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스퀴테 (5)
하지만 의식이 끊어진 건 아니었다.
주선석이 힘을 본격적으로 터뜨리기 직전, 파훼된 명왕성의 서가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짜면서 그대로 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위험자 인식.]
[현 상황에 알맞은 마법을 탐독하여 발현합니다.]
[너울거리는 화신(火神)]
명왕성의 서는 브라함이 타계의 지식까지 탐독한 끝에 기술한 그의 지식적 총아였고, 당연히 그것을 제물 삼아 일으킨 마법도 제우스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너울거린다’는 표현과 다르게, 브라함이 탄생시킨 이 마법은 끊임없이 화염 폭풍을 재생성하여 상대를 영혼까지 말려 죽이는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행성 몇 개쯤은 아작 낼 수 있을지 모를 거대한 불기둥이 제우스를 잇달아 후려쳤다.
되도록 ‘끝’을 보려 했던 제우스 역시 상황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양팔을 끌어모아 실드를 두껍게 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 실드마저 금세 부서져서 다시 세우기를 반복했다.
콰콰콰……!
결국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화염 폭풍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 제우스는 새카맣게 익어 버린 실드를 해제하면서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아쉽군. 조금만 더 근접했다면 식령(食靈)에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제우스는 아쉽다는 듯 붉은 혀로 입술을 가볍게 축였다. 이미 브라함이 열었던 포탈은 사라진 뒤였다. 그 상황에서 제 한 몸을 내빼는 데 성공했단 뜻이겠지.
하지만 아쉽긴 해도, 걱정되지는 않았다.
분명히 손끝으로 브라함의 신격이 부서지는 감촉이 느껴졌으니까. 설사 어떻게 무사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가이아의 저주를 막을 수는 없겠지. 먹어 치우는 건…… 힘이 다 빠진 뒤에 해도 될 테고.”
그의 눈에 박힌 보석안 안쪽에서는 혼탁한 빛깔로 물든 광망이 여러 개씩 반짝이고 있었다. 그동안 몰래 먹어 치운 주신격들이 겨우 의식만 남은 채로 아우성을 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가라앉을 게 분명했다.
제우스는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옥황상제와 함께 유일신이 되는 데 있어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브라함을 내쫓았으니, 이제 남은 것들을 먹어 치울 시간이었다.
* * *
[‘가이아의 저주’에 감염되었습니다!]
[주의! 신화가 빠른 속도로 흐트러지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안정을 필요로 합니다. 안전한 장소에서의 휴식을 권고합니다.]
[주의! 신격이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습니다. 원인을 찾아 조속히 대처해야 합니다. 안전한 장소에서의 휴식을 권고합니다.]
[주의! 신성이…….]
……
“꼴이 말이 아니군. 이래서는 좀 위험하겠는데. ###이 알게 되면 옆에서 크게 잔소리를 해 대겠어.”
브라함은 손으로 뻥 뚫린 왼쪽 가슴을 부여잡으면서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는 느리기만 하고, 왼쪽 가슴에서는 자꾸만 잘게 부서진 조각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모든 신격들이 그러했고 무왕도 피할 수 없었듯, 가이아의 저주는 브라함에게도 너무 치명적이었다.
특히 그로서는 신격을 복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까닭에 아직까지 신격과 신화가 탄탄하다고 할 수 없어서 위험성이 더 컸다.
대체 시의 바다가 어떻게 이 많은 가이아의 저주를 보유할 수 있는 건지 의문은 일단 차지하고, 브라함은 현재 중요한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이대로 그림자 영역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외뿔부족 마을로 돌아가 세샤와 아난타의 얼굴을 볼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끝까지 하르모니아를 보러 갈 것인가…… 겠지?’
그리고 잠깐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가야겠지.’
브라함은 쓰게 웃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아도, 나와 다르게 하르모니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어도, 그래도 직접 두 귀로 듣는 것과는 다르니까. 마지막까지 확인해 보는 게 좋겠지.’
그동안 연우가 너무 막무가내라 이리저리 투덜거리기 바빴었는데, 자신도 참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여기는 어디지?”
브라함은 칠흑색으로 뒤덮인 숲을 둘러보면서 인상을 가늘게 좁혔다.
