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공동 전선 (5)
“헬?”
연우는 전혀 생각도 못 한 존재의 등장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순간, 헬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뒤쪽을 홱 하고 돌아보았다. 어쩐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다…… 시…… 불러 주시겠어요?』
“……헬?”
연우는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헬의 모습이 어쩐지 갑자기 달라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그래도 도와준 게 있으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름을 다시 불러 주었고.
『꺄아아악! ### 님이 내 이름을 직접 부르셨어! 헬은! 헬은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
헬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면서 즐거워 죽으려고 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어쩐지 위험해 보여, 연우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 님……!』
헬이 당장이라도 연우에게 와락 안기려 들 것처럼 굴 때.
『헬!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칫! 또 잔소리만 많은 귀찮은 양반 왔네.』
헬은 허공에서부터 울리는 목소리에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서는 귀찮다는 듯 투덜거렸다.
[요르문간드가 강림합니다!]
[펜리르가 강림합니다!]
헬의 좌우로 검은 벼락이 떨어지면서 각각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뱀, 요르문간드와 자그마한 강아지, 펜리르가 나타났다.
왕!
반갑다며 꼬리를 흔드는 펜리르 위에는 역시나 꼬마의 모습을 한 아가레스가 앉아 있었다.
『후후! 그동안 잘 지냈나?』
[아가레스가 강림합니다!]
대체 동마왕군의 아가레스가 왜 펜리르 등과 함께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참여했다는 것은 그만큼 큰 전력을 확보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녀석을 여전히 완전한 아군으로 믿기는 힘들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너에게서 아주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지금도 연우를 보는 녀석의 눈빛은 탐욕으로 젖어 있었으니까.
특히 아가레스는 평상시와는 다른 냄새를 맡은 듯, 시선이 쇠사슬과 연결된 회중시계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친숙하면서도 맛있는…… 그런 냄새.』
아가레스가 붉은 혀로 입술을 가볍게 축였고.
츠츠츠!
회중시계가 잘게 떨리더니, 차정우의 사념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가레스가 가진 것과는 상반된 순백색의 날개를 펼치면서.
『오랜만이야, 아가레스.』
『역시! 역시 너였구나! 너였어! 아하하하!』
아가레스는 다섯 살 난 외형에 어울리지 않게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도중에 뚝 그치면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형제가 나란히 그렇게 앉아 있으니 참으로 보기 좋구나. 그래. 아주 좋아.』
『아직도 미련을 못 떨친 거냐, 너는?』
『미련을 떨쳐? 내가 왜? 늘 말했지만 너희 형제는 내 것이다. 그 영혼만큼은 누구에게도 줄 수도 뺏길 수도 없어!』
『네가 이러는 건, 사실 우리 영혼이 탐나는 게 아니라, 베드로의……!』
『닥쳐라! 차정우, 아무리 너라 해도 그 뒷말을 이으려 한다면 입을 찢어 버릴 테니까!』
아가레스는 차정우의 말허리를 도중에 자르면서 크게 으르렁거렸다. 순간, 광기가 분기(憤氣)로 변하면서 대기가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차정우의 입가에 맺힌 씁쓸함은 사라지질 않았다.
거기서 연우는 아가레스의 광기 어린 집착에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이유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 릴 수 있었다.
아가레스는 차정우의 사념체가 아닌, 그것이 깃든 회중시계를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탐욕은 이제 광기 어린 집착으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든 저것을 가지고 말겠다는 의지가 단단히 깃들었다.
당장이라도 회중시계를 갖기 위해 달려들 듯한 모습이었지만, 아가레스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헛소리를 지껄인 차정우, 네놈부터 혼내고 싶지만.』
콰아아아!
다시 여러 마리의 광룡(光龍)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우선은 저 귀찮은 것들을 전부 정리하고 나서 생각해야겠어!』
순간, 아가레스의 등 뒤로 수십 쌍의 검은 날개가 활짝 펼쳐지면서 하늘을 뒤덮을 듯 크게 치솟았다.
[아가레스의 요청에 따라, ‘동마왕군’이 출현합니다!]
[동맹군, ‘동마왕군’이 참전을 선언하였습니다!]
