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43화 (643/862)

18화. 창조신 (5)

“초빙?”

연우는 기가 찬다는 얼굴이 되었다.

중재니 협상이니 해도, 결국엔 자신의 발목을 붙잡으려 하는 개수작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많은 신들이 ‘말라흐’의 발표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소수의 신들이 ‘말라흐’에 초대된 당신을 시기에 찬 눈으로 바라봅니다.]

[대다수의 악마들이 놀라워합니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신과 악마들은 하나같이 충격을 받은 기색이었다.

에덴(Eden).

세상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다고도 할 수 있을 절대선의 신화에서 주요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대성역.

최초의 대지라 알려져 있으며, 수많은 천사들이 머무는 것으로 유명한 장소이기도 했다.

말라흐가 신의 진영 내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곳으로 초대 한다는 것은 아주 큰 영광일 수밖에 없었다.

각 사회에서 최상급 이상으로 분류되고 있는 이들도 특별한 용무가 있어야만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니까.

연우를 그런 곳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그를 이제 천계에서도 촉망받는 유망주가 아닌, 자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실력자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어찌 보면 이제 올림포스의 주신이기도 한 연우에게 당연한 대우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아직 필멸자의 격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렇게 놀라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필멸자가 에덴으로 초빙되는 경우는 이번이 최초였으니까.

과거에 원죄를 지어 추방된 존재가 있었던 걸 제외한다면.

『서기장께서는 이참에 직접 당신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기를 바라고 계시오.』

미카엘은 정중한 어투를 하면서도 두 눈으로는 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눈웃음을 짓고 있는 녀석은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연우가 초빙을 거절한다면 적당한 명분을 둘러대어 한판 거창하게 싸울 수 있는 것이고, 받아들인다고 하면 또 그건 그것대로 좋다는 투였다.

연우는 헛소리하지 말고 꺼지라는 식으로 외치려 했다.

바로 그때.

『받아들이게.』

브라함의 목소리가 연결 고리를 통해 전해졌다.

연우는 재빨리 게이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쿠쿠쿠쿠!

브라함은 한창 제우스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책장이 빠른 속도로 넘어갈 때마다 갖가지 이적이 빚어지고, 제우스는 그때마다 뇌전을 떨어뜨리면서 이를 분쇄하는 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마다. 함부로 늙은이 취급하지 말아 주게. 아직 거뜬하니까.』

하하하. 브라함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전해졌다.

제우스를 한창 상대하고 있으면서도 가볍게 웃고 있는 모습이,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여하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브라함은 가벼운 웃음 뒤에 진지한 어투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저들이 어떤 꿍꿍이가 있는 건 분명하네만, 내 생각엔 그래도 이참에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연우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초빙한다는 명분으로 배틀 로얄에 개입할 수 없게 제 발목을 묶으려는 속셈이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은 저들의 초빙에 응하라는 뜻이네. 그래야 자네도 뭔가를 요구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자고로 거래란 서로 주고받는 게 있어야 성립되는 게 아니겠나.』

요구를 하라고? 무엇을?

『우리의 목적을 잊지 말게. 자네가 시의 바다에 대한 원망이 아주 크긴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 있지 않은가.』

‘아!’

연우는 그제야 뭔가를 직감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브라함이 살짝 웃는 소리가 났다.

『이제 좀 방향이 잡히나?』

‘……예.’

『원한도 중요하지만, 그건 얼마든지 갚아 줄 수 있네. 하지만 업(業)을 잇는 건 그보다 더 중요하다네. 그가 자네에게 남긴 유언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리되면 브라함은……!’

『날 못 믿나?』

연우는 브라함의 그런 말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도 믿어 주게. 그동안 밥버러지 같은 생활만 해 왔으니, 나도 밥값은 좀 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다시 웃음기가 번졌다.

『그리고 이왕에 여기까지 왔는데 저들이 말하는 유일신이니 뭐니 하는 것도 해 보고 가야지. 감투에는 별 미련이 없어도, 새로운 힘이란 건 탐구해 보고 싶거든.』

이렇게까지 설득하는데 안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올 테니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자네야말로 가는 동안 정신 똑바로 차리게. 저곳에 자네가 오기를 단단히 벼르고 있는 작자들이 어디 한둘이겠나.』

이번에는 연우도 따라서 웃었다.

‘그럼 저야 좋은 것 아닙니까? 스스로 나서서 올림포스를 위한 양분이 되어 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죠.’

『하여간 인성은. 하하! 하긴 자네의 그런 면이 정우와는 또 달라서 좋은 것이네만.』

브라함의 통신은 거기서 끊어졌다. 동시에 책장이 마지막 장에 다다르면서 그림자가 해일처럼 높다랗게 일어나 제우스를 휘갈기는 것이 보였다.

