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공동 전선 (2)
“괜찮으십니까?”
연우는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온 크로노스를 보면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올포원 레이드를 개시한 것과는 별개로, 크로노스가 또다시 상심한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포세이돈 등과도 여전히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판국에, 제우스와는 더더욱 심적인 거리를 좁히기가 더 힘들겠지.
제우스 등과 형제라는 자각이 별로 없는 연우로서는 데면데면하게 있어도 별 상관이 없다지만, 크로노스는 그게 아닐 테니까.
아마 지금도 제우스를 쫓아갔다가 모진 말만 듣고 온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기까지 했다.
연우도 지금만큼은 아버지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렇게 자식 바보인 사람이, 아무리 마성에 물들었었다지만 그렇게 자식들을 몰아붙였었던 게 좀처럼 이해가 안 갈 지경이란 말이지.’
마성이 정신을 오염시킨 것도 있을 테지만, 정확하게는 지구에서 보낸 생활들이 그를 많이 바꿔 놨다는 표현이 옳겠지.
어머니가 얼마나 크로노스를 변화시켰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만큼 남편을 사랑했기에 가능했으리라.
‘나도 아버지를 증오했던 건 똑같으니…… 제우스 등과 다를 바는 없는 건가.’
자식들에게 외면당하는 아버지라.
연우는 어쩐지 쓴웃음이 번져 나왔다. 자신이야 우연찮게 아버지의 진심을 엿보았기에 이렇게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런 계기가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제우스 등과 크게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정우야말로 아버지를 가장 잘 이해했던 것일지도.’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면서도,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가 부자지간이라더니.
연우는 어쩐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신이나 필멸자나, 부모 자식 관계는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나중에라도…… 어떻게 방법을 강구해 봐야 하려나.’
연우는 시름에 젖은 크로노스의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등이 넓었으면 했다.
* * *
“생각 정리는 좀 되셨습니까?”
『흐. 못난 모습만 보였구나.』
잠시 후, 크로노스가 마음을 다 잡았을 때 즈음.
연우가 던진 질문에 그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지구에서 그와 있을 때에는 주로 언성을 높이며 다퉜던 기억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평화로웠던 시절과 다르게, 하루하루가 전쟁터인 이런 곳에서 아들과 가장 마음이 통하니 참 신기하다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늠름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77층으로의 진입이 강제 거부되었습니다!]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98층으로 역소환되었습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98층으로 역소환되었습니다!]
……
[갑작스러운 이변 상황에 모든 신의 사회가 당혹스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말라흐’가 이변에 대한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연우는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에 눈을 크게 떴다.
크로노스도 무언가를 감지한 듯 고개를 위로 높이 들었다.
[77층에 설치된 대성역의 주인, ‘비바스바트’가 외부인의 침입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현재 77층이 전면 폐쇄되었습니다.]
『허!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는 재주를 지니고 있으니, 반대로 남들의 발길이 닿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건가?』
공세를 막 퍼부을 참이었던 신들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천계를 떠나는 것만 해도 그들로서는 막대한 인과율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진입이 막혀서야 헛수고만 하게 된 셈이었으니까.
[중앙 관리국에서 77층에 대한 설정 권한을 수정하고자 합니다.]
[실패하였습니다.]
[실패하였습니다.]
[시스템 키의 사용이 거부되었습니다.]
거기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블케의 시도도 불발되고 있었다.
연우 등으로서는 도저히 생각도 못 했던 일.
아무래도 올포원이 여태 숨기고 있던 패를 꺼낸 모양이었다.
[아테나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강림이 계속 실패하고 있어요. 이대로 있다간 퀘스트 수행이 불가능해요. 이외에 다른 우회로를 찾을 수는 없을까요?]
[메타트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바알과 함께 이유를 찾고 있는데…… 아무래도 올포원이 자신의 권한을 사용해서 77층을 아예 히든 스테이지처럼 별도로 유리시켜 버린 것 같다네. 녀석은 시스템의 화신이니만큼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방식이야 아주 많이 알고 있겠지.]
[메타트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메시지: 이건 시스템 키로도 도저히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는 일일세. 올포원의 권한이 시스템 키보다 더 상위에 있는 게 확실하니…… 역시나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음이야. 마스터키를 조금이라도 빨리 완성시키는 것. 협상한 대로 퀘스트를 계속 진행시키고자 한다면, 마스터키를 미리 만드는 방안도 한번 고려해 보게.]
아테나 등은 물론, 메타트론이나 바알도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다.
제아무리 천계를 이끌고 있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는 올포원보다 낮을 수 밖에 없을 테니 생기고 만 결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 이건 오히려 기회다.’
연우는 당혹감에 젖어 우왕좌왕하는 다른 신들과 다르게, 이런 올포원의 반응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다.
평상시 그가 보았던 올포원이라면, 이렇게 많은 신들이 넘어오려고 한다 한들 전부 직접적으로 물리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문을 닫아 걸고 외부와의 소통을 일절 차단했다는 것은 단 하나.
녀석의 신변에 어떤 이상이 있는 게 분명하다.
시의 바다가 올포원의 발목을 묶는 것과 관계가 있는 건지는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이건 기회였다.
‘마스터키를 지금 만들어서 넘기는 건 자가당착일 뿐이다. 고삐는 내가 계속 쥐고 있어야 해. 문이 폐쇄되었다면, 개구멍이라도 이용할 수밖에.’
