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스퀴테 (4)
『이런, 빌어먹을!』
『대체 이놈은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나! 어째서 끝나지를 않는 거야!』
『이전 천계 공략 때와 다를 게 하나도 없어!』
77층, 스테이지를 빼곡하게 물들인 새하얀 하늘을 따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신격들이 저마다 권능을 개방하고 있었다.
불벼락이 떨어지고, 얼음 폭풍이 휘몰아치는 등. 세상이 그대로 망가지는 게 아닐까, 그토록 말로만 듣던 종말이 찾아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력이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천계가 있는 98층에서도 이만한 격전은 잘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랬다면 그들이 있는 사회며 스테이지가 모조리 망가졌을 테니까.
하지만 신격들은 차라리 스테이지 채로 붕괴되라는 식으로 전력을 다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쉽게 무너질 77층이었다면 진즉에 공략을 당했을 테지만.
빛의 세계는 아무리 큰 대미지를 입어도 금세 복구를 해냈고, 쉴 새 없이 반격까지 가했다.
빛무리가 잔뜩 뭉쳐진 광선이 수도 없이 빗발쳤다. 본능만 남은 광룡(光龍)이 날아들어 그들의 팔다리를 물어뜯으려 하고, 온갖 마법을 난사해서 권능 개방을 방해했다. 스테이지에 고루 걸쳐진 온갖 디버프와 저주가 툭하면 신격들의 손발을 강제로 속박하고자 했다.
그런데도 신격들을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신, ‘찬드라’가 공헌치를 130만큼 획득했습니다!]
[신, ‘멘투’가 공헌치를 210만큼 획득했습니다!]
[신, ‘던 카우’가 공헌치를 152만큼 획득했습니다!]
……
[현재 최고 누적된 최고 공헌치는 25,500점으로, 기록자는 ‘사울레’입니다.]
[조금 더 분발하시길 바랍니다.]
시시각각 그들의 눈가에 생성되는 스코어 현황이었다.
중앙 관리국에서 고의로 실행한 것이 신격들을 자꾸만 자극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와 갈망으로 애가 타는 그들에게, 알아보기 쉽게 기록으로 보여 주니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퀘스트는 사회와 진영, 계급에 상관없이 똑같이 부여되고 있었다.
이곳에서 얻은 ‘명성’은 저절로 다른 신격들에 주는 인식에 강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신앙’이 된다. 계급을, 격을 상승시킬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인 셈이었다.
언제나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고 나면, 늘 주목받지 못하던 존재들 중에서 영웅이 한두 명쯤은 나오지 않았던가.
자신들이 과거 신왕 크로노스를 쓰러뜨리고, 올림포스의 왕좌에 앉았던 제우스와 형제들 같은 경우가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열의에 불타오르는 가운데.
긍정적인 효과만 있는 건 아니었다.
퍽!
『당…… 신이 어떻게?』
최고 기록을 세운 김에 이 기세를 몰아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높은 점수를 쌓으려던 사울레는 갑자기 등 쪽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피를 쏟았다.
바로 뒤. 그녀에게는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다지보그가 한쪽 입술 끝을 비틀면서 있었다. 사울레가 한눈을 판 사이에 등에다 칼을 꽂아 넣은 것이다.
『그러게 뒤는 함부로 맡기는 것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의 희생, 절대 잊지 않으리다.』
스걱!
촤아악-
[‘사울레’가 전사하였습니다!]
[‘사울레’의 공헌치가 ‘다지보그’에게로 귀속됩니다!]
잘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배신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올포원을 상대로 공략을 시도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대신에 전투에 몰입한 동료의 뒤를 쳐서 공헌치를 강탈하는 건 아주 손쉬웠다.
때로 평상시 하급 신격이라면서 폄하하던 작자가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위태로움을 느낀 상급 신격들 여럿이서 그를 같이 제거하는 경우도 있었다.
연우가 이미 짐작했던 것처럼. 위계질서가 강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질투심이 많은 신격들은 절대 다른 누군가가 자신들의 머리 위에 서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핫! 개판이로구만.』
그런 것을 지켜보던 니플헤임이나 동마왕군 같은 악마들은 한껏 비웃음을 던졌지만.
더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풍덩!
이등분되고 말았던 사울레의 사체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다가, 스테이지의 바닥을 따라 고요하게 흐르고 있던 그림자에 빠졌다.