검은 날개가 잘게 부서지는가 싶더니, 그 사이로 강대한 마기를 풍겨 대는 악마들이 속속 나타나 저마다 광룡을 한두 마리씩 붙잡아 싸우기 시작했다.
왕! 왕왕!
펜리르도 곧 거대한 늑대로 변하면서 근방에 있던 광룡의 목덜미를 단숨에 물어뜯고, 뒤이어 다가오던 녀석에게 발톱을 휘두르며 머리를 터뜨렸다.
요르문간드와 헬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니플헤임 소속의 악마들도 속속 강림했다는 메시지가 뜨면서 이번에는 검은 빛무리도 같이 퍼져 나갔다.
『형.』
“그래. 더 서두르자.”
째깍, 째깍!
[시간의 태엽의 감기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현재 속도는 4배속입니다.]
연우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속도를 최대한 느리게 만들면서, 몸을 다시 스테이지 중심지 쪽으로 움직였다.
[시간의 태엽이 최대 속도로 감기고 있습니다. 현재 속도는 8배 속입니다.]
[죽음의 태엽이 빨리 감기 됩니다!]
[두 개의 태엽이 동시에 작동합니다!]
[신체가 과부하 상태가 되었습니다!]
[주의! 두 태엽이 감기는 속도가 너무 빠르면 톱니바퀴의 마모와 손상이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주의! 두 태엽이 감기는 속도가 너무 빨라 신위에 막대한 피해가 끼칠 수 있습니다!]
태엽을 동시에 두 개나 감으면 그만큼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완숙의 상태가 되었다고 해도, 아직 탈각도 이루지 않은 필멸의 육체라면 더더욱.
아마도 거마신룡체라는 특이한 체질을 지녔기 때문에 그나마 여기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일 테지.
하지만 연우는 신체에 부담되는 과부하나 중압감 따윈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경고! 두 태엽이 감기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신체의 내구도가 급속도로 저하되고 있습니다! 유의해 주십시오!]
[경고! 시간의 태엽의 마모와 손상 정도가 예상치를 훨씬 웃돌고 있습니다! 중단할 것을 권고합니다!]
[두 태엽의 상승 작용으로, ‘죽음’의 개념이 강화되었습니다!]
[개념 부여로 알 수 없는 힘이 강화되었습니다!]
연우는 오히려 거기서 파생되는 모든 힘을 비그리드에 담아, 음검을 펼쳤다.
검뢰팔극의 형태로.
쿠릉, 쿠릉, 쿠르르르-
콰콰콰쾅!
비그리드를 거칠게 휘두를 때마다, 죽음의 개념이 덧씌워진 검뢰가 잇달아 빛의 세계에 작렬했다. 그를 붙잡기 위해 달려들던 광룡들이 모조리 쓸려 나갔다.
[알 수 없는 힘이 대성역, ‘광역(光域)’을 분쇄하고자 합니다.]
[실패하였습니다!]
[알 수 없는 힘이 대성역, ‘광역’을 분쇄하고자 합니다.]
[실패하였습니다!]
……
빛의 세계는 어떻게든 연우의 거친 공세로부터 버티려 노력했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고.
[알 수 없는 힘이 대성역, ‘광역’에다 ‘죽음’을 이식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대성역, ‘광역’의 내구도가 빠른 속도로 하락합니다!]
[모든 가호가 정지되었습니다.]
[모든 축복이 정지되었습니다.]
……
[모든 기능이 정지되었습니다.]
오극에 다다랐을 때, 결국 틈을 내보이고 말았다.
그리고.
육극에서 방화벽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알 수 없는 힘이 방화벽의 일부를 분쇄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연우는 부서진 결계를 뚫고 안쪽으로 착지했다.
그곳은 새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까지 보이는 세상이었다.
감옥.
크로노스의 기억 속에서 페렌츠 백작이 그렇게 부르던 곳.
“백작! 어디에 계시오, 백작!”
그때, 연우를 따라왔던 흡혈군주가 애타는 목소리로 페렌츠 백작을 불렀다.
언제나 도도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애가 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작!”
하지만 온 사방이 외부보다 더 하얀이 감옥에서 죄수들을 찾기란 그리 쉬워 보이지 않았다.
연우도 화안금정을 같이 뜨려던 그때.
“부인!”
저 멀리서, 페렌츠 백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여기에 있소, 부인!”