연우의 생각이 정리될 때 즈음, 크로노스가 다시 검의 형태로 돌아가 연우의 손아귀로 쏙 하고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합일이 이뤄지면서…… 허공에다 길쭉한 사선을 남겼다.
공허가 활짝 열렸다.
[알 수 없는 힘이 시스템에 대한 해킹을 시도하였습니다!]
[해킹이 실패하였습니다.]
[해킹이 실패하였습니다.]
……
[해킹이 성공하였습니다.]
[시스템 오류로 인해 이상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공허가 열렸습니다!]
[시스템이 허가되지 않은 어뷰징(Abusing)을 확인하였습니다. 해당 대상자를 버그 유저라고 판단, 시스템의 방화벽 체계가 6단계로 일시 상승하였습니다.]
[백신이 강제 가동됩니다.]
……
[해당 대상자에 대한 접근이 실패하였습니다.]
[해당 대상자에 대한 접근이 실패하였습니다.]
[백신이 해당 대상자를 축출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
[방화벽 체계가 무력화되었습니다!]
[공허를 따라 여러 공간들이 나타났다가 소멸합니다.]
[시스템이 공허를 수복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시스템이 공허를 수복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
[시스템 키(巳)가 작동하여 공허에 특정 좌표를 지정하였습니다!]
[77층으로 향하는 우회로가 설치되었습니다!]
[‘어뷰저’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었습니다.]
공허가 흐릿하게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77층의 새하얀 풍경이 나타났다.
그 순간, 인스턴스 스테이지에 있던 주신들의 시선이 모두 저절로 연우 쪽으로 향했다.
『허!』
『우회로를 설치해? 아무리 시스템 키를 이용했다고 해도, 대체 어떻게……?』
『어뷰징? 어뷰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올포원의 권한을 무시해 버린 건가?』
[‘말라흐’의 메타트론이 당신이 보인 업적에 크게 놀라워합니다!]
[‘르 인페르날’의 바알이 당신이 보인 새로운 현상에 강한 흥미를 보입니다!]
주신들은 중앙 관리국에서도 거부당한 권한을 강제로 해킹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오류를 일으켜 우회로를 형성하는 모습에 기겁하고 말았다.
웬만한 권한 설정이 가능한 시스템 키를 소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시스템에 대한 ‘해킹’까지 가능하다니, 이건 그들로서도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새롭게 출현한 어뷰저라는 게 무엇인지. 그 권한은 어떻게 되고, 한계는 무엇인지 알아내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98층의 많은 존재들이 77층으로의 재진입을 시도합니다!]
천계의 신들이 다시 너도나도 움직일 차비를 하자, 주신들도 관심을 다시 77층 쪽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쿠쿠쿠!
인스턴스 스테이지가 크게 요동치면서, 밝은 하늘을 따라 여러 별들이 한데 빛을 내뿜자 거대한 은하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은하수가 지상으로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그 속에 무수히 총총 박혀 있던 별무리들이 일제히 허공에 맺힌 공 허 쪽으로 미끄러졌던 것이다.
유성우(流星雨).
천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들이 인스턴스 던전을 통해 77층으로의 강림을 시도하고 있었다.
[막대한 양의 영압이 77층에 가중됩니다!]
[경고! 영압의 한계 수용치를 훨씬 초과하였습니다! 더 심한 초과가 이뤄질 시 층계 및 스테이지가 붕괴될 우려가 있습니다!]
[경고! 너무 많은 성역이 선포되었습니다! 층계에 과부하가 걸립니다! 붕괴에 유의하세요!]
[경고! 77층의 스테이지 내구도가 급속도로 하락합니다!]
……
[신의 사회, ‘올림포스’가 모든 강림을 완료하였습니다!]
[신의 사회, ‘천교’가 모든 강림을 완료하였습니다!]
[신의 사회, ‘데바’가 모든 강림을 완료하였습니다!]
……
[‘말라흐’가 강림을 시도한 모든 사회에 축복과 가호를 선물합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주신들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우회로 쪽으로 몸을 던졌다.
『이제 정말 시작되는구나.』
크로노스는 그런 광경들을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 역시 올포원에 의해 희생되었던 입장으로서, 언젠가 그와 결착을 내야 한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이렇게 요란한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탓이었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는 탑이란 건 있지도 않았고, 신과 악마들은 저마다 자신의 영역만 돌아다닐 뿐이지 서로 간에 마주칠 일도 잘 없었으니까.
설사 마주친다고 해도 서로 데면데면하게만 보다가 지나치는 게 전부였다.
탑 내에서 활동한 지 이제는 제법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는 여전히 이렇게 대대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주 신기하게만 다가왔다.
하지만 이것이 막내아들, 정우의 영혼을 찾기 위한 ‘진짜’ 첫걸음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울렁이는 여러 감정들을 억누르면서 연우에게 힘을 실어 주고자 했다.
[제우스가 77층에 강림하였습니다!]
한순간, 크로노스에게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연우는 합일을 통해 아버지가 여러 착잡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로노스는 심적 동요를 멈추고, 다시 검으로서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가 평정심을 갖췄다.
공은 공, 사는 사. 한때, 신왕의 자리에 앉았던 만큼, 지금은 어떻게 해야 연우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연우는 비그리드를 꽉 쥐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연우는 수없이 많은 빛들이 명멸하는 스테이지로의 진입을 시도했다.
[77층으로 진입을 시도합니다.]
[기존에 있던 퀘스트의 소멸에 따라, 인스턴스 던전 ‘신들의 평원’이 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