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47화 (647/862)

22화. 공동 전선 (3)

“흐흐! 표정을 보니까, 뭔가 뜻대로 잘 풀리지 않나 보지?”

마치 수북하게 쌓인 눈처럼 오로지 순백색으로만 가득한 세계.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이들에게는 감옥이나 다름없던 곳에서, 올포원은 명상을 끝내고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이쪽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페렌츠 백작이었다.

너무 즐거워 미치겠다는 표정.

『…….』

올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빛무리에 잠겨 있어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되도록 아무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올포원을 보았고, 이 백색 세상에 갇힌 뒤로도 줄곧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끝까지 대항했던 페렌츠 백작은 알고 있었다.

올포원이 낭패해하고 있다는 것을.

“스크린으로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최근 들어 탈각이나 초월을 시도하던 이들이 꽤나 있더군. 자네를 몇 번이나 귀찮게 하던 외뿔부족의 왕은 두말할 것도 없고, 대장로라는 이도 그러했고…… 자네를 피해 달아나거나 숨어 있던 이들은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것 같았고.”

『…….』

“자네 아버지를 추종하던 이도 방금 전에 초월을 이루던데, 보았나?”

『…….』

페렌츠 백작은 올포원의 숨소리가 살짝 흐트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한때 용살대전을 일으켰을 정도로 무심한 성격을 자랑한다지만.

그의 약점이 ‘아버지’에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올포원에게 있어 ‘아버지’란 존재는 애증의 대상이었으니까.

오늘날 그를 있게 해 준 고마운 존재이면서도, 이런 지옥 같은 생활을 겪게 한 증오스러운 사람.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그토록 발 벗고 뛰어다니면서 막고자 했었는데…… 그리도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하면서까지 억지로 꾸역꾸역 해 왔는데, 헛수고로 돌아가게 생겼으니. 나라도 복장이 뒤집힐 것 같으이. 쯧!”

위로랍시고 내뱉는 말 속에는 웃음기가 다분히 섞여 있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텐가?”

『…….』

올포원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인형처럼 고요하게 앉아만 있을 뿐.

순간, 조소로 가득하던 페렌츠 백작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그리도 매번 잘난 척 제멋대로 떠들어 대던 그대가 아니냔 말이야! 그럼 이번에도 무슨 말이라도 해야지!”

웃음기는 울분으로 돌변했다.

그동안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과 강제로 떨어져 이곳에 갇혀 지내야만 했던 가장의 서글픔이었다.

하지만 한참 욕설을 퍼붓고, 페렌츠가 거칠게 숨을 몰아쉴 때까지도.

『…….』

올포원은 조용했다.

그저 고요한 시선으로 페렌츠 백작을 바라보기만 할 뿐.

페렌츠는 결국 여기서 성을 내 봤자 자기만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저 돌 같은 인간을 동요케 하기란 힘들겠지.

털썩!

페렌츠 백작은 바닥에 주저앉아 올포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틀린 입가에는 다시 조소가 가득했다.

“이제 그대가 뿌린 것들이 돌아오고 있다. 한때 그대를 엿 먹이기도 했던 크로노스부터 여러 신들이며 ###에 이르기까지. 거기서 그대는 무엇을 할 텐가?”

그러다.

『난.』

올포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착 깔린 목소리.

마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고 입을 열었을 때처럼 껄끄럽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평상시와 똑같을 뿐이다.』

그 말과 함께, 올포원은 다시 눈을 감아 면벽에 들어갔다.

그리고.

의식이 아래로 깊게 침잠했다.

눈을 뜨니, 이번에는 황금색 물결로 가득한 세상이 나타났다.

거기서 올포원은 허공에다 양팔을 길게 내뻗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단단히 붙들려는 듯.

끼릭, 끼리릭!

황금색 세상은 마치 기계 장치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온갖 크기의 크고 작은 톱니바퀴와 태엽이 저마다 맞물린 채로 돌아가고 있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올포원의 무의식이 맞닿아 있는 세계이자,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세상의 이면이라 부르는 곳. 이데아.

이곳에서 돌아가는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은 모두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법칙’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자연법칙이기도 하며, 문명을 이루는 개념이기도 했으니.

흔히 신과 악마들은 저 톱니바퀴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개념신(槪念神).

혹은 고대신(Elder God)이라고.

우주가 창조되었을 때부터 같이 태어나, 까마득한 세월이 지난 끝에 자아라는 것이 없고, 오로지 개념적인 존재로만 남아 버린 존재들. 그러면서도 그간 우주가 계속 성장할 수 있고, 여러 개로 분화할 수 있게끔 지탱해 온 것들이기도 했다.

