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공동 전선 (6)
츠츠츠!
연우를 중심으로 칠흑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면서 몸을 칭칭 감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해지는 모습.
연우는 자신을 둘러싼 죽음의 개념이 더 단단히 강화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666개의 톱니바퀴와 맞물린 태엽이 더 정교해진 기분이었다.
더 많은 칠흑의 속성을 터득했다는 안내 메시지가 의미하는 게 바로 이것일 테지.
하지만 연우의 눈에 밟히는 메시지는 따로 있었다.
칠흑왕이 자신을 인식했다는 말.
그게 의미하는 바가 절대 작지 않기 때문이었다.
‘칠흑왕이…… 조금씩 의식을 차리고 있다는 건가? 아니면 그냥 무의식중에 내가 있다는 걸 감지한 건가?’
여태껏 이런 내용의 메시지를 받아 본 적은 없었다.
천마의 말에 따르면, 칠흑왕은 탑 아래에 단단히 갇혀 있고,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기나긴 잠에 들고 말았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반물질과 무질서, 꿈과 죽음, 혼돈 등 다양한 개념들이 나타나 세상의 음(Minus or Negative)을 이루게 되었다.
개념적인 존재에 가깝기 때문에 이렇다 할 의식이나 자아 같은 것이 정립되질 않아 ‘기나긴 잠에 빠졌다’고 표현되기도 하는 그가…… ‘인식’을 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득이 될지, 아니면 해가 될지는 아직 감이 잡히질 않았다.
칠흑왕의 힘을 빌리는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앞으로 더 많은 힘을 전달해 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서는 더더욱 녀석에게 구속되는 꼴이 되고 말 테니까.
더구나 하르모니아라는 다른 후예가 있는 이상, 마음 놓고 칠흑왕의 힘을 가져다 쓸 수도 없었다.
어쩌면. 칠흑왕은 자신과 하르모니아를 두고 경쟁을 붙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정확히 그의 의도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어쨌든 연우에겐 더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경각심을 일러 주는 결과를 낳았다.
만약 하르모니아와 시의 바다가 외치는 대로 칠흑왕이 조금씩 눈을 뜨고 있는 것이라면. 결코 그냥 소홀히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지금은 올포원을 사냥하는 데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이다.
연우는 자신을 신으로 떠받들겠다면서 복종과 숭배를 맹세한 페렌츠 백작의 가족들을 내려다보았다.
‘신격들이 바치는 숭배는…… 그만큼 크고 많은 양의 신앙들을, 질 좋은 신앙들을 모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된다.’
이미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그를 ‘주인’으로 모시겠다면서 복속을 맹세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이자 군주로서 따르겠다는 뜻이지, ‘신’으로 모시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왕과 신은 얼핏 ‘따른다’는 개념 때문에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왕을 따른다’는 뜻은 대상이 지도자로서의 소질이 있고, 자신의 이익 실현을 대변해 줄 수 있을 것 같으니 따르는 거래에 가까운 것이라면.
‘신을 따른다’는 것은 대상을 마음속 깊이 복종하고 숭배하며,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거래와 같은 계산적인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사심(私心)이 들어가서는 맹목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대상이 자신을 봐 주지 않더라도 먼저 내놓는 마음이며, 영원토록 봐 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이다.
때로는 그런 순수가 광기가 되고, 편집증이 되어 피해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마군이 그러했고, 시의 바다가 그렇지 않던가.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결여’를 채우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몇몇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다.
그렇기에 죽음의 신과 악마들이 연우에게 바치는 것은 충성이었지, 신앙이 아니었다. 그들의 신앙은 오로지 칠흑왕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연우가 칠흑왕의 후계 자리를 포기한다고 한다면? 죽음의 신과 악마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우에게 등을 돌릴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배반자라면서 서슴지 않고 창칼을 겨누려 들 테지.
하지만.
‘이들은 다를 터.’
연우는 페렌츠 백작의 가족들을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들은 원래 칠흑을 좇던 자들이었고, 탈각과 초월을 경계한 올포원이 강제로 붙들어 둘 만큼 강한 힘을 터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이들이 복속을 맹세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더 이상 칠흑왕이 아닌, 연우 개인이었다. 이미 신격이나 다름없는 그들이 바치는 신앙이니만큼, 신앙도도 그만큼 급속도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성장할 곳이 없었던 영혼의 격도 더 부쩍 꽉 찬 느낌이었다.
이미 망자 거인들의 신으로 숭상받으며, 사룡들을 부리고도 있다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연우가 개인적으로 바라던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했다.
신앙도의 수치를 끌어올리는 것.
77층 아래에 있는 모든 신앙들을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는 것.
그것이 이번 올포원 레이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테니까.
그래서.
연우는 이들의 맹세 앞에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경험상 때로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상대에게 그에 걸맞은 무게를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감옥에 있던 다른 존재들을 돌아보았다.