“대체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분명히 목소리는 가까웠다. 하지만 도무지 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혹시 자신들이 올포원이 만든 환청이라도 듣고 있는 걸까.
‘설마?’
그러다 연우는 문득 든 생각에 비그리드로 허공을 거세게 내그었다.
그가 자르고자 한 것은 이 감옥이 아니었다.
그 너머에 있는 시스템이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성역에 설치된 방화 체계를 마비시켰습니다.]
[방화 체계, ‘환영’의 가동이 중지됩니다.]
츠츠츠!
마치 무대 위에 쳐진 백색 장막을 거두듯, 빛의 세상이 한 겹 치워진 자리로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된 공간이 나타났다.
“백…… 작!”
“부인! 정말 당신인 것이오?”
거기서 지난 수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서로를 잊은 적이 없던 페렌츠 백작과 흡혈군주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정말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맞는 것인지, 혹여 자신이 환상이라도 보고 있는 게 아닌지, 손끝으로 매만지고, 코끝으로 체향을 맡았다. 그리고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라나.”
휘휘휘!
그리고 그들의 딸인 라나까지 불렸을 때. 세 사람은 눈물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살면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었던 부모와 자식이 그렇게 다시 만났으니까. 특히 딸이 죽은 영혼의 상태로 돌아온 것에 페렌츠 백작은 가슴 아파했다. 이곳에서 스크린으로 딸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그이기도 했기에 아픔은 더 컸다.
하지만 그들 가족은 눈물은 흘릴지언정, 이성을 잃진 않았다. 한순간의 감정 기복에 사로잡혀 기회를 놓칠 수 있었으니까.
“크로…… 노스.”
페렌츠 백작은 아내와 딸의 등을 다독이면서 연우 쪽을 보았다. 어느새 현신을 마친 크로노스가 이쪽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때 했던 약속은 지키었소.』
크로노스가 페렌츠 백작의 도움을 빌려 ‘송곳’으로 이 감옥을 탈출할 계획을 세울 당시, 그는 지나치듯이 백작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자신이 만약 이곳을 빠져나가게 된다면, 당신은 무엇을 원하느냐고.
-내 소원 말인가? 허허허! 상상만 해도 아주 기쁘군. 계획이 성공할지 여부도 모르는 판국에 그런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단 것이.
-그러니 말해 보라는 것 아닙니까. 상상은 무엇을 품든 간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자신만의 보물이니까. 이곳을 나가고 싶다든가, 아니면 흩어졌다던 가족들의 행방을 알고 싶다든가?
-흠!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일세.
-거 보라니까. 결국엔 있다니까. 그래. 뭡니까?
-가족을 보고 싶군.
-탈출하고 싶다가 아니라?
-다른 건 크게 바라지 않네. 그저 아내와 딸의 손이라도 잡아 볼 수 있다면…… 눈을 감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그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할 뿐.
그렇게 말하면서도 페렌츠 백작은 가능하겠냐면서 쓰게 웃기만 했다. 그러고는 완전히 잊어버렸던 것을, 크로노스는 여태 잊지 않고 있다가 결국 약속을 이뤄 준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웠기에.
페렌츠 백작은 흔들리는 눈으로 크로노스와 연우를 바라보다, 이내 무언가를 다짐한 듯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천천히 제자리에 부복했다.
“칠흑의 신도, 나더슈디 차흐치테 페렌츠가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이 몸을 이루고 있는 영과 육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토록 당신만을 따를 것입니다.”
뒤이어 흡혈군주와 라나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칠흑의 신도, 에르체페트 바토리도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칠흑의 신도, 라나 페렌츠도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새로운 신도가 맹약을 선언하였습니다!]
[새로운 신도가 맹약을 선언하였습니다!]
[신앙 수치가 일정 수치를 초과하였습니다.]
[더 많은 칠흑의 속성을 획득하였습니다.]
[더 많은 칠흑의 속성을 획득하였습니다.]
……
[‘죽음’의 개념이 강화되었습니다.]
……
[당신을 숭배하고 신앙하는 신도들을 더 많이 확보하세요. 신앙 수치가 높아질수록 사용할 수 있는 칠흑의 양도 많아집니다.]
[칠흑왕이 당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