마치 물속으로 던져 넣은 듯한 소리.
그림자가, 아니, 그보다 훨씬 짙은 색깔을 자랑하는 칠흑을 따라 잔잔한 파문이 그려지다가, 곧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권능, ‘그림자 영역’이 조금씩 스테이지를 침식하고 있습니다!]
[현재 침식률: 17.2%]
[권능, ‘하데스의 식령검’이 이걸로는 부족하다며 칭얼거립니다!]
[‘네바드바’ 소화율: 72.7%]
[‘아라시’ 소화율: 68.4%]
……
[‘사울레’ 소화율: 26.1%]
[‘그림자 영역’내에서 선악과가 제조 중에 있습니다!]
신격들이 공헌치를 쌓고 저들끼리 뒤통수를 주고받기 바쁜 동안.
츠츠츠-
연우가 펼친 그림자는 이제 칠흑의 속성이 더해지면서, 아주 은밀하면서도 맹렬한 기세로 스테이지 곳곳으로 뻗쳐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올포원의 성역으로 설정된 층계의 힘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려는 한편, 사울레처럼 죽은 신들을 곳곳에서 집어삼키기 위해서였다.
『하여간! 저런 것만 보면 참으로 악마가 따로 없단 말이지.』
아가레스는 틈만 보인다 싶으면 절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연우의 행태를 보면서 키킥 웃음을 터뜨렸고.
『역시! 우리 ### 님! 당신의 그런 인성질이 너무 좋아요! 귀여워 미칠 거 같아. 하악. 하악.』
『……적당히 해라, 이것아.』
왕왕!
헬과 요르문간드, 펜리르는 저마다 감탄을 터뜨리거나 한숨을 내쉬기 바빴다.
그리고.
[‘말라흐’의 서기장, 메타트론이 만족에 찬 얼굴로 77층을 굽어봅니다.]
[‘르 인페르날’의 수좌, 바알이 층계 곳곳에서 빚어지는 온갖 악의가 딸기 케이크처럼 달콤하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가레스는 그런 메시지들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
『절대선이니 절대악이니 해도, 결국 너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그렇지?』
[‘말라흐’의 서기장, 메타트론이 현재 천계는 크기와 규모에 비해 너무 많은 존재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합니다.]
[‘말라흐’의 서기장, 메타트론이 나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지기만 하는 천계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정화’는 필수라고 말합니다.]
하하하.
아가레스는 크게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메타트론이 내뱉는 저 말들이 변명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메타트론은 오로지 선(善)을 추구한다.
그 속에는 개인적인 판단도, 사적인 동기도 전혀 들어있지 않다. 오로지 지극한 선을 이루기 위해 어떤 희생이 닥쳐도 좋다는 편향적인 이념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신들이 죽어 나가도, 말라흐의 천사들이 날개가 꺾여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테지.
그리고 만약 필요하다면 언젠가 스스로의 존재도 희생시키리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제 목숨조차도 도구처럼 사용하는 것……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절대선의 수장이 저 모양이니, 이딴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거겠지만.
세상은 분명히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좋은 것이려나. 하하하!”
아가레스는 광기에 잔뜩 젖은 모습으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층계를 충만하게 채우고 있는 적의와 악의, 그리고 광기가 그의 피부를 자꾸만 따끔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의 신위는 그런 것들을 잡아먹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중이었다. 그를 따라 마기가 천천히 회오리를 쳤다.
[비마질다라가 층계를 감도는 전의에 잔뜩 흥분합니다!]
[케르눈노스가 고요한 눈으로 77층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사도가 무사하길 기원합니다.]
[비마질다라가 수천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대규모 이벤트에 잔뜩 고양됩니다.]
[비마질다라가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비마질다라가 자신도 참전할 의사를 밝힙니다.]
[비마질다라를 주시하고 있던 많은 악마들이 들썩입니다.]
[악마의 사회, ‘절교’가 한때 자신들의 총령(總領)이기도 했던 존재의 등장 소식에 잔뜩 긴장합니다.]
[악마의 사회, ‘아르타샤트’가 공포에 찬 눈으로 비마질다라 쪽을 바라봅니다.]
……
[대다수의 악마들이 비마질다라를 경계합니다.]
[소수의 악마들이 비마질다라의 눈에 띌까 싶어 자취를 조용히 감춥니다.]