연우는 더 이상 브라함의 일에 개입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 이상 돕겠다고 나서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동안 브라함이 연락이 없었던 건 위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홀로 하르모니아에 닿고 싶어서였던 걸지도.’

브라함은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하르모니아와 결착을 보고 싶은 것 같았다. 배틀 로얄에 참여를 한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보다 빨리 하르모니아에 다다를 수 있을 테니까.

연우는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다음, 대장로를 돌아보았다.

“시의 바다가 또 어떻게 나설지 모릅니다. 여길 부탁하겠습니다.”

“알겠네. 조심해서 다녀오게.”

“감사합니다.”

연우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비그리드를 도로 등에 걸며 미카 엘을 돌아보았다.

“안내해.”

* * *

미카엘이 하늘을 올려다보자, 하늘에서부터 거대한 빛의 기둥이 내려왔다.

말라흐의 신화에서 선택받은 선지자들만이 타고 오를 수 있다는 승천로(昇天路).

거기에 휩싸인 순간.

[신의 사회, ‘말라흐’가 당신을 대성역 ‘에덴’으로 초대하였습니다!]

[해당 지역은 98층입니다. 오를 자격이 부족합니다.]

[시스템 키(巳)가 작동합니다.]

[자격 요건이 충족되어 ‘에덴’으로 이동합니다.]

여러 메시지와 함께 눈을 떴을 때, 연우는 무지개의 일곱 색채가 아름답게 뒤섞인 구름 위에 서 있었다.

[이곳은 98층, 천계의 관입니다.]

[현재 당신의 신분은 ‘최고 관리자’입니다. 해당 층계의 시련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구름 평원 위, 아주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땅덩어리가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웬만한 대륙만 한 크기를 자랑할 것 같은 대지.

거기서 풍기는 신력이 아주 대단했다.

연우도 여러 성역들을 접해 보았지만, 결단코 저렇게 맑은 기운을 간직한 곳은 없었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저곳이…… 에덴.’

흔히 에덴동산으로 더 잘 알려진 곳.

피손, 기혼, 히데겔, 유프라테스의 네 강이 흐르며, 그 강들이 주는 양분을 바탕으로 수많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열린다고 하던가. 생명의 나무와 선악과가 맺히는 나무도 저곳에 있다고 들었다.

그때, 미카엘이 어디선가 지팡이를 꺼내 바닥을 짚었다. 그들 앞으로 에덴으로 향하는 하늘 계단이 차례로 생성되었다.

『오르시지요.』

그때.

『저희가 호종하겠습니다.』

하늘에서부터 수십 명으로 이뤄진 무리가 연우에게로 내려왔다.

아테나를 위시한 올림포스의 신격들. 주신인 연우를 보호하고자 신하 된 예로 직접 찾아온 것이다.

개중 다수는 연우도 처음 보는 낯선 얼굴들이었지만.

『익숙한 얼굴들이 아주 많군.』

크로노스가 등 뒤에서 인간의 형태로 모습을 비추자, 전부 하나같이 경악한 얼굴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크, 크로노스 님!』

『시, 시, 신왕이시여!』

그들 모두 크로노스가 연우와 함께하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가슴이 크게 철렁이는 것만 같았다.

『다들 반갑구나. 그동안 잘 지내었던가?』

『저흰……!』

『안다. 섣불리 뭐라고 말하기 힘들겠지. 너희 모두 나 때문에 많이 고생했을 터인데.』

『…….』

『그래도 이렇게 다들 만나고 나니 참 기분이 좋구나.』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연우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한동안 망가진 모습만 보여 주던 아버지의 저런 근엄한 모습이 낯선 것도 있었지만.

적절한 시기에 얼굴을 비추어 자신의 정통성을 챙겨 주려 하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저들 중 다수는 속으로 연우에 대한 의구심이 강한 이들도 많을 터였다.

천계로 오르지 못하는 주신. 왕좌에 앉아 있지 못하는 왕이 무슨 왕이냐는 생각을 하는 작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태 반발하지 못했던 건, 연우를 대리한다는 아테나 등의 기세가 너무 거센 데다가, 티탄-기가스로부터 올림포스를 탈환한 게 오롯이 연우의 힘이었다 보니 모든 명분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동안 실종되었던 제우스가 다시 나타났다.

저들의 마음속에 있는 저울추는 어디로 기울이는 게 이득일지, 많이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연우가 신왕좌에 앉았다고는 하나, 제우스도 결격될 사유 따윈 없었다.

포세이돈 등은 올림포스를 잃었다는 약점이 있지만, 제우스는 단순히 천마증을 앓았던 것밖에 없지 않은가.

하물며 제우스가 배틀 로얄에서 선전을 보이고 있는 지금, 당연히 제우스 쪽으로도 마음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는 곧 올림포스 내에 분란의 씨앗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무게 추를 각자 어디로 둘지를 판단해야 하니, 저리 호종을 핑계 삼아 한데 우르르 몰려온 것이겠지.

