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공동 전선 (1)
하르모니아는 아주 재미있다는 얼굴이 되었다.
여태껏 자신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자가 갑자기 동맹 제안을 하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뒷일은 올포원을 잡고 나서 생각하자, 이건가요?』
그러면서 그녀는 ‘눈’으로 브라함 쪽을 슬쩍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된 브라함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의 파트너였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브라함의 눈동자에는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단 것을.
진짜 눈으로 시선이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아, 하르모니아는 그의 눈빛을 일부러 외면했다.
연우가 말했다.
“너도 나도, 결국 목표는 같으니까.”
『제 목표가 무엇인지는 아시구요?』
“올포원을 끄집어 내리는 것, 아닌가?”
『맞아요. 더 큰 목적이 있지만. 실상 올포원은 그것을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할 뿐이지요.』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 그러니 올포원만 처리하면 갈라지자는 거다.”
『죄송하지만, 최근 들어 올포원이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건 전부 저희가 고생을 한 결과에요. 대체재를 마련한 것도 저희였고요. 그런데 거기다 숟가락을 얹으시겠다는 말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걸요?』
“그래도 단순히 숟가락이라고만 치기엔, 마지막 열쇠가 좀 많이 탐나지 않나?”
하르모니아는 가볍게 웃었다. 계속 연우와 언쟁을 벌여 봤자 평행선밖에 달리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당신이 저희 시의 바다로 들어오는 건 어떠신가요? 원하신다면 휘하의 클랜들은 물론, 수장 자리까지 드릴 수도 있어요.』
“아니.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당신도 칠흑의 세례(洗禮)를 받은 몸이에요. 나중에는 결국 이 거추장스러운 탑을 걷어치우고, ‘그분’을 깨어나게 하는 데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 대답은 알 텐데?”
『당신은 ‘그분’의 은총과 기적을 직접 보고 실현하면서도, 그 길을 좇지 않는 불신자로군요.』
하르모니아는 거대한 머리를 주억거렸다.
지금 연우가 한 답변은 칠흑왕을 추종하는 집단의 수장으로서 충분히 불경스러운 것일 테지만, 어쩐지 연우는 그녀가 만족해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렇다면 제 대답도 아주 간단해요.』
“결렬인가”
『그렇다면, 어쩌실 텐가요?』
“제안을 넣을 곳이 그쪽만 있는 건 아니지.”
『음?』
연우의 시선이 우측으로 향했다.
“이블케,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오효효! 정말이지 짓궂어도 너무 짓궂으시군요, ### 님은요. 서로가 보고 있는 상태에서 대놓고 분열을 조장하시다니.”
공간이 열리면서 외눈 안경을 쓴 고블린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는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방금 전에 하르모니아에게 했던 제안을 이제는 중앙 관리국에 한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시스템 키가 필요한 곳은 중앙 관리국이니, 그들에게 주어도 계획은 원하는 대로 이뤄질 수 있었다.
『하하!』
대놓고 편 가르기를 하려는 모습에 하르모니아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고.
이블케는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면서 물었다.
“### 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쭈어도 될까요?”
“뭐지?”
“혹시 보유하고 계신 신위 중에 선동이나 날조, 인성 같은 것들은 없으신 건가요?”
[다수의 악마들이 동의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소수의 악마들이 당신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극소수의 악마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악마들의 반응이 영 거슬리기만 했지만.
연우는 팔짱을 끼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없다. 그딴 거.”
“아쉽군요. 있었다면 아마 벌써 ‘황’이 되고도 남으셨을 텐데.”
“…….”
“오효효! 오효! 여하튼 ### 님의 제안은……!”
『이것들이, 감히 나를 두고!』
이블케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던 찰나였다.
여태껏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제우스가 화가 난 얼굴로 황금색 뇌기를 잔뜩 일으켰다.
분명히 배틀 로얄을 벌이고 있는 건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무시를 당했다 여긴 것이다.
하늘과 대지를 잇는 황금색 가지들이 무수히 뻗어 나가면서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이 이글거렸다. 보석안이 다른 어느 때보다 요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우스가 가진 건 자선(Caritas)의 돌.
연우가 지닌 오만의 돌과는 상반된 성질을 자랑했다.
자선은 나누고 베푸는 힘.
이는 달리 말하자면, 더 강하고 많은 상대를 접할수록 풀어낼 수 있는 신력의 양도 저절로 증폭한 다는 것과 똑같았다.
연우는 용신안을 활짝 열면서 비그리드를 거세게 쥐었다. 음검이 발동되면서 그를 따라 칠흑이 잔뜩 번져 나갔다.
여차하면 제우스를 곧장 벨 기세.
비그리드가 잘게 떨렸다.
웅, 우웅-
그리고.
