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공동 전선 (4)
“엄마다, 엄마!”
세샤는 마을 어귀로 들어서는 아난타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쪼르르 달려가 폭 안겼다.
아난타는 그런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엄마 없는 동안 아저씨, 아주머니들 말씀 잘 듣고 있었지?”
“당연하지! 세샤는 착한 아이인걸…… 요?”
세샤는 기운차게 대답하다 말고, 도중에 말꼬리를 끌면서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렸다. 작은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게 보였다.
참 거짓말을 못 한단 말이지. 아난타는 웃음이 번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물었다.
“무슨 사고 쳤구나?”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엄마한테만 말해 볼래?”
“그, 그게…….”
“그게?”
“하지 말라고 계속 그래도 남자애들이 내 고무줄 자꾸 끊고 갔단 말이야. 그리고 여자애들 치마도 자꾸 들추려고 하고. 그래서…….”
“한 대 쥐어박았구나?”
“아, 아니.”
세샤는 손가락을 매만지면서 우물쭈물했다.
아난타의 눈웃음이 살짝 더 커졌다.
“그럼?”
“다섯 대…….”
“뭐? 호호호!”
아난타는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외뿔부족은 전통적으로 보통 아이 때부터 무공을 단련시킨다. 그러다 보니 저들끼리 ‘논다’고 말하는 것도 실상 싸움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고, 부족을 벗어나면 또래에서 그들을 이길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전무했다.
그런 거친 아이들을 세샤가 혼내 줬다(?)고 하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이전부터 세샤가 마을 아이들을 완전히 휘어잡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거의 평정(?)을 이룬 모양이었다.
이건 차정우의 핏줄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브라함의 조기 교육 때문인 걸까.
‘아빠 때문이겠지. 절대 지지 않으려는 게 이럴 때 보면 참 판박이란 말이지.’
아난타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알면 차정우가 그게 무슨 소리냐면서 펄쩍 날뛰겠지만…… 이미 아난타는 ‘차’ 씨 집안사람들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세샤가 여자애들 대신에 남자애들을 혼내 줬구나?”
“응!”
세샤는 아난타가 혼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밝은 얼굴로 돌아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엄마, 엄마.”
“왜 그러니?”
“아빠랑 브라함은?”
세샤는 다른 가족들은 오지 않았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난타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양을 구출하고 난 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연우를 따라 올포원을 잡기 위해 77층으로 넘어간 상태.
아난타는 그 무리에 끼어 봤자 방해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하차를 한 상태였다.
그동안 세샤를 너무 오랫동안 홀로 방치해 두기도 했었고.
지금은 이렇게 밝게 자라고 있지만, 그래도 한창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나이가 아닌가. 잠들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엄마로서 너무 무책임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난타는 아무 대답 없이 세샤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세샤는 엄마가 왜 이러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부드러운 품이 좋았던지 가슴에 얼굴을 마구 비비면서 ‘헤헤’ 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난타는 그렇게 세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우, 빨리 돌아와. 세샤가 이렇게 기다리잖아.’
아난타는 77층 공략이 실패하더라도, 그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 * *
흡혈군주는 그동안 연우의 그림자 속에 터를 잡고 한동안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어설픈 탈각으로 인해 스테이지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기가 힘들었던 데다가, 자신의 힘이 연우에게 큰 도움이 되기 어려우리란 걸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해에서 처음 만났을 때야 자신이 훨씬 강했다지만, 그가 창공 도서관을 나오고 난 뒤부터는 자신이 뛰어들 판이 어디에도 없었다.
이래서야 마해의 왕 중 한 명이라고 자칭하기도 부끄럽지 않겠는가.
심지어 소싯적에 라이벌이기도 했던 부-파우스트조차도 이미 그녀를 추월한 지 한참이었다.
그래서 흡혈군주는 그림자 속에서 폐관 수련을 시도했다.
다행히 연우는 한때 그녀가 쫓기도 했었던 칠흑의 후예인바. 그의 영역에 있으면 칠흑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고, 창공 도서관에서 얼핏 봤던 계시록을 통해 영혼을 성숙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흡혈군주가 이루고자 한 목표는 아주 간단했다.
입신(入神).
올포원 때문에 이룬 건지 실패한 건지 알기 힘들 탈각을 마저 완성하고, 초월까지 이뤄 내어 완전한 신격을 터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연우가 최후의 결전이라면서 77층에 들어선 순간, 흡혈군주는 드디어 자신이 나설 차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에.
그토록 꿈에서라도 그리던 지아비가 있었다.