사실 연우가 가장 먼저 감옥을 급습하고자 했던 이유에는 페렌츠 백작과의 약속을 지키게 해 달라는 크로노스의 간청도 있었지만,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흡!”
“…….”
“…….”
몰래 페렌츠 백작 등을 힐끔거리던 죄수들이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 저마다 황급히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마치 몰래 물건을 훔치려다가 들킨 사람들 같은 모습.
어딘지 모르게 다들 하나같이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조금씩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와중 두려워하는 기색마저 느껴졌다. 올포원이 강제로 끌고 온 이들이니만큼, 저마다 품고 있는 기질이나 격은 대단한 것 같은데…… 어쩐지 무언가가 꺾여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백작.”
“예.”
“어떻게 된 거지?”
연우는 크로노스처럼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기로 했다면, 그에 걸맞은 위계 질서를 확실히 잡는 게 가장 중요했다. 때로는 언어가 관계를 구분 짓는 척도가 되기도 했으니까.
다행히 페렌츠 백작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연우가 던진 질문에 대해서도, 주어는 생략되었지만 완전히 이해를 한 듯 보였다.
연우와 보이지 않게 연결된 신앙선(信仰線)이 그의 뜻을 지레 짐작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구속된 자유와 까마득한 세월은 제아무리 창칼처럼 잘 벼려진 의지라 하여도, 그 날을 무뎌지게 하기에 충분한 법입니다.”
“녹이 슬었단 뜻인가?”
“그렇습니다.”
연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 감옥에 갇힌 죄수들 모두 이미 올포원에 대항할 의지가 완전히 꺾였단 뜻이었다.
한때는 플레이어와 랭커들을 대표하며, 올포원의 아성마저도 노렸을 만큼 거대한 야심과 뛰어난 실력을 지녔던 이들 모두가.
확실히 크로노스의 기억 속에서도 비슷하기는 했었다.
붙잡혀 온 크로노스에게 관심을 보인 건 페렌츠 백작 외에는 없었으니까. 나머지는 무관심하거나, 관심을 보여도 가벼운 호기심에 불과했었다. 무기력증이 이들을 지배한다고 봐야겠지.
물론, 그만한 위치에 오른 이들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한두 명도 아닌 모두가 똑같이 의지가 꺾였다는 사실이 믿기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게 꼿꼿한 존재들이었으니, 보다 큰 난관 앞에서 한 번 부러지고 나면 수복이 힘들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니면 올포원이 이 감옥에다 어떤 수작이라도 걸어 뒀던가.’
처음 77층에 진입했을 때 적용되려던 아타락시아와 같은 효과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점점 힘이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페렌츠 백작이 아직까지 꺾이지 않은 건, 이들 중에서 비교적 가장 최근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이겠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죄수들을 독려하고, 올포원에 대적할 말(馬)로 부리려 했건만. 그리고 페렌츠 백작의 가족들처럼 자신을 숭상하게 하여 신앙도도 끌어올릴 계획이었던 그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친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그냥 방치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죽은 용종들처럼 올포원의 권속이라도 되면 골치만 아파질 테니까.’
결국 연우는 독하게 가기로 마음먹었다.
올포원이 여러 신격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다고는 하나, 자신의 성역에 깊숙하게 침투한 연우의 존재를 눈치채는 건 금방이었다. 그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해둬야만 했다.
휘휘휘휘!
연우는 칠흑을 최대한으로 개방했다.
그러자 연우의 발끝에서부터 그늘 한 점 없던 땅을 따라, 그림자가 먹물처럼 가득 번져 나갔다.
[그림자 영역]
“어, 어어?”
“이, 이, 이건 뭐야! 아악!”
죄수들은 낯선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춤주춤 물러섰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림자는 단숨에 감옥을 새카만 색으로 물들였고.
촤르륵, 촤륵!
거기서부터 튀어 오른 쇠사슬이 일제히 그들의 손발을 단단히 구속했다.
죄수들은 어떻게든 쇠사슬을 떨쳐내려 아등바등했지만, 대지모신도 떨쳐 내지 못했던 것을 그들이 물리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사자 소환’이 발동되었습니다.]
[누구를 소환하시겠습니까?]
“라플라스.”
츠츠츠!
「절 다시 불러 주셨네용! 홍홍홍! 무엇을 하면 될까용, 주. 인. 님?」
“……막아.”
연우는 어쩐지 들어서는 안 될 단어를 들은 것 같았지만, 자체적으로 뇌내 필터링을 거치면서 짤막하게 명령했다.
다행히 라플라스는 연우의 지시를 단숨에 알아차린 듯했다. 곧장 거대한 본체로 돌아가더니, 손을 앞으로 빠르게 내민 것이다.
동시에 그림자가 닿지 않았던 저 안쪽에서부터 새하얀 빛의 입자로 구성된 광선이 이쪽으로 쏘아졌다.
다행히 광선은 라플라스의 손에 부딪치면서 수십 개로 갈라져 다른 곳에 작렬했다.