츠츠츠!
비그리드 위로 칠흑의 아지랑이가 뭉치면서 크로노스가 상반신만 드러낸 채, 애틋한 눈으로 제우스를 바라봤다.
『제우스……!』
『당신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기가 막히는군. 찢어 죽여야 할 이유가 더 확실해졌어!』
콰르르릉!
제우스를 따라 천둥소리까지 일어나면서 벼락이 당장이라도 연우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데.
딱!
이블케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광망을 잔뜩 뿌려 대던 제우스의 왼쪽 눈에서 빛이 툭 하고 꺼졌다.
그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굴던 황금색 뇌기도 거짓말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크윽! 너……!』
제우스는 반발력에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를 따라 피를 흘리면서 이블케를 노려보았다.
이블케는 뒷짐을 쥐면서 크게 웃을 뿐이었지만.
“오효효! 잊으시면 안 되지요, 제우스. 당신에게 건네준 자선의 돌이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제가 아직 ### 님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지 않습니까? 말(馬)이면 말답게 행동하셔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바드득!
제우스는 자신을 한낱 장기 말 취급하는 이블케를 이가 으스러져라 악물면서 노려보았지만, 이블케는 여전히 여유롭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싫으면 지금이라도 떠나도 좋다는 듯한 태도.
하지만 제우스는 차마 보석안을 빼거나 하지 못했다.
그만큼 영혼석이 주는 힘에 단단히 매료되었단 뜻이겠지.
대신에 울분만 삭인 채로 홀연히 자취를 감출 뿐이었다.
『……제우스.』
크로노스만이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그러다 연우를 돌아보았고, 연우가 그러라며 합일을 해제해 주자 고맙다고 눈인사를 하며 똑같이 사라졌다.
“오효효! 하여간 참 부끄러움이 많은 분이란 말이지요. 하면 못다 한 이야기나 마저 나눠 보도록 할까요?”
이블케는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면서 연우와 하르모니아를 번갈아 보았다.
입술을 따라 삐져나온 송곳니가 오늘따라 더 훤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시나리오 퀘스트(유일신 탄생)가 중단되었습니다!]
[퀘스트 완수자가 없는 관계로,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될 예정입니다.]
[중간 정산을 시작합니다.]
[현재 퀘스트 랭킹]
공동 1위. 브라함, 제우스, 옥황상제
4위. 없음
5위. 없음
……
[신의 사회 중 대다수가 이번 퀘스트에 대해 많은 불만을 표시합니다.]
[많은 신들이 이번 퀘스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소수의 신들이 새롭게 퀘스트를 열 것을 주장합니다.]
[몇몇 신들이 신의 사회, ‘말라흐’에 중재를 요청합니다.]
[신의 사회, ‘말라흐’가 이번 퀘스트는 각 주신들의 합의하에 결정된 것이라, 자신들이 개입할 명분이 없다며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악마의 사회, ‘르 인페르날’이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신의 진영을 살핍니다.]
[다수의 신들이 침묵합니다.]
[소수의 신들이 침묵합니다.]
……
[최고 관리자, ‘이블케’가 98층에 공지 사항을 띄웠습니다.]
[공지 사항(1): 이렇게 제가 따로 인사를 드리는 것도 아주 오랜만이지요? 오효효! 이번 시나리오 퀘스트에 많은 분들이 불만을 가지시는 것,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문의와 항의가 빗발쳐서 관리국이 마비가 될 정도이니까요.]
[공지 사항(2): 이러한 여러분들의 의견을 잘 반영하여 현재 후속 퀘스트에 대해 논의를 진행 중에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못 기다리신다면? 뒷감당은 알아서 하시길.]
[중단된 시나리오 퀘스트(유일신 탄생)에 대한 보상 및 대응책을 시급히 마련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논의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논의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최고 관리자, ‘이블케’의 요청에 따라, 시나리오 퀘스트(유일신 탄생)의 내용이 변경되었습니다!]
[새로운 퀘스트(천계 해방)이 생성되었습니다.]
[시나리오 퀘스트 / 천계 해방]
설명: 시나리오 퀘스트(유일신 탄생)를 대체하여 긴급하게 만들어진 퀘스트입니다.
유일신좌(唯一神座)는 모든 신들이 바라 마지않았던 중요한 자리이니만큼 쫓기듯이 다급하게 만들어져선 안 된다는 여론이 팽배함에 따라, 중앙 관리국에서는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에 따로 자문을 구하여 이것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메시아(Messiah)입니다.
신과 악마들은 긴 시간 동안 탑에 억울하게 갇힌 것으로도 모자라, 98층에만 국한되어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런 신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강한 카리스마로 그들을 이끌어 줄 영도자이며, 억압과 속 박에서부터 해방시켜 줄 구원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 사슬과 족쇄부터 끊어야만 합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사슬과 족쇄를 끊기 위해 움직이십시오.
