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51화 (27권) (651/862)

27권

1화. 스퀴테 (1)

배광이 빚어내는 세상은 아주 아름다웠다.

노출된 존재들을 강제로 안식에 들게 만들던 올포원의 빛과 다르게, 그들이 빚어내는 빛은 하나같이 죽음의 기운과 투쟁의 기운을 뒤섞어 전혀 다른 기질을 자랑하고 있었다.

[더 많은 칠흑의 속성을 획득하였습니다.]

……

[신앙 수치가 가파른 속도로 쌓이고 있습니다.]

[신앙 수치가 첫 번째 임계점을 돌파하였습니다! 자격과 조건이 충족되어 그동안 확인이 불가능했던 ‘칠흑왕의 형틀’에 대한 정보 열람이 일부 해제되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정보창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

[죽음의 개념이 강화되었습니다.]

[죽음의 개념이 강화되었습니다.]

[소지한 권능들의 위력이 강화되었습니다.]

……

[당신에 대한 죽음의 신들의 충성도가 상승하였습니다.]

[당신에 대한 죽음의 악마들의 충성도가 상승하였습니다.]

……

[칠흑왕이 인식하고 있는 당신의 존재감이 한층 더 짙어집니다.]

[칠혹왕이 ‘이번 꿈’에 대해 자그마한 흥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 선물을 내리고자 합니다!]

연우는 칠흑왕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힘을 실어 주려 하는 기색이 내심 걸렸다.

역시나 힘이 반가우면서도, 그에게 단단히 얽힐까 봐 신경이 바짝 곤두섰던 것이다.

아직까지 칠흑왕에 비하면 자신은 한 줌의 모래와도 같은 존재.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동안 자신이 쌓은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사라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지금은 그의 환심을 사는 게 더 좋을지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번 꿈?’

연우는 메시지 중에서 유독 한 단어가 눈에 밟혔다.

꿈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자신이 칠흑왕이 품고 있던 여러 개념 중 ‘죽음’을 가져갔듯이, 하르모니아가 ‘꿈’을 가져간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하르모니아는 꿈속 세계를 제멋대로 유영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무의식에 침입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허의 힘을 끌어올리는 것일 뿐. 이것과는 조금 의미가 다른 것 같았다.

‘이번이라는 건…… 다른 꿈도 있다는 건가?’

[시차 괴리]

연우는 한껏 빨라진 의식 흐름 속에서 판단을 빠르게 정리해 보고자 했다.

얼핏 짐작되는 건 있었다.

-너는 ‘몇 번째’의 나인 거지?

크로노스의 과거를 엿보았을 때. 크로노스는 어린 시절 우라노스의 명령에 따라 다른 형제들과 함께 칠흑의 늪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태초에 우주가 생기면서 버려진 구획. 신과 악마를 구분 짓지 않고 모든 존재를 빠뜨려 집어삼킨다는 그곳에서, 크로노스는 마성을 만났다. 당시에 녀석이 던진 질문이 바로 저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이나 돌고 돈 걸까?

-뭐, 아무래도 좋아.

-이번에도 될 때까지 해 보면 될 테니까.

추가로 다른 말들을 내뱉기도 했다.

크로노스는 그 말들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마성에 의해 신열(神熱)을 겪느라 생각을 길게 잇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겨우 회복하고 나서부터는 ‘거짓말처럼’ 저 말들을 모두 잊고 지냈다.

지워진 건 아니었다. 그저 별로 중요치 않은 기억이라고 무의식이 자의적으로 판단해 저 깊은 기억의 늪에다 묻어 뒀을 뿐이었다. 연우는 크로노스의 기억을 읽던 도중에 그것을 확인한 것이었고.

그래서 연우는 혹 여기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크로노스에게 물었고.

『아니. 나도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말만 칠흑왕의 사도였을 뿐이지, 정작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전혀 없었으니까. 권능을 깨우친 것도 대부분 마성에 의해서 ‘저절로’ 알게 된 것뿐이었어.』

결국 자세한 건 전부 마성이 알고 있단 뜻이었다.

‘어차피 이 탑을 깨고 나면 칠흑왕과는 어떻게든 조우해야만 해. 늪에도 언젠가는 갈 생각이었고. 그때……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그보다 칠흑왕이 준다고 하는 ‘선물’이란 게 대체 무엇일까?