반쯤 부서진 라플라스의 손을 보면서, 죄수들은 모두 섬뜩함을 느껴야만 했다. 저기에 훤히 노출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올포원이, 다시 돌아오려 하고 있었다.
「사실 최고 관리자로 있으면서, 이따금 궁금하기도 했단 말이죵.」
라플라스의 시선이 닿은 자리, 빛의 입자들이 뭉치면서 사람의 형상을 갖추려 하고 있었다.
[플레이어, ‘비바스바트’가 강림합니다!]
「분명히 시스템이 잘 굴러갈 수 있도록 보수와 관리를 도맡아 하는 저희들이 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자아를 갖춘 화신이 있는 것이니까용. 그렇다고 저희와 협력을 하는 것도 아니고…… 왜 관리국이 필요한 것인지, 참 의아하단 말이지용. 그래서 내린 결론은 아주 간단했어용.」
라플라스의 크기는 과거 타르타로스에서 봤던 티탄보다도 훨씬 큰 크기를 자랑했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좀처럼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연우는 녀석이 웃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료함으로 점철된 마해가 싫어, 오로지 흥미를 유열하기 위해 탑으로 올라온 마물(魔物).
「그냥 그 화신을 때려잡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지용. 그럼 시스템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있으니까용. 그리고 지금, 우리 주인님께서 그런 아주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셨단 말이지용?」
그런 마물은 또 다른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자, 잔뜩 흥분된 기색을 띠며 올포원을 향해 재생된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콰르르-
단순히 휘두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궤도에 놓인 공간들이 일제히 부서져 나갔다.
[성역의 일부가 영구 파손되었습니다!]
[성역의 일부가 영구 파손되었습니다!]
……
[탑에서 관찰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물질이 성역을 오염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제아무리 플레이어라는 자격을 얻었다고 할지언정, 라플라스의 구성 요소는 혼돈과 무질서. 타계로 간다면 당장 외신 급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반면에 올포원은 탑을 세운 천마로부터 비롯되어 균형과 질서를 대변하는 빛을 속성으로 띠고 있었다.
당연히 속성이 정반대인 라플라스는 그에게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나 초월자들처럼 탑의 시스템에 완전히 종속되어 그에게 신앙을 가져다 바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라플라스는 올포원에 있어 속박을 받지 않는 몇 안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당연히 라플라스의 공격은 올포원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고.
콰콰콰!
둘의 격돌은 스테이지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했다.
온통 빛으로만 가득할 것 같았던 스테이지 곳곳에 균열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옷에 묻은 잉크처럼 곳곳에 튀고, 여태껏 수많은 죄수들을 묶어 두던 감옥이 산산이 부서졌다.
라플라스는 아주 크게 웃었다. 녀석의 광소가 메아리가 되어 쩌렁쩌렁하게 스테이지 곳곳에 울렸다. 모든 신과 악마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촤르르륵!
연우는 쇠사슬을 더 팽팽하게 잡아당기면서 여전히 두려움에 찬 얼굴을 한 죄수들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자유와 구속,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지?”
자유를 원한다면 고통스러운 투쟁을 해야 할 것이나, 편안한 구속을 원한다면 죽음이 따를 터.
물론, 후자를 선택한다면 뒤에는 강제로 권속으로 삼을 예정이었다. 싸울 의지가 없다면 강제로 고삐를 채워 마소처럼 부리면 될 일이었으니까.
전자를 택한다면 기회를 줄 예정이었다. 그동안 꺾인 의지를 다시 세울 수 있는.
투쟁과 죽음, 두 가지 모두 연우를 상징하는 신위이기 때문에 그로서는 녀석들이 어떤 선택을 내리든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다만, 그들의 의사를 한 번이라도 물어 준 것뿐이었다.
“저, 저희는…….”
그리고 거기서 돌아온 그들의 대답은.
“싸, 싸우겠습니다.”
“저희도 도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싸우고자 하는 마지막 남은 열망이었다.
페렌츠 백작과 더불어 감옥을 둘러싼 수많은 신격들의 모습에서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를 본 것이다.
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럴 수 있게 도와주지.”
[새로운 신도가 맹약을 선언하였습니다!]
[새로운 신도가 맹약을 선언하였습니다!]
……
[신앙 수치가 급속도로 쌓이고 있습니다!]
……
[신앙 수치가 일정 수치를 초과하였습니다.]
……
[더 많은 칠흑의 속성을 획득하였습니다.]
[더 많은 칠흑의 속성을 획득하였습니다.]
……
연우는 죄수들, 아니, 이제는 새로운 신도들이 된 이들에게 칠흑의 세례를 부여했다.
그 순간.
신도들을 따라 일제히 배광(背光)이 떠올랐다.
수십 개에 달하는 빛무리가 한데 어울리면서 세상을 물들이는 모습은 찬란하면서도 매섭게 느껴졌다.
그 속에 숨겨진 기운은 사기(死氣)와.
투기(鬪氣)였다.
콰콰콰콰!
[‘투쟁’의 신위가 강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