가장 큰 활약을 벌인 신에게 그만한 영광과 자격이 주어질 것입니다.
달성 조건:
1. 천계를 속박하고 있는 사슬, ‘비바스바트’를 찾아 제거하십시오.
2. 기여도에 따라, ‘사회’와 ‘주신’에 보상이 차등 지급됩니다. 또한, 전리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권한이 인정됩니다.
3.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하십시오.
제한 조건: -
제한 시간: -
보상:
1. 마스터 키
2. 유일신 내정
3. 칭호 ‘메시아’
변경된 퀘스트가 천계에 공지된 이후.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퀘스트 참여를 선언하였습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퀘스트 참여를 선언하였습니다!]
[신의 사회, ‘데바’가 퀘스트 참여를 선언하였습니다!]
……
[‘말라흐’를 제외한 모든 신의 사회가 참여를 선언하였습니다!]
[대다수의 신들이 드디어 때가 왔노라며 크게 기뻐합니다.]
[많은 신들이 강한 전의에 휩싸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소수의 신들이 곧 벌어질 수많은 희생에 눈물을 흘립니다.]
[모든 악마들이 신의 진영을 흥미롭게 관찰합니다.]
천계는 들썩이고 있었다.
그만큼 갑자기 변경된 퀘스트가 주는 무게는 아주 컸다.
단순히 유일신좌의 주인을 가리자며 시작되었던 배틀 로얄이, 어느새 그들의 해방으로 이어지고 말았으니까.
올포원 레이드.
그동안 천계에서 수없이 도전하고자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던 이벤트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 규모부터 달랐다.
중앙 관리국에서 직접 주최한 빅 이벤트였으며, 시스템 키가 있었기 때문에 올포원의 권능에 대비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시의 바다가 직접 나서기로 결의하였고, 연우도 권속들과 함께 참전을 선언하였으니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무엇보다.
단순히 주신들끼리 경쟁을 시켜서 유일신좌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기여를 한 이를 추대하는 것이니 야심이 큰 이들도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신의 사회들이 너도나도 참전을 선언하는 가운데.
연우는 자신의 망막에 떠오른 메시지들을 보면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퀘스트 내용에 붙은 여론이니 자문이니 하는 건 그냥 허울 좋게 붙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여론은 충분히 되었어.’
시의 바다, 중앙 관리국과 벌인 협상은 생각보다 손쉽게 이뤄졌다.
그들끼리 싸움이 벌어진다면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지만, 공통된 목표를 던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협상 테이블에서, 연우는 다른 두 곳을 추가적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말라흐’의 메타트론이 협상 결과에 만족해하며 크게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르 인페르날’의 바알이 다음 차례에 있을 다과회에 큰 기대심을 보입니다.]
‘천계까지 무대로 끌어들였으니, 함부로 경거망동하지도 못하겠지.’
시의 바다와 중앙 관리국만 올포원을 노리게 한 것이 아니라, 이참에 천계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만든 것이다.
연우는 한때 천계가 하나로 뭉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는 적대하고, 일부는 아군으로 끌어들이면서 분열의 씨앗을 심어 두었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지금 결정된 퀘스트는 지금까지의 행보와 반대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번 일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올포원을 레이드하는 와중에 내분이 생길 가능성이 더 크지.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누가 자기 머리 위에 앉으려는 꼴을 보려 할까. 오히려 뒤통수 치기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연우는 올포원을 상대하면서도 저들끼리 서로 견제를 하느라 연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이미 계시록을 얻은 부류와 얻지 못했던 부류, 동맹군에 참여를 하지 않은 부류 등, 저들끼리 다양한 입장 차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벌어지게 될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흔들린다고 해도, 올포원의 발목을 붙잡기엔 충분할 테니.
시의 바다와 중앙 관리국이 모두 나선다면. 그들이 가진 모든 패를 사용하도록 만들고, 이쪽에서도 음검을 사용한다면, 77층 공략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다.
무왕이 그토록 바라던 소망을 이뤄 내는 것이다.
그리고.
연우는 이참에 더 나아가 자신이 바라던 마지막 목표까지 이뤄 낼 생각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동맹군이나 권속들은 물론, 심지어 크로노스와 동생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목표를.
‘이 퀘스트가 끝나는 순간…… 77층뿐만 아니라, 이 빌어먹을 탑, 그 자체를 부순다.’
연우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시나리오 퀘스트(천계 해방)가 시작됩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77층에 입장하였습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77층에 입장하였습니다.]
……
[‘말라흐’를 제외한 모든 신의 사회가 77층에 입장하였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레이드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