[비마질다라가 자신을 견제하거나 만류하는 시선들을 코웃음 치면서 모두 무시합니다.]
[‘비마질다라’가 강림을 시도합니다!]
[77층, 빛의 관에 왜곡장(金曲場)이 발생하였습니다!]
[모두 충격에 주의하십시오!]
* * *
쿠르릉, 쿠르르-
콰콰콰콰!
천둥이 치고, 벼락이 빗발치는 소란스러운 전장 속에서.
브라함은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명왕성의 서〉를 빠르게 훑고 있는 중이었다.
파아아-
‘하르모니아…… 당신과는 할 이야기가 많아. 지금이 아니라면, 앞으로 당신과 대화를 나눌 시간 따윈 없겠지.’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하르모니아의 위치였다.
수많은 신격들이 공헌치를 얻기 위해 여기저기서 날뛰고, 주신들이 유일신좌를 얻기 위해 난동을 피우는 걸 알면서도. 그는 전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연우가 심연으로 다가가 방금 전 그녀를 만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의식이 닿아 만난 것일 뿐, 브라함은 ‘진짜’ 그녀의 본체를 만나 눈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마도 하르모니아도 자신이 끈질기게 그녀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여태 만나 주지 않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숨기는 게 있다거나, 자신을 만나기 싫다거나.
아니면.
‘우리를 모두 잊었다든가.’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하르모니아와 맺은 인연이라는 것도 원래는 전부 ‘장난’에서 비롯되었었다.
브라함은 세상에 없는 지식을 탐독하는 것을 즐겨 했고, 하르모니아는 연구의 소재를 필요로 했다.
신과 용종의 혈육. 이리도 긴 우주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은 실험이었기에 궁금증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아난타가 태어났다. 따지자면 아난타는 실험의 결과물이었던 셈이었다. 브라함이 아무 미련 없이 떠났던 것도 얻고자 했던 데이터를 전부 얻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많은 것들을 뒤늦게 깨달으면서.
브라함은 아난타를 찾았고, 그녀가 남긴 세샤를 돌보았다. 차정우와 연우를 만나 여기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는 하르모니아에게 딱 한 가지만 묻고 싶었다.
-당신에게 우리는 무엇이었소?
그저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걸로 만족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그녀의 발목을 붙잡거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설득할 생각 따윈 없었다.
처음에는 왜 굳이 죽음을 가장하였는지를 묻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여기고 있었다. 그저. 그저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듣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플레이어 ‘하르모니아’의 정확한 위치를 물색하는 중입니다.]
[77층의 스캔을 완료하였습니다. 결과, 없음.]
[76층의 스캔을 완료하였습니다. 결과, 없음.]
[75층의 스캔을…….]
……
[4층의 스캔을 완료하였습니다. 결과, 있음.]
‘4층!’
브라함은 하르모니아의 위치를 특정하자마자, 그곳의 좌표를 설정하고 포탈을 열었다.
자칫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브라함은 이제 연우의 권속들 중에서 자신이 하나 빠진다고 해서 큰 변화가 없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차정우와 아난타도 깨어난 이상, 세샤도 더 이상 외로움을 타지 않을 테지.
‘세샤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가 알아서 잘 해 주겠지.’
브라함은 내심 언제나 사고를 치고 뒷수습을 권속들에게 맡기기만 했던 연우에게 똑같은 복수를 할 수 있겠단 생각에 엷은 미소를 띠면서, 포탈 안쪽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콰르릉!
브라함의 뒤쪽으로 난데없이 황금색 벼락이 떨어지면서 그의 등거죽을 꿰뚫었다.
퍽!
[‘천공의 벽뢰(劈雷)’가 ‘명왕성의 서’를 파훼시켰습니다!]
“쿨럭……!”
브라함이 피를 토하면서 흔들리는 눈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
제우스가 차갑게 웃으면서 서 있었다. 한쪽 눈이 보석안으로 요요하게 빛나고 있는 중이었다.
‘실수……!’
명왕성의 서를 펼친 채로, 층계를 일일이 탐색하느라 모든 정신과 신력을 집중한 탓에 미처 기습을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딜 가시나? 아직 우리들 간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는데 말이야. 내가 설마하니 개처럼 너희들의 제안을 호락호락 받아들일 거라고 여기진 않았겠지?”
제우스가 재빠르게 오른손을 브라함의 머리 쪽으로 뻗었다.
흔들리던 브라함의 시야가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