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41화 (641/862)

16화. 창조신 (3)

“초, 초월을……?!”

『브라흐마가 다시 나타난 건가!』

『……이렇게 되면 일이 좀 복잡하게 흐르는데.』

타천했던 존재가 다시 신격을 되찾는 경우가 있었던가? 과거에는 아주 드물어도 종종 있었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탑이 생겨난 이래로는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브라함이 그걸 해내고 말았으니.

여기에 대해 다들 경악하고 만 것이다.

사실 브라함의 이런 각성은 늦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와 주종 관계를 맺었던 연우의 격이 완숙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되면서, 다른 권속들은 이미 신위를 얻은 지 오래였고, 부-파우스트는 외신에까지 근접한 것과 다르게 브라함은 여태껏 각성을 시도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외뿔부족 마을에서 세샤를 돌보느라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가 신격을 복원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데바’의 주신 자리에까지 앉아 봤던 그였기 때문에 신의 자리가 얼마나 귀찮은지, 그리고 그네들의 질투와 음모 따위가 얼마나 많은지 아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천계라면 아주 지긋지긋했다.

아니, 천계뿐만이 아니라 ‘속세’라는 것 자체가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하르모니아의 뒤를 쫓으면서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나온 순간, 그는 확실하게 깨닫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겠다고.

그가 원래 갖고 싶었던 것은 자유였지만, 책임질 것들이 생긴 이상 그런 자유에는 이제 제약이 생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제약이 예전처럼 싫거나 하지 않았다.

여전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저 이 의무감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하는 즐거운 고민만 있을 뿐.

‘어쩌면 때아닌 반항을 한 것인지도 모르지.’

신화상에서도 브라흐마는 우주의 근본 원리인 ‘범(梵)’이 인격화된 것이라 표현된다. 범은 우주 창생을 낳은 씨앗이고,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되었으니. 시대에 따라 브라흐마도 다양한 인격과 얼굴을 가지 고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지금의 브라흐마가 가진 이름은 브라함이었다.

우주 창생과 질서를 걱정하는 주신격이 아닌, 오로지 가족의 건강과 안녕만을 기원하는 가장.

『그래 봤자 아가레스 따위에게 당했던 작자가……!』

오딘은 한순간 브라함의 기백에 짓눌렸단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던지, 얼굴을 잔뜩 붉히면서 뇌기를 잔뜩 끌어 올렸다.

한 명의 주신만 남을 수 있는 이곳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바로 끝장이었다.

쿠르릉-

파지지직!

오딘에게서 일어난 뇌전이 한데 뭉치면서 브라함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웬만한 행성 하나쯤은 단번에 쪼개 버릴 수 있는 위력이 그 속에 담겨 있었지만.

파앗!

브라함은 너무 손쉽게 손을 내뻗는 것만으로 뇌전을 옆으로 흩뜨려 버렸다.

쿠쿠쿠쿵!

부서진 뇌기의 잔해로 인해 주변 일대가 모조리 쓸려 나갔다.

그만한 공격을 쳐 냈는데도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은 멀쩡한 모습을 보며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스치는 가운데.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브라함은 아주 가볍게 웃었다.

『자네가 이끌던 아스가르드, 이미 망했다네. 뭐, 배알이란 게 있으면 진즉에 복수를 하러 갔겠지만…… 그럴 용기가 있었다면 여기에 있지는 않겠지? 물론, 그 마무리는 아무래도 내 손으로 이룰 것 같네만.』

『감히!』

오딘은 자신의 약점이나 다름없는 부분을 찔리자 다시 분노를 토해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라락!

브라함은 품에서 책자를 꺼내 허공에다 펼쳐 보였다.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면서 여태껏 그가 기록한 마법들이 다양하게 등장했다.

부-파우스트와 대담을 나누면서 터득한 것들, 대장로와 교분을 나누면서 깨달은 것들, 그가 에메랄드 타블렛을 보면서 영감을 얻은 것들을 전부 정리하여 담은 새로운 마도서(魔道書).

〈명왕성의 서〉

이미 브라함은 브라흐마 때의 격을 모두 복구한 것으로도 모자라, 미지로 가득 찬 타계의 지식까지 습득하면서 새로운 경지를 밟아 나가는 중이었다.

