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스퀴테 (2)
[시간의 태엽이 아주 느릿한 속 도로 천천히 감기고 있습니다!]
[신위가 작동 중입니다.]
[불완전한 신위입니다. 태엽이 작동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손상 정도가 극심해질 수 있습니다. 자칫 영구 손상이 올 수 있으니 작동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엽이 작동되는 동안, ‘탑’을 둘러싼 ‘작은 굴레’가 천천히 굴러갑니다.]
[‘작은 굴레’의 영향에 놓인 존재들이 이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작은 굴레’에 의해 시간의 태엽에 가중되는 무게가 더해집니다.]
[시간의 태엽에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칠흑왕이 당신의 행동에 큰 흥미를 보입니다!]
시간의 태엽.
‘죽음’과 함께 과거에 크로노스로 하여금 신왕좌에 앉게 해 주었던 것.
이것이 있었기에 크로노스는 전 우주를 제멋대로 유린하면서 올림포스의 전성기를 이끌 수 있었다.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과거와 미래를 엿보는 전지(全知)의 도구가 될 수 있었고, 사회의 힘을 빌린다면 ‘굴레’를 돌리는 만능의 보구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굴레’를 돌리는 것은 ‘황’쯤 되는 위대한 존재에게나 허락되는 것.
여러 의지와 행동이 인과율이 되어 뒤섞이는 기록들을 강제로 소거하고, 제 입맛대로 쓰고자 하는 행위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도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에 따른 후유증도 아주 큰 편이었고.
하지만.
그런 건 어디까지나 전우주의 역사에 해당하는 ‘큰 굴레’에 해당하는 것일 뿐.
그보다 범위를 훨씬 적은 ‘작은 굴레’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게 된다. 그마저도 직접 손을 대고자 하는 부분이 적다면 부담은 더 확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소싯적에 시간의 태엽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곤 했다.
‘작은 굴레’를 아주 느리게 굴리 거나 빠르게 굴리는 것으로 시간 적인 이점을 꾀하거나, 때로는 정지를 시켜서 죽음을 수확하기도 했다.
시공간을 제멋대로 유린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전능(全能)에 가까운 힘이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연우는 그런 크로노스의 방식을 모방하고자 했다.
시간의 태엽은 아직까지 복구가 완료되지 않아 정지는 불가능하다. ‘작은 굴레’를 느리게 돌리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영구 손상을 입는다면, 동생의 사념체가 크게 다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걱정 마. 그동안 밥값만 축냈었는데. 이제는 이 정도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차정우의 사념체는 오히려 자신에게만 맡겨 두라는 식으로 가슴팍을 두들겼다.
『회중시계에 있는 동안 태엽을 감는 건 수도 없이 연습하고 연구했으니까. 아마 이것만 따지면 형도 나를 못 따라올걸? 그러니 후딱 다녀와. 부족분은 칠흑으로 채우면 되는 거고. 그리고 아버지도 계시잖아?』
회중시계를 쇠사슬과 연결시키면 칠흑의 기운이 태엽 안으로 스며들게 된다. ‘작은 굴레’를 굴리는 정도의 힘을 보충해 주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겠다만, 그래도 최대한 서둘러라. 녀석이 눈치챈다면 시간의 태엽 에도 어떻게 손을 댈지 모르니.』
그래서 연우는 동생과 아버지에게 뒤를 부탁한 채로, 심연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들이 시간을 벌어 주는 동안 스퀴테를 완성하기 위해서.
1분 1초가 급했다.
* * *
『‘작은 굴레’를 느리게 감으면서 77층의 스테이지를 흔드는 동안, 자신은 필요한 무기를 완성한다…… 확실히 당신다운 생각입니다.』
이전에도 봤던 것처럼. 하르모니아는 엄청난 체구를 자랑하고 있었다.
정말 여름여왕의 쌍둥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비대한 크기. 거기다 비늘의 색깔도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칠흑색이었다. 여름여왕이 불 속성을 지닌 레드 드래곤이었단 것을 떠올린다면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어쩌면 시의 바다를 만들고, 칠흑왕의 후예가 되면서 모든 속성이 근본부터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연우도 한 차례 영혼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면서 칠흑에 더 긴밀하게 다가간 상태였으니까.