메시지가 이어서 떠올랐다.

[칠흑왕이 왼손의 약지 한 마디를 잘랐습니다.]

[칠흑왕으로부터 선물이 도착하였습니다!]

휘휘휘!

연우의 손바닥 위로 검은 구슬이 내려앉았다.

마치 칠흑을 끄집어내어 곱게 조각한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구슬.

[칠흑옥(漆黑玉)]

종류: 측정 불가

등급: 측정 불가

설명: 칠흑왕이 내린 성물(聖物). 그 쓰임새는 알아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너무 간단한 설명.

종류와 등급이 ‘측정 불가’로 판정되는 걸 보니, 탑의 시스템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라는 건 확실했다.

이 속에 담긴 칠흑의 양과 질도 여태껏 보았던 어떤 물건과도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이미 웬만한 신격들쯤은 발아래로 볼 정도로 높은 경지에 오른 연우조차 섣불리 손을 대는 게 꺼려질 정도였으니까.

[77층을 공략 중인 신들이 성물, ‘칠흑옥’을 감지하고 두려움에 몸을 떱니다!]

[대부분의 신들이 경악한 얼굴로 ‘칠흑옥’을 바라봅니다!]

[모든 악마들이 강한 충격에 빠졌습니다!]

[‘말라흐’의 서기장, 메타트론이 침묵에 잠깁니다.]

[‘르 인페르날’의 수좌, 바알이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천계의 반응도 다르진 않았다.

올포원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을 여러 신들조차도.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약지를 잘랐다고?’

이것이 칠흑왕이 가진 힘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앞뒤 정황을 봐서는 이게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보낸 물건인 게 분명한데…… 그것만으로도 이만한 힘을 보낼 수 있다면, 대체 본체는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는 쓰임새가 도저히 짐작이 가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용도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불필요한 물건일 게 분명했다. 이래서야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놀림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연우는 어쩐지 칠흑왕이 선물을 두고 전전긍긍할 자신을 지켜보기 위해, 혹은 시험해 보기 위해 이런 짓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건……!』

크로노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알다마다. 모를 수가 없는데.』

크로노스가 한 차례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

『스퀴테의 메인 코어다.』

“……!”

연우는 칠흑옥을 보면서 눈을 아주 크게 떴다.

스퀴테.

크로노스가 신왕 시절에 사용했다던 대신물.

크로노스는 올포원의 ‘빛’을 벨 수 있는 유일한 물건으로 스퀴테를 추천했고, 연우도 언젠가 이것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올포원 레이드를 시작한 지금은 〈음검〉과 함께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기도 했다.

다만, 스퀴테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아다만트의 대부분을 시의 바다가 독점하고 있는 중이라, 잠시 놔두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연우는 빛의 세계로 침투한 뒤, 페렌츠 백작 등을 구하고 나서 곧장 스퀴테 제작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한시가 촉박한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짓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유일신 경쟁처럼 시의 바다가 보이는 동태가 심상치 않고,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도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려 하는 등, 연우로서도 도저히 어떻게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급박한 순간에도 스퀴테를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해 둔 바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같은 목표가 생긴 이상, 시의 바다에서도 아다만트를 계속 독점하고 있을 이유는 없을 테니.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칠흑왕으로부터 스퀴테와 관련된 재료를 받게 되었으니 놀랄 수밖에.

『당연한 말이지만, 스퀴테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건 아다만트만 있는 건 아니다. 성질 변화를 위해서는 다른 재료들도 필요하고…… 그런 건 대부분 포포와 페페가 어떻게든 구해 줄 수 있다고 하니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칠흑옥에 대해서는 말씀한 적이 없지 않으십니까?”

『그야 비그리드가 있으니까. 아무리 많이 무뎌졌다지만, 이 자체가 칠흑옥으로 만들어졌으니 스퀴테를 만드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거든.』

“……쉽게 말해, 이대로 진행했으면 하급의 스퀴테 정도는 나왔을 거란 말씀이시군요.”