『죽음은 새로운 창생을 위한 밑거름이 될지니, 이는 돌고 돌아 거대한 수레바퀴를 돌리는 부품이라.』

브라함과 명왕성의 서가 눈이 부실 정도로 희뿌연 광채를 토해 냈다.

『그 속의 귀의하라.』

시동어가 발동되는 순간, 신력의 소용돌이가 맹렬하게 불어닥치면서 평원 일대를 깡그리 밀어 버렸다.

콰콰콰콰-

* * *

“……!”

연우가 허리를 쭈뼛 세운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왜 그래, 형?』

라플라스를 앞장세워 브라함이 있는 곳으로 넘어갈 차비를 갖추던 일행들의 시선이 저절로 그에게로 쏠렸다.

혹시 시의 바다 쪽에서 역습이라도 해 오나 싶었다. 그런다면 다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말 테니까.

하지만 연우의 대답은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브라함이 초월을 시도했어.”

『장인 영감이?』

“아, 아버지가요?”

차정우의 사념체와 아난타가 동시에 다급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들은 브라함이 신격에 대해 얼마나 강한 경멸을 지니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신격을 복구했다는 말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그만큼 다른 급한 뭔가가 있단 뜻이 아닐까.

『이유는? 몰라?』

“몰라. 브라함이 공개하지 않으면.”

지금까지도 브라함을 읽을 수가 없었는데, 신격을 되찾았다면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말없이 라플라스를 바라봤다.

협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당장 브라함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는 무언의 눈빛.

라플라스는 기분이 좋은지, 토끼 귀가 접혔다가 펴지기를 반복했다.

「인스턴스 스테이지야 저희가 심상 개변으로 만들었으니 좌표를 찍어 드리는 건 어렵지 않아용.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용.」

“뭐지?”

「자격이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어용.」

“자격?”

「천마증을 앓은 존재가 아니면 안 돼용.」

“왜?”

「그렇게 만들어졌어용. 시스템도 공인해 버린 거라서 자격 요건을 반드시 갖춰야만 해용.」

“그냥 무시하고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아니면 그냥 깨고 들어갈 수는 없나?”

라플라스의 미소가 커졌다.

「할 수 있다면 해 보세용. 저도 모르……! 아아아악!」

[권능, ‘연옥로’가 발동되었습니다!]

연우는 라플라스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에 일단 녀석을 연옥로에다 집어넣고, 부를 따로 불렀다.

“이 좌표, 열어 봐.”

「명. 을. 받듭. 니다.」

부는 허공을 짚으며 마력을 방출시켰다.

손가락 끝을 따라 자그마한 파문이 번져 나가면서 마법진이 맺혔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왼손에 쥐고 있던 구슬이 연신 탁한 광채를 뿌려 댔다.

뭔가 잘 안 풀리는 게 분명했다.

“잘 안 되나?”

「면목. 이. 없습니. 다. 못난. 제게. 벌. 을. 내려. 주십시오.」

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자책감과 함께 분함이 잔뜩 섞여 있었다.

“무슨 문제지?”

「잠금. 체계. 가. 너무. 두텁습. 니다. 알고리즘. 이. 복잡. 하여. 해석하는. 데. 많은. 시간. 이. 소요될. 것 같습니. 다. 죄송. 합니다.」

“부술 수는 없고?”

부는 침묵했다.

그걸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음검으로 강제로 부수고 들어가야 하나?’

연우는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머리를 털어야만 했다.

아무리 음검을 터득했다고 해도,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시스템에다 에러를 일으키는 정도였지,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잠깐 고민에 빠져 있는데.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군.”

하양이 대장로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오랜 추격전 때문에 피로가 쌓여서일까, 핏기가 몽땅 가신 얼굴이 창백했다.

‘아냐. 그것보다 훨씬 큰…….’

연우는 하양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기질을 느꼈다.

‘설마?’

하지만 연우의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걸 받게.”

하양이 그의 손 위에다 무언가를 쥐여 주었기 때문이다.

하얀 구슬이었다.

“이게…… 뭐지?”