대지모신도 그중 작은 한 개의 톱니바퀴에서 시작된 것.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나, 이 거대한 세상은 그런 작은 부품 하나쯤 사라졌다고 해서 움직임이 멈추거나 하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우주란 생동적이라, 절대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 정지된 우주는 그대로 죽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올포원은 바로 그런 개념신들을 강제로 붙들고, 필요한 부분만 의도적으로 돌리며 서 있었다.

아무도 없이, 오로지 혼자서.

말도 안 되는 이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창세기 때 대단한 활약상을 펼쳤다는 천마나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까?

그는 이데아를 직접 ‘돌리는’ 이적도 선보였다지만, 그래도 지금 올포원이 보이는 이 이적도 다른 신과 악마들이 보았을 때에는 놀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라야지, 그게 ‘연’ 단위를 넘어서게 되면 제아무리 올포원이라고 하더라도 힘에 부치는 법이었다.

[경고! 과다한 데이터 처리로 인해 시스템에 막대한 과부하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문제 발생 장소에서 한 발 떨어져 주시기 바랍니다.]

[경고! 허용치를 훨씬 넘어선 정보량으로 인해 시스템 기능 중 일부가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시스템을 다시 시작할 것을 권고합니다.]

[경고! 해당 장소는 시스템의 기능이 작동하는 데 한계가 있어…….]

……

이미 이에 대한 경고 메시지도 계속 출력되고 있는 중이었지만, 올포원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몇 년 전부터 개념신과 고대신들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줄줄이 천계로 내려와 이데아를 강제로 돌리려고 하는 중이었다.

어째서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그런 ‘의지’를 저절로 지니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원인이나 과정은 모른다.

하지만 그 뒤로 올포원은 언제나 그들의 하강을 막기 위해 의식의 50퍼센트 이상을 항상 여기에 할당해야만 했다.

이전에 연우가 페르세포네 일당을 피해 타르타로스를 탈출했을 때나, 창공 도서관에서 탈각을 시도하려 했을 때에 나타났던 올포원이 모든 힘을 투사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으니.

이제는 그 정도가 훨씬 넘어서서 항상 붙들리는 신세가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바탕에는.

촤르륵, 좌륵!

호시탐탐 그를 어떻게든 이곳에 묶어 두고, 힘을 잔뜩 빼 놓아 낚아채려는 방해가 있었다.

곳곳에 맺힌 검은 멍울을 따라 삐져나온 쇠사슬이 올포원의 손발을 단단히 결박했다.

쇠사슬이 팽팽해지면서 안쪽으로 돌아가 올포원을 강제로 끌어내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어둠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빛은 그런 어둠에 가려질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당신일 텐데, 언제까지 이리도 무의미한 저항을 되풀이할 생각이신가요?』

그때, 멍울 중 일부가 활짝 열리면서 하르모니아의 한쪽 눈이 드러났다.

잠들어 있던 개념신과 고대신들을 깨우고, 꿈속 세상을 이데아에 접촉시켜 쇠사슬로 그의 힘을 빼 놓고 있던 장본인은 자신의 대척점에 놓인 존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히려 황혼이 찾아오길 가장 바랐던 것이 당신이었고, 이제 그 무겁기만 한 의무를 벗어던질 기회가 왔는데도, 어째서 당신은 계속 이곳에 묶여 있으려는 건가요?』

올포원은 그런 하르모니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입을 떼었다. 새하얀 빛으로 가려진 아래, 그의 얼굴은 힘든 것과 별개로 여전히 고요했다.

『그야 이것이 이 몸이 짊어진 업보이자 의무이니까.』

『당신은 그런 의무를 누구보다 지긋지긋해하고, 싫어하지 않았던가요? 자기 의지 따윈 없이 오로지 반복된 행위만 있는 그런 삶을 증오하지 않았던가요?』

『의무가 싫다 하여 내팽개치고, 업보가 지루하다 하여 등을 지게 된다면 세상은 오로지 방종과 무분별로만 가득 찰 뿐일 테지. 나 같은 미련한 놈이 하나쯤은 있어야 그래도 세상이 무사히 돌아가지 않겠나?』

담담하게 내뱉는 올포원의 목소리에는 현기마저 가득 느껴졌다.

『그대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음에도 그대가 짊어진 의무와 업보를 묵묵히 이어 나가고 있는 것은 똑같지 않던가? 전부 그런 게지.』

『당신이 짊어졌다는 것들이 사실상 당신의 아버지가 도망치듯 떠나며 강제로 떠맡긴 것이라 하여도?』

『그렇다 하여도 내 생각은 틀리지 않는다네.』

『역시나 당신은 이해하기 어려워요.』

『어려울 것 없다네. 그냥 그대나 나나 서로가 추구하는 바를 묵묵히 걸어 나갈 뿐이라는 것이니. 거기서 빚어지는 충돌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대의 말마따나 이곳에서 스러진다고 하여도, 이 몸은 걷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라네. 고행(苦行)이란 그런 게 아니겠나.』

하르모니아가 쓰게 웃었다.