언제나 냉소 어린 표정만 짓던 흡혈군주의 얼굴이 흥분으로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많이 강해진 것 같으십니다.”
“너에게 방해가 되어서야, 함께 하겠다고 약조했던 것이 전부 부질없는 게 되어 버리지 않나. 나는 절대 허언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백작님은 반드시 내 손으로 구해야 한다. 올포원, 그놈의 심장에다 칼도 박아 넣어야 하고.”
흡혈군주의 타오르는 눈길을 보고 있노라니, 절대 방해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완성한 신격도 이제 마해의 왕 중에서도 수위에 꼽힌다고 할 정도의 급인 것 같았다. 라플라스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삼왕(三王)이나 사왕(四王)쯤은 노려볼 만하지 않을까?
그리고 흡혈군주에 이어서 대로도 포탈을 타고 넘어왔다.
“이곳이 77층이로군. 나 때는 레드 드래곤이 있어 76층을 통과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었는데 말이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안경을 고쳐 쓰고 있는 그의 주변으로 배광의 입자들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쏟아지고 있었다.
은연중에 사위를 짓누르는 격이 또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대장로도 초월을 이뤘다는 뜻이었다. 연우는 그를 보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천계 내에서도 지금 대장로를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손에 꼽으리란 것을.
츠츠츠-
그림자가 번져 나가고, 권속들도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올포원을 상대한다는 사실에 잔뜩 고무된 샤논.
여전히 냉정하게 칼을 손질 중인 한령.
말없이 바람이 되어 연우 주변을 맴도는 레베카.
병사들의 전열을 빠르게 정비하는 람.
다른 거인들과 함께 다가올 전투에 크게 반색하며 포효를 내지르는 발데비히.
빛의 세계 위를 크게 유영하면서 죽은 동족들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 전의를 다지는 여름여왕과 칼라투스.
부-파우스트는 하늘을 따라 수십 수백 개의 마법진들을 띄운 채로, 연우의 뒤에서 인페르노 사이트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권속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칸과 레온하르트. 뒤이어 대규모 포탈이 열리면서 부유성 라퓨타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 빌어먹을 형님 같으니라고! 이렇게 재미난 이벤트가 벌어질 것 같았으면 나부터 불러야 할 것 아니우!』
라퓨타의 대외 확성기를 통해 판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라퓨타의 입구 쪽에 판트와 에도라, 도일을 비롯해 아르티야의 멤버들은 물론, 휘하 클랜원들도 잔뜩 도열한 것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강의 플레이어이자 일인 클랜이기도 한 올포원을 상대한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들 중에는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장소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전의에 불타는 이들도 많았다.
“시작하지.”
연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콰르르릉-
퍼버벙!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본 드래곤, 바로 여름여왕이었다.
한껏 아가리를 뒤로 젖히더니 그대로 브레스를 내뿜었던 것이다.
그녀가 본래 터득하고 있던 화속성에 죽음의 속성이 더해지고, 여기다 칠흑까지 뒤섞이자 브레스는 생전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불기둥이 빛의 세계를 뚫고 안쪽 깊숙한 곳에 작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치 들불처럼 마구 번져 나가면서 표면에 있던 모든 것을 깡그리 밀어 버렸던 것이다.
크롸롸롸!
거기다 칼라투스가 크게 포효를 내지르면서 하강을 시도, 갖가지 마법들이 발현되어 빛의 세계를 수도 없이 난도질했다.
두 사룡에게 있어서 올포원은 용살대전을 두 차례나 일으켜 동족들을 멸종으로 이끌었던 철천지원수.
오랜 기다림 끝에 목적지에 다다랐으니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게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를 지켜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에게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데 충분했다.
라퓨타가 다시 움직였다. 플레이어들은 갖가지 버프를 잔뜩 단 채로 스테이지에 뛰어들었다. 땅도 하늘도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장소였지만, 전의는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숱하게 죽어 나가겠구나.』
크로노스는 불나방이나 다름없는 그런 녀석들을 보면서 혀를 찼지만.
“저는 떠민 적 없습니다. 죽으면 죽은 대로 재사용이 가능할 테고. 전력이 감소할 일은 없을 듯합니다.”
연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짤막하게 대답했다.
크로노스는 그런 연우를 보면서 아주 잠깐이나마 위화감에 젖었다. 신으로서 오랫동안 살았고, 인간으로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자신마저도 곧 줄줄이 죽어 나갈 인명이 안타까운데, 아직까지 인간이나 다름없는 아들이 이토록 냉정한 대답을 하니 멀게 느껴졌던 것이다.