이참에 그를 눈으로 확인도 해볼 겸.

그런데 이때, 크로노스가 직접 현신해서 연우를 두둔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당연히 저울의 무게 추가 연우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비록 크로노스가 폐주(廢主)로써 쫓겨났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를 기리는 사람들도 적잖게 있었으니까. 그가 세를 모으고자 한다면 따를 사람들이 꽤나 많을 터였다.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건실한 편이었다.

아테나는 그런 눈치 싸움을 보며 시름에 젖은 얼굴이 되었다. 티탄-기가스를 물리칠 때까지만 해도 이제 모든 시련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난관이 주어진 셈이었으니.

하물며 그런 대립각을 보이는 두 사람이, 자신이 가장 잘 따르는 숙부와 친부이니 오죽할까.

『괜찮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달래려는 듯, 연우의 메시지가 조용히 전달되었다.

움찔.

아테나가 살짝 몸을 떨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해.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나는 원망하지 않을 테니. 그동안 옆에서 도와준 것만 해도, 나와 정우에게는 아주 큰 힘이 되었으니까.』

『…….』

그 말이, 오히려 아테나의 가슴에는 더 무겁게 와 닿았다.

『위에서 연락을 받았소. 수용 인원에 한계가 있어 이 많은 인원이 함께 들어가실 수는 없을 듯하오만.』

그때, 미카엘의 말에 연우 주변에 모여 있던 올림포스 신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분은 우리의 왕일세. 왕이 행차하시는 곳에 어찌 경비를 허투루 할 수 있단……!』

『올림포스에서는 저희 말라흐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오?』

미카엘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를 따라 시뻘건 불길이 뱀처럼 한 번 휘감았다가 사라졌다.

맹렬한 투기.

윽박질렀던 신격이 움찔해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건……!』

“다들 그만하고. 에덴은 아테나와 가도록 하지.”

『그러시길.』

미카엘이 싱긋 웃으면서 뒤로 물러섰다.

올림포스 신들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여기서 미카엘과 다퉈 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 * *

신격들이 하나둘씩 물러난 뒤.

연우와 아테나는 미카엘의 안내에 따라 하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는 내내, 연우는 그 아래로 펼쳐진 무수히 많은 ‘대륙섬’들을 볼 수 있었다.

새하얀 구름으로 이뤄진 바다를 따라, 에덴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크기를 자랑하는 대륙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각 대륙섬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떤 섬은 수풀로 우거져 무인도처럼 보이는가 하면, 또 어떤 섬은 황량한 사막 위에 거대한 신전 구조물만 덜렁 남겨진 것도 있었다. 석조 건물로 빽빽한 도시군을 이룬 것도 있었고, 마추픽추처럼 산꼭대기에다 성채와 정원을 꾸며 놓은 곳도 있었다.

저마다 다양한 환경과 양식을 가진 구조물들이 가득해 통일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들.

마치 게임 속에서 다양한 세상을 보는 것같이 비현실적으로 와 닿았다.

“운해(雲海) 위에 떠 있는 것들, 하나하나가 전부 신의 사회에요. 악마 진영 쪽은 섬이 아닌 다른 형태라고 들었는데, 정확한 건 제도 알지 못하고요.”

아테나는 연우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를 보고,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가 천계 방문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전부 크군.”

“크죠. 하지만 저희들에게는 작을 뿐이에요. 아주 한없이.”

연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드넓은 우주와 차원을 넘나들던 이들에게 저런 대륙섬은 아주 작게 느껴질 테지. 거기다 공간 효율을 위해서 모습을 항상 사람 형태로 유지해야만 하니 더더욱 좁게만 느껴질 터였다.

‘거기다 다른 사회들과 다르게 에덴만 더 높은 상공에 위치해 있는 걸 봐서는…… 의도적으로 사회 간의 위계를 맞춘 건가? 그러면서도 섬에서 풍기는 신력은 온화하고. 강제로 누르는 게 아니라, 저절로 숙이게 만드는 거군.’

연우는 어쩐지 말라흐의 통치 철학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도착했습니다.』

그러다 미카엘의 말에 연우와 아테나의 걸음이 멈췄다.

하늘 계단의 끝.

그곳에 날개를 한껏 바닥으로 흘리며 이지적인 눈빛을 빛내고 있는 중년인이 서 있었다.

메타트론이었다.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반갑다며 손을 내밀며 인사하는 그의 옆에는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깊게 가라앉은 검은 눈을 가진 사내. 등에 매달린 검은 날개가 천사가 아닌 악마라는 사실을 말 해 주고 있었다.

에덴동산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자.

『반갑군. 드디어 이렇게 마주하게 되었어.』

절대악 르 인페르날의 수장, 바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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