『당신은 수도자로 태어났어야 했어요. 그랬다면 이름난 고승이 되어 세상을 이롭게 했을 테죠. 지금처럼 원망만 사지 않았을 텐데.』

『내가 태어난 곳에선 이런 말이 있다네.』

순간, 하르모니아는 얼굴을 뒤덮은 빛을 뚫고 그의 눈이 번뜩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라.』

올포원의 목소리에 힘이 가득 실렸다.

『내가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면, 누가 가리?』

『역시. 당신은 이런 곳에 오지 말았어야 해요. 영웅이 될 상이 억지로 피를 뒤집어쓴 꼴이니……. 그러니.』

하르모니아의 목소리는 엄숙했다.

『당신을 존경하는 뜻에서, 이제 편히 잠에 들게 해 주겠어요.』

『쉽지는 않을 걸세. 이 몸은 올포원(All for One), 모든 것의 정점에 있으며 홀로 존재하여 유아독존(唯我獨尊) 하는 존재이며. 비바스바트(Vivasvat), 모든 인간의 어머니였던 내 어머니의 친부께서 직접 당신의 존함을 내려준 존재일지니.』

쿠쿠쿠쿠……!

올포원이 풍긴 기세를 따라 이데아가 요동쳤다.

그 속에서.

올포원이 포효했다.

『그런 이 몸을 과연 누가 막을 수 있을 텐가? 어디 해볼 수 있다면 해보아라.』

* * *

[이곳은 77층, 빛의 관입니다.]

[77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시련: ‘당신이 보고 있는 현실 세상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 모든 물질은 본디 절대 변형될 수 없는 보편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고, 이 모습이 존재하는 세상이야말로 절대 불변하지 않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곳은 바로 그러한 불변하지 않는 진리를 담은 세상을 모방한 세상입니다.

감각도, 인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흔들리는 이곳에서 당신의 정신은 오로지 새하얗게 뿜어지는 빛만을 바라봐야만 합니다.

빛을 인지하여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획득하세요.

그런다면 당신의 영혼도 무언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연우가 우회로를 통과했을 때에 보게 된 건, 새하얗기만 한 세상이었다.

크로노스의 기억 속에서 보기도 했던 곳.

오로지 빛으로만 가득한 세계.

거기에 노출되고 있노라면, 영혼이 저절로 맑아지고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게 못내 불쾌했다.

자신은 바라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강제로 그런 것을 겪어야만 했으니까. 어쩌면 이곳 스테이지에 들어온 그들의 힘을 빼 놓기 위한 전략일지도 몰랐다.

[알 수 없는 힘이 스테이지 효과를 강제로 취소하였습니다!]

[‘상태: 아타락시아’가 불발되었습니다.]

연우는 눈이 확 뜨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경고! 이곳은 플레이어 ‘비바스바트’의 권능이 미치고 있는 대성역입니다. 허락받지 않은 무단 침입은 차후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되돌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경고! 당신은 현재 타인의 대성역을 불법 점거 중입니다. 온갖 디버프가 발생합니다.]

[디버프로 인해 속성 저항력이 저하되었습니다.]

[디버프로 인해 항마력이 저하되었습니다.]

……

[시스템 키(巳)가 작동하여 모든 경고 메시지를 종료합니다.]

수도 없이 떠오르는 경고 메시지 너머로, 온갖 색채를 자랑하는 빛 무리들이 강한 충격파와 함께 퍼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쿠쿠쿠쿠!

천계의 신들이 일제히 강림을 시도하면서 대성역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올포원의 본체를 조금이라도 빨리 찾기 위해 빛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여러 주신들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다.

『아들아.』

그때, 크로노스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크로노스는 연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이곳 어딘가에 갇혀 있을 페렌츠 백작을 구해 달라고.

튜토리얼에서 올포원에 의해 강제로 끌려왔던 그를 도와준 은인이 아니던가. 연우 역시 페렌츠 백작이 있었기에 오늘날 자신이 크로노스를 만나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겠다고 대답했었다.

무엇보다. 그는 흡혈군주의 남편이기도 하지 않던가.

“……오랜만이구나, 여기도.”

츠츠츠-

연우 뒤쪽으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나면서 하나로 뭉쳤다.

흡혈군주 바토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빛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러 감정으로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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