『죽음의 태엽을 네가 그만큼 강화시켜 놨으니, 그 정도 차이쯤은 쉽게 메울 수 있겠다 싶었으니까. 그런데…….』

크로노스가 허망하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갑자기 주어질 거라고는.』

크로노스는 과거 칠흑옥을 얻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퀘스트를 진행하고, 그만큼 고생했던 나날들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영혼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이거 완전히 머릿속을 훤히 읽히고 있는데, 아들아?』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퀴테 제작은 아직 일행들 중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

하지만 칠흑왕은 깊은 잠에 빠져 의식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두려움이 저절로 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시험을 해 보려는 건가. 후계로서의 자질을?』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칠흑옥은 여전히 두려운 파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왕에 대리전(代理戰)도 같이 벌어 보려는 것이겠지요.”

칠흑왕을 공허 밑바닥에 처박은 게 바로 천마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올포원이 그런 천마의 아들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칠흑왕으로서는 자신이 후계자로 점지한 연우와 하르모니아가 올포원을 레이드하는 것을 성공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천마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만 잠에서 깨어날 방법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연우에게 힘을 빌려주려는 것 같았다. 아마 다른 후계자인 하르모니아에게도 비슷한 지원이 있을 게 분명했다.

‘기분 나쁘군.’

연우로서는 자신의 계획이 몽땅 들통난 것으로도 모자라, 이용까지 당한다는 사실이 영 불쾌했다.

이건 칠흑왕의 지원과는 별개였다. 전적으로 자신을 희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는 존재의 압제는 언제나 짜증만 부르는 법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칠흑왕이 원하는 대로 어울려줘야겠지.

그 순간, 느려졌던 세계의 시간이 되돌아오고.

쿠쿠쿠쿠!

이제는 연우의 신도로 변모한 죄수들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칠흑의 축복을 통해 사기와 투기를 겸비하게 된 그들은 여태껏 억눌렸던 세월과 울분을 한꺼번에 분출하기라도 하듯, 막강한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페렌츠 백작과 흡혈군주가 선두에 서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광선들을 빠르게 쳐 나갔다.

라플라스는 여전히 기쁜 듯이 크게 난동을 피워 대고 있었다.

『페렌츠, 최대한 시간을 벌어라. 스테이지 외부에서는 아테나와 올림포스가 도와줄 테니 적극 협조하도록 하고.』

『명에 따르겠습니다.』

페렌츠 백작은 이유 따윈 묻지 않았다. 그저 맹목적인 충성만 있을 뿐. 그들에게 있어 이번 싸움은 압제에 대한 투쟁이자,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신을 위한 성전(聖戰)이었다.

수석 사도인 아테나에게는 따로 계획을 일러두었으니, 전황을 거기에 맞게 지휘해 줄 것이다.

올림포스.

망자 거인.

사룡.

아르티야.

성전의 신자들.

그 외에 여러 권속들까지.

‘죽음의 행진’이라는 이름하에, 모두가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온통 ‘빛’만 가득하던 77층에 칠흑이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이로써.

‘판은 만들어졌다.’

원하던 대로 천계와 관리국, 시의 바다 등 여러 말들도 제 위치를 잡았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거기서 왕을 잡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 포석이 필요했다.

‘스퀴테.’

연우가 눈을 감았다.

의식이 깊게 가라앉았다.

[죽음의 태엽이 맹렬하게 회전합니다!]

[시간의 태엽이 천천히 감깁니다!]

목에 건 회중시계의 속도가 처음으로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세상이 마치 ‘정지’라도 한 것처럼 아주 고요하게 흘렀다.

* * *

『혹시나 했는데. 역시 이곳으로 오셨군요.』

연우가 다시 눈을 뜬 곳은 심연이었다.

무의식 세계에서도 가장 깊은 곳. 태곳적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생명체와 영혼들이 보유한 인식(認識)과 사념(思念)이 뭉쳐진 원형(Arche-Type)의 거대 ‘문’ 앞에 하르모니아는 여전히 문지기처럼 서 있었다.

일전에는 여기까지 닿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지나야만 했지만, 이미 한 번 닿았던 적이 있는 곳이기에 이번에는 쉽게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우는 하르모니아의 뒤편에 있는 문을 잠깐 보면서 기이한 눈 빛을 보였지만, 곧 관심을 거두고 하르모니아를 보았다.

“다른 잡설은 걷어치우고,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지. 난 스퀴테가 필요해. 아다만트, 얼마나 갖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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