아무리 죽음을 가까이 두었다고 하더라도. 싸우다 죽는 것이 탑에 들어온 플레이어들의 운명이라 하더라도, 너무 그들을 ‘자원’으로만 여기는 태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들의 모습이 얼추 이해가 되기도 했다.
‘너는 아직도 이세상을, 이 탑을 용서치 않은 것이구나.’
남들에겐 8대 클랜과 아홉 왕이 줄줄이 죽어 나간 이때, 연우의 복수도 모두 끝난 것으로만 비칠 테지만.
아직까지 연우의 복수는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장 큰 원흉은 8대 클랜도, 아홉 왕도 아니었다.
철저한 방관.
그리고 의도적인 무시.
헤븐윙과 아르티야가 성세를 이룰 때에만 관심을 보이다가, 정작 필요할 때에는 등을 돌리고 만 그들이 모두 그의 눈에는 공범으로만 보였다.
물론, 그 많은 플레이어들을 모두 학살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연우는 오로지 자신과 클랜의 후광만을 쫓아온 파리 떼들을 전략적 도구로만 바라볼 뿐이지, 마음을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콰릉, 콰릉, 콰르르-
콰콰콰콰!
크고 작은 폭발이 수도 없이 번져 가는 가운데.
어느새 샤논을 비롯한 권속들도 일제히 디스 플루토를 이끌고, 소속들이 하강을 시도했다.
[죽음의 태엽이 빨리 감기 됩니다.]
[권속들에 ‘투쟁’과 ‘죽음의 가호’가 뒤따릅니다!]
[‘죽음의 행진’이 시작됩니다!]
연우는 잘게 부서지는 빛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회중시계를 꺼내 쇠사슬과 연결시켰다.
찰칵!
[시간의 태엽과 연결되었습니다.]
[태엽이 많이 망가진 상태입니다. 기능 중 상당수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신력이 부여되어 기능 중 일부를 복구합니다.]
째깍, 째깍-
시곗바늘이 빠르게 돌아가고.
[시간의 태엽이 작동합니다!]
[2배속으로 빨리 감기 됩니다. 광속화(光速化)가 이뤄집니다.]
파아앗!
연우는 그대로 빛살이 되어 권속들과 수하들이 만들어 준 길을 뚫고 들어갔다.
비그리드를 한 손에 쥔 채로. 합 일을 이루며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베어 나갔다.
[죽음의 태엽이 맹렬한 속도로 회전합니다!]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같이 맞물려 돌아갑니다!]
[현재 맞물린 톱니 수: 666개]
[‘죽음’의 개념이 작동합니다!]
그 순간, 연우의 존재를 인식한 빛의 세계가 거칠게 꿈틀거렸다.
[대성역이 위험한 존재를 인식하였습니다.]
[최고 등급의 방화벽이 가동됩니다.]
빛의 세계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던 수천수만 개의 기둥들이 일제히 새로운 형태를 갖춰 나갔다.
그것을 본 순간, 연우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었다.
빛의 기둥이 변한 존재는 전부 용종이었다.
한때, 77층을 넘기 위해 도전했다가 올포원에 의해 도살되었던 바로 그 용들이 죽어서 올포원의 권속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바스바트으! 네놈이 끝까지……!」
당연히 여름여왕의 분노는 이성을 상실케 하고 말았고, 브레스도 더더욱 강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칼라투스의 포효도 더 쩌렁쩌렁하게 스테이지를 울렸다.
한편, 여름여왕 하나도 감당하지 못해 76층을 넘지 못했던 플레이어들은 드래곤을 떼거지로 마주치게 되자 드래곤 피어에 완전히 질리고 말았다.
그렇게 혼잡한 난전 중에 에인션트 급의 용종 대여섯 마리가 한데 모여 연우에게로 브레스를 뿌려 댔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기엔 쉽지 않을 것 같아, 검뢰로 모두 치워 버리려는데.
[동맹군, ‘니플헤임’이 참전을 선언하였습니다!]
[헬이 강림합니다!]
콰르릉!
별안간 연우의 앞으로 검은 벼락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헬이 고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거칠게 손을 뿌리며 브레스를 모두 치워 버렸다.
『우리 ### 님의 옥체에 감히 더러운 손을 대려 하다니! 나도 아직 못했는데 부러워 죽겠…… 아, 아니, 하여간! 3기 팬클럽 회장으로서 절대 용납 못 하니까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