제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 버린 수미산(須彌山) 시절의 범천(梵天) 때를 떠올리다가 쓰게 웃었다.
‘여하튼 여기서 어떻게든 결판이 날 거다, 이 말이렷다?’
곧 여기서 ‘진짜’ 창조신이 될 인물이 누군지, 하나로 통합된 시스템 키의 주인이 누가 될지, 올포원의 대체자가 누가 될지가 판가름 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뽑힌 이는 신의 진영을 대표하는 유일신(唯一神)이 되어 탑의 모든 것을 움켜쥐고, 천마에 대항하게 되는 것인가.’
브라함은 생각이 길어질수록 혀 끝이 많이 텁텁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에 끊었던 두꺼운 궐련이 문득 생각났다.
그리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끓어오르는 짜증과 허탈함을 어느 정도 가라앉게는 해 줄 테니까.
‘아니. 피워도 상관없으려나.’
골초였던 그가 궐련을 끊었던 건, 냄새가 싫다는 그녀의 말 때문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떠나고, 아난타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지금껏 손을 댈 생각도 않았던 것인데.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그녀가 살아 있었고, 그걸로도 모자라 이런 말도 안 되는 판을 만들어 내며 여태껏 자신들을 농락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굳이 계속 참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브라함은 아공간을 열어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간만에 냄새를 맡아 보니 피가 빨리 도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가볍게 튕겨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러다.
“……이것도 못할 짓이로군.”
브라함은 어린 세샤가 이쪽을 보며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제 할미를 닮아서 그런가, 부족원들이 궐련을 피우려 할 때면 쪼르르 달려가서는 잔소리를 해 댔었지. 그 때문에 외뿔부족에는 때아닌 금연 열풍이 불기도 했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이 다시 궐련에다 입을 댄다면…… 혼나겠지? 아주 많이.
결국 브라함은 쓰게 웃으면서 궐련을 바닥에다 떨어뜨리고, 발로 비벼 짓뭉갰다.
“하아!”
그래도 귀여운 세샤 얼굴을 떠올리고 나니, 짜증이 많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인스턴스 스테이지, ‘신들의 평원’에 ‘제우스’가 입장하였습니다.]
망막에 떠오른 메시지에 브라함은 고개를 높이 들었다.
‘올 놈들은 다 왔나.’
[맹약을 선언한 인원이 모두 참석하였습니다!]
[외부와의 연결을 모두 차단합니다.]
[맹약이 이행되는 동안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과 행위는 모두 삼가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위반 시, 시스템의 자체적인 판단하에 페널티가 주어질 수 있으 니 유의하십시오.]
[지금이라도 생각이 바뀌신 분들은 이탈 선언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10, 9, 8…… 1, 0.]
[총 0명이 이탈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럼 맹약을 시작합니다.]
[시나리오 퀘스트(유일신 탄생)이 생성되었습니다!]
[시나리오 퀘스트 / 유일신 탄생]
설명: 지금은 기록되지도 않는 아주 머나먼 과거, 전 우주와 차원을 지배하던 신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한 존재에 의해 모두 ‘탑’에 유폐되고 말았습니다.
그 존재는 신들의 손발을 구속하고, 권능에 제한을 두면서 자유를 강탈하였습니다.
이에 신들은 그 존재에게 집단으로 저항하거나 ‘탑’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만, 번번이 실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위대한 신들은 절대 포기를 하지 않았고, 까마득한 세월 동안 와신상담을 하면서 반격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당신들은 시의 바다와 나눈 ‘맹약’에 따라 깊은 잠에서 깨어났으며.
중앙 관리국이 그동안 분할되었던 12개의 시스템 키를 하나로 통합하고, 이것을 당신들에게 주겠노라고 약속한 것입니다.
통합된 시스템 키는 탑의 소스 코드에 접근하고 수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마스터키(Master Key)입니다.
또한 창생과 조화, 질서의 힘을 담은 만능 보구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자신이 바로 이 마스터키에 어울리는 주인임을 입증하십시오.
달성 조건:
1. ‘맹약’에 따라 배틀 로얄을 펼치십시오. 단, 종목은 무엇이든 관계없습니다.
2. 경쟁자의 자격을 박탈하고, 권능을 강탈하십시오.
3. 배틀 로얄에서 최종 1인으로 남으십시오.
제한 시간: -
제한 조건: -
보상:
1. 마스터키
2. 유일신(唯一神) 내정
한순간, 평원을 따라 살벌한 기운이 소용돌이를 치면서 서로 부딪치기를 반복했다.
쿠쿠쿠!
평원이 잘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만큼 그들에게 시나리오 퀘스트가 주는 압박감이 대단하단 뜻이겠지.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한평생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그동안 여러 개의 진영과 사회로 나뉘어 별 소득 없이 이합집 산만 반복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주신들이 바랐던 것은 딱 하나, 유일신의 자리였으니.
오로지 이 세상에서 자신만이 존귀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주제도 모르고 자신들의 머리 위에 서려고 하는 ‘황’을 끄집어 내릴 수 있는 위치가 되는 것이기도 했으니.
여기에 시스템 키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천계와 하계, 그리고 나아가 다른 우주와 타계의 신들까지 전부 발아래에 둘 수 있는 것이다!
‘탑을 더 이상 감옥이 아닌 자신의 성역으로 삼는 것…… 그게 바로 이놈들의 목표겠지.’