“여섯 번째 시스템 키일세. 저놈들이 그토록 내게서 가져가고 싶어 하던 것이지.”

“이걸 왜 나에게 주는 거지?”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양은 시스템 키를 이블케 일당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죽을 위기를 몇 번이고 건너야만 했다.

아무리 도와줬어도 그렇지, 그렇게 고생해서 지킨 것을 이리 쉽게 넘겨준다고?

순간, 하양의 입가에 씁쓸함이 번졌다.

“자네는 이미 날 이토록 괴롭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것 같은데, 아닌가?”

“…….”

“난 이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네. 자네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다했을 목숨이지. 지금이야 어찌어찌 견디고 있는 것이고.”

하양의 시선은 시스템 키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계야. 버티기가 너무 어렵다네. 나도 이만큼 고생했으니 이만 쉬고 싶기도 하고.”

하양의 몸뚱이에는 노이즈가 잔뜩 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롭게 보였다.

“그래도 이렇게 마음 놓고 물건을 맡길 사람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가?”

비록 하양이 연우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그라면 충분히 잘 맡아 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가 여태 보아 왔던 차정우와 아난타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뒤를 부탁해도 되었다.

“…….”

결국 연우는 시스템 키를 받은 채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평상시 모략을 꾸미는 경우가 많아 비열하다거나 간악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는 하양이었지만.

어쩐지 연우는 그런 평가가 사실은 관리국을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 그가 스스로 뒤집어썼던 멍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양을 대하는 연우의 태도도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고맙네.”

하양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걸 이용하면 100층을 제외한 모든 층계를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네. 히든 스테이지나 인스턴스 스테이지도 예외는 없지. 물론, 시스템이 관리자라고 인식해서 시련을 수행하는 건 불가능하네만.”

모든 층계를 다닐 수 있다고?

연우는 순간 올림포스가 자리 잡고 있을 98층과 올포원으로 인해 어느 누구도 발을 디디지 못했던 78층 이후의 층계에 생각이 미쳤지만.

‘그런 건 브라함을 구하고, 다른 시스템 키까지 전부 빼앗아서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

어차피 이 시스템 키가 있는 이상, 중앙 관리국과는 계속 대립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럼…… 뒤를 부탁하……!”

하양은 웃고 있던 얼굴 그대로 고개를 천천히 떨어뜨렸다.

그리고.

파아아!

가이아의 저주에 따라, 육체가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

연우는 아주 잠깐 그를 위해 묵념을 하다가, 몸을 반대로 돌리며 라플라스를 도로 연옥로에서 뽑아 올렸다.

“너도 최고 관리자였으니, 시스템 키의 작동법은 잘 알고 있겠지?”

끔찍한 고통을 겪었기 때문일까. 라플라스는 상당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아! 하아! 결국…… ### 님이 그걸 얻으셨군용. 알다마다용. 사용법을 빨리 가르쳐 달라는 것이겠지용?」

“그래. 그리고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만약 쓸데없는 짓을 하려 한다면…….”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용. 말했지만 전 ### 님의 편이라니까용?」

저 말끝마다 붙이는 용용을 좀 치워 버릴 수는 걸까. 연우는 오히려 말을 하면 할수록 녀석이 더 못 미더웠다.

「그보다 도와드리고 나면 나중에 한 가지 부탁을 드릴 수 있을까용?」

“……?”

「방금 전 그 연옥로에…… 절 다시 가둬 주실 수 있을까용?」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탁.

연우는 이게 대체 뭔가 싶어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플라스는 상사병에 빠진 사람처럼, 울끈불끈한 구릿빛 근육이 돋보이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도리질을 쳤다.

「후끈후끈하고 화끈화끈한 것이……! 딱 제 스타일이에용! 하악하악! 포상 좋아.」

“…….”

연우는 말없이 비그리드를 쥐었다.

아무래도 저쪽으로 건너가기 전에 이 변태부터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야, 야? 설마 이 아버지로 저 변태 새끼를 찌르려는 건 아니지? 야! 하지 마! 하지 말라고오오! 아아아악!』

중간에서 애꿎은 크로노스만 잔뜩 고통을 받았지만.

그리고 그때.

[천계의 많은 존재들이 관심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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