“여유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게 아니라서. 묻는 거에나 대답하지, 그래? 아다만트, 얼마나 있지?”
77층은 스테이지가 통째로 올포원, 그 자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계와 하계가 구분 없이 위아래로 공략을 시도하고 있으니, 올포원도 똑같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올포원이 시스템의 화신으로 있는 이상, 결국 장기전으로 간다면 최종적으로 녀석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안에 어떻게든 무기를 완성해야만 한다.
연우는 이곳에서 하르모니아와 농담 따먹기로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일단은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츠츠츠!
하르모니아는 연우를 굽어보는 게 힘든 듯, 폴리모프를 시도해 작은 소녀의 모습을 갖췄다. 큰 곰 인형을 안고 있으면 귀여울 것 같은 모습.
연우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팍 찡그렸다.
“따지자면 세샤의 외할머니가 되는 건데.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면 쪽팔리지는 않나?”
“개체마다 취향은 다 다른 법이니까요. 오히려 이런 모습을 손녀가 더 좋아하지는 않을까요? 자기와 눈높이를 맞춰서 같이 놀 수 있으니까요. 친구 같은 할머니…… 좋지 않나요?”
연우는 혀를 가볍게 찼다.
이래저래 지적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의문도 많이 가는 존재였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겠지.
약속대로 그와 시의 바다는 잠시간이나마 공동 전선을 갖춘 상태였고, 그것은 올포원 레이드가 끝날 때까지는 깨지지 않는다.
그리고 연우로서도 그것을 깰 생각이 없었다.
만약 뒤통수를 쳐서 얻을 이익이 크다면 곧장 배신을 상정해 보겠지만, 지금은 그래서야 자중지란만 일어날 뿐이었으니까.
“탑 내에 있던 것뿐만 아니라, 외부의 다른 우주에서 나는 아다만트도 전부 시의 바다에서 가져갔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에요. 저희가 독점하고 있어요.”
“나눠 줄 수 있나?”
“매점매석 모르나요? 꽤나 비쌀 텐데.”
“돈은 얼마든지 내어 주지.”
“바이 더 테이블의 수장과 관계가 가깝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나 보네요.”
연우는 잠시간 대답을 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크로노스와 프레지아 간의 관계는 아직 외부에 밝혀진 바가 전혀 없을 텐데? 그걸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내부에서…… 새기라도 했나?’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연우도 다른 사람에게 말해 준 바가 없었기 때문에 더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바이 더 테이블 쪽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원래 얼마나 철저한 보안 체계를 보유하고 있는지를 감안한다면 그것도 무섭긴 매한가지였다.
자칫 그가 이후 벌이려는 계획 같은 것들도 전부 어떻게든 하르모니아에게로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니까.
하르모니아는 그런 연우의 생각쯤은 알고 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희는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한다고.”
“…….”
“하지만 저도 이 이상은 모르고 있답니다. 여기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저 말을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믿을 수 있다면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기만은 어디까지 닿아있는 걸까?
“안타깝게도 아다만트는 저희도 쓸 데가 있어 겨우겨우 모아 놓은 것이라서요. 함부로 내놓기는 힘들어요.”
순간, 연우의 눈이 빛났다.
내놓기 힘들다는 것.
거절이 아니었다.
조건이 맞는다면 얼마든지 내어 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원하는 게 뭐지?”
하르모니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 졌다.
“당신의 호의요.”
“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바로 그때였다.
띠링!
[파티가 생성되었습니다!]
[시나리오 퀘스트(칠흑왕의 야욕 I)이 생성되었습니다.]
[시나리오 퀘스트 / 칠흑왕의 야욕 I]
설명: 천마에게 큰 상처를 입고, 배반자인 ???들에 의해 공허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칠흑왕은 오랜 기다림 끝에 두 명의 후계자를 점지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칠흑왕은 원래 두 후계자에게 경쟁을 붙여 자신이 깨어나는 날을 준비케 하려던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을 다치게 한 천마의 혈육이 ‘탑’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도중에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을 이은 자들이 천마의 혈육을 처치하고, 천마가 고통과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칠흑왕의 뜻을 받들어 천마의 혈육을 처치하십시오.