브라함은 주신들이 흘려 대는 살의 속에 숨겨진 탐욕을 읽고
헛웃음을 흘렸다.
제아무리 제 놈들이 잘났다고 으스대 봤자, 결국 하는 짓은 저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필멸자의 권력 집단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궐련을 괜히 비벼 껐나. 그런 생각이 들어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히는데.
『이게 누군가? 반편이이신 브라흐마가 아닌가?』
브라함은 옆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오랜만이군, 오딘.”
그곳에는 아스가르드의 수장이었던 오딘이 서 있었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잔뜩 문 채로.
시나리오 퀘스트는 시작되었지만, 배틀 로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로 간에 전력을 탐색할 시간이 필요했고, 괜히 먼저 나서다가 지쳐 어부지리를 내어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뭐?』
『브라흐마라고?』
『그놈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리고 오딘의 목소리를 들은 주신들은 서로를 경계하다 말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고한 자리를 내팽개치고 천것들이 머무는 하계로 내려간 반편이. 데바라는 거대 사회의 수장이고, 주신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막강한 권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훌쩍 떠나 버린 머저리.
그것이 바로 천계 내 브라함에 대한 평가였다.
그닥 이들의 이목을 사고 싶지 않았던 브라함으로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최약체인 자신을 희생시켜서 배틀 로얄을 촉발하려는 것 같은데…… 너무 뻔하다 못해 한심한 속내에 브라함은 헛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되레 그런 브라함의 모습을 주눅 든 것으로 판단한 오딘의 조소가 더 짙어졌다.
『타천을 했다고 들었었는데, 아니었나?』
“아니. 맞네. 보면 알지 않은가? 이미 한 번 죽기까지 해서 필멸의 격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중일세.”
브라함은 이왕에 들킨 이상,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의 목적도 보상으로 주어진 시스템 키에 있었으니까.
『그렇군. 잘도 그런 상태로 여기에 들어올 생각을 했어.』
오딘은 브라함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고는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래도 평원에 입장했으니 혹시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브라함의 상태는 처음 타천했을 때보다 더 ‘한심’해져 있었다.
‘성육신(成肉身)도 완전히 잃어버려서 인공 육체를 쓰고 있는 듯한데. 저걸 두고 뭐라고 했었지? 호문클루스? 하! 하여간 꼴이 참 우습군.’
오딘은 브라함이 신의 명예에다 먹칠이나 하고 다닌다 싶자 냉소밖에 나오지 않았다.
옛 추억을 생각해서 넓은 마음으로 대우해 주려 했지만, 이래서야 그럴 필요도 없잖은가.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한낱 벌레에 불과한 것이다.
‘그냥 치워 버려야겠군.’
오딘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한데, 자네는 천마증을 앓은 적이 없지 않았던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거지?』
신들의 평원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맹약’을 맺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데이터에 소스 코드가 조금이라도 감염되어야 하는데…… 오딘이 알기로 브라함은 주신이나 창조신 중에서 유일하게 천마증을 앓은 적이 없었다.
만약았다면 그들처럼 긴 수면에 빠졌을 테니까. 그들이 겨우 천마증의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꿈속에서 시의 바다와 맺은 ‘맹약’ 때문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직도 누워 있어야만 했을 터였다.
그런데 천마증을 앓기는커녕 성육신도 유지하지 못한 반편이 따위가 여기에 있다고? 뭔가가 이상했다.
오딘과 마찬가지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다른 신들도 그게 궁금했던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브라함은 그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어딘지 모르게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
“다들 잘못 알고 있나 보군.”
『음?』
“앓았었네. 나도.”
『뭐?』
오딘은 난생처음 듣는 말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다른 주신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하긴 다들 모를 수밖에. 내가 어딜 가서 떠든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거든 데바에 가서 물어보게. 다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 줄 터이니.”
오딘은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저런 반편이가 천마증을 앓았었다고? 대체 언제?
그럼 자신들은 여태 왜 모르고 있었지?
만약 그들이 모르고 있었다면, 떠오르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다.
다른 사회에서 알아차리기도 전에 천마증을 떨쳐 내고 일어났다는 것.
혹은.
‘그보다 우리가 탑에 갇히기 훨씬 이전에 이미 천마증을……!’
오딘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브라함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막강한 기세 때문이었다.
주신격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오딘조차도 흠칫거리게 만들 만한 마력의 폭풍.
여태 브라함을 언제 사냥할까 시기를 가늠하던 다른 주신들도 표정이 흠칫 굳고 말았다.
“정말이지, 아무도 몰랐나 보이. 사실 주신들 중에서 가장 먼저 이곳 탑에 갇혔던 존재가, 바로 나였다는 것을 말일세.”
오딘은 어떻게든 브라함의 기세를 물리치기 위해 뇌기를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녀석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브라함의 전신이 배광으로 흠뻑 젖어 들고 있었다.
탈각.
그리고 초월.
타천을 하고 말았지만, 이제 다시 격을 복구한 그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희들이 어쩌지 못하고 제발 살려 달라면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질질 짜야만 했던, 천마(天魔)의 첫 번째 강적 또한.”
화아아아!
쿠쿠쿠-
브라함, 아니, 데바의 3주신 중 창생을 담당하고 사바세계를 중재한다는 원신(原神) 브라흐마가 그곳에 있었다.
그가 신의 목소리로, 일갈했다.
『이 몸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