위대한 승리를 가져다준다면, 그 만족도에 따라 특별히 칠흑왕이 당신에게 후사(厚謝)를 할 것입니다.
달성 조건:
1. 다른 후계자와 손을 잡으십시오. 퀘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내분은 절대 허락되지 않습니다. 적대시에는 칠흑왕의 분노를 살 수 있습니다.
2. 더 많은 칠흑의 힘을 깨우십시오.
3. 천마의 혈육을 처치하여, 칠흑왕이 만족해할 만한 승리를 가져다주십시오. 승리가 압도적일수록 만족도도 더 커질 것입니다.
주의점: 파티 퀘스트입니다. 공헌도에 따라 보상이 달라지게 되니 유의해 주세요.
제한 조건: 칠흑왕의 후계자
제한 시간: -
보상:
1. ???
2. ???
시나리오 퀘스트가 생성되었다. 이 사건을 인지하기 시작한 칠흑왕이 더더욱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하르모니아는 자신에게도 똑같은 퀘스트창이 떴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쪽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분’을 진심으로 따르지 않고, 속으로 불경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예언은 반드시 이뤄질 수밖에 없는 것. 그리고 그 뒤에 당신은 ‘그분’께서 앉아 계실 옥좌의 바로 옆자리에 서게 될 테죠. 협력을 할 수밖에 없는 사이란 뜻이랍니다.”
하르모니아는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저에 대한 불신을 계속 품고 계셔서야 고달프기만 할 따름이지요. 해서 저는 당신의 호의를 사고 싶습니다만. 어떠신가요? 당신께도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연우로서는 기가 찰 지경이었다.
처음 심연에서 만났을 때,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이상한 말을 남기면서 날릴 때는 언제고.
게다가 세샤와 아난타, 브라함을 기만할 때는 또 언제고 이제 와 저딴 말을 뻔뻔하게 할 수 있는 건지.
하르모니아가 계속 속내를 숨기고 있는 한, 그리고 칠흑왕을 경계하고 있는 한 호의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거저 주겠다는 호의를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녀석의 생각 따윈 그 뒤에 생각해도 절대 늦지 않는 것이다.
“좋아. 그러지.”
“이로써 서로 한 발자국씩 가까워지게 되었네요. 모은 아다만트, 원하시는 만큼 전부 내어 드리겠어요.”
[플레이어, ‘하르모니아’가 ‘아다만트 X?’를 제공하였습니다!]
[자동으로 아공간에 귀속되었습니다.]
“그럼 몇 가지 더 부탁해도 되나?”
“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주 많이.”
“역시. 뻔뻔하시군요.”
“호의를 베풀겠다고 하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칠흑왕도 손을 잡으라고 하고 있고.”
칠흑옥을 얻은 이상, 새로 만들어질 스퀴테는 기존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성능을 자랑할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들어갈 재료들도 뛰어날 수록 좋았다.
다행히 연우가 요구한 것들은 시의 바다도 상당히 비밀리에 챙 기고 있던 것들.
“……대체 이런 것들은 어떻게 아시는 거죠?”
여유만만하던 하르모니아도 질려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일단은 나도 명장(名匠)의 호칭을 얻은 장인이라서 말이지.”
연우는 이왕에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한 것,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웬만한 건 바이 더 테이블을 통해서 확보해 놓았지만. 그래도 많을수록 나쁠 건 없으니까.’
“이제 끝나셨나요?”
“대충은.”
“대단하시군요, 여러모로.”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하아!”
연우는 하르모니아의 씁쓸한 한숨을 뒤로하고, 곧장 몸을 돌렸다.
그러다 떠나기 직전, 하르모니아의 뒤편에 있는 철문을 슬쩍 보았다.
칠흑왕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
거기서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어쩔 수 없나. 그럼 이다음에 필요한 재료는…….’
결국 연우는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서 재료를 빠르게 재검토하는 한편, 손목에서 유달리 차갑게 느껴지는 칠흑왕의 형틀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정보가 갱신되었다고 했었지? 정보 창 확인.’
띠링!
연우 앞으로 스크린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