그 자신이 알고 있는 4층은 ‘포세이돈의 열쇠’를 히든 피스로 두었을 만큼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여기는 도저히 그렇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공의 벽뢰가 포탈을 건드리면서 좌표가 어긋났었나?’
분명한 건 이곳이 4층이 맞다는 것인데.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좌표를 재설정해서 포탈을 열려고 해도, 이미 명왕성의 서가 부서진 데다가 남은 신력은 가이아의 저주를 겨우 막는 데 쓰고 있어서 그것도 힘들었다.
브라함은 살짝 초조해졌다. 가이아의 저주가 어떻게 발작을 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르모니아도 제대로 만나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면 그만한 개죽음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때.
“종말에 대한 준비는 잘 되고 있겠지?”
“그럼요. 그쪽 덕분에 예언이 보다 순조롭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 여태 보시지 않았었나요?”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는 그가 그토록 찾고자 하던 하르모니아였다.
하지만 브라함은 곧장 그쪽으로 나서지 못했다. 직감적으로 지금 나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대신에 대화를 더 확인해 볼 요량으로, 마침 근처에 있던 큰 나무 밑에 몸을 숨겼다. 억새가 허리까지 자라 있고, 어둠이 짙게 깔린 곳이라 조심만 한다면 보일 염려는 없었다. 흘러나오던 신력도 어떻게든 갈무리해서 숨겼다.
“이미 ‘그분’께서도 조금씩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고 계시답니다. 이번 전쟁은 그걸 위한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럼 다행이고.”
“한데, 종말이 열릴 시기가 온 지금까지도 숨길 생각이신가요?”
“뭘?”
“당신의 목적.”
“후후. 글쎄.”
중간부터 들어서 그런지, 도저히 대화의 맥을 짚을 수가 없었다. 브라함이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몇 개 없었다.
‘종말? 그분? 혹시 칠흑왕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하르모니아와 칠흑왕에 대해 논의를 나누는 것을 보면, 수하라기 보다는 뜻을 함께하는 동지에 가까운 것 같은데. 대체 누굴까?
그것도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라면.
‘둘이서?’
브라함은 순간 가슴 안쪽에서부터 불쑥 치밀어 오른 무언가에 저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낯선 감정이었다.
뒤늦게 그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질투였다.
‘언제나 이성적인 사고를 중시하고 강조하던 내가 이런 감정에 치우칠 줄이야……. 변하긴 정말 많이 변했나 보군.’
사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지금 몸 상태로 봐서는 그림자 영역으로 돌아가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맞았다. 기회는 다음에 또 어떻게든 만들면 되는 것이지만, 목숨은 한 번 날아가게 되면 되돌리기 힘든 법이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감성적인 판단에 치우쳐 오게 될 만큼 성격이 달라진 건, 그동안 세샤, 아난타와 함께 보낸 시간 덕분이 아닐까.
[‘가이아의 저주’가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브라함은 다시 한번 더 흔들리려는 신격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천마의 한쪽 팔이라고도 할 수 있을 당신이, ‘그분’을 도우려 한다는 게 전혀 여전히 이해가 되질 않으니까요.”
“늘 말했잖나? 나는 어디까지나 정체기에 빠진 이 탑을 되돌리고 싶은 것뿐이라고.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남자는 말꼬리를 살짝 흐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하튼 칠흑왕이 눈을 뜨는 건 나로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야. 너희들이 보았다는 예언 따위 난 믿지도 않지만. 거기서 보는 종말은 내가 보는 것과 많이 다를 테니.”
“좋아요. 배신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하죠.”
“좋은 생각이야. 애당초 그것이 시의 바다가 추구하던 바였잖나? 모시는 신 아래, 모두가 평등한 세상. 과거도, 행적도 따지지 않는 모든 가치가 평등한 곳.”
“꿈속에서는 모든 게 덧없이 사라질 일장춘몽에 불과할 테니까요.”
“그래서 그를 ‘알’로 쓸 생각이었나?”
“애당초 저는 될 수 없으니까요.”
하르모니아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가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네요.”
“딱 한 번 부딪쳐 본 게 전부긴 하지만…… 그동안 사도를 통해서도, 내 눈으로 관찰했을 때에도 꼭 옛날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서 말이지.”
남자는 용무가 전부 끝났는지, 무언가를 어깨에 짊어지는 소리가 났다.
“하면 난 가 보도록 하지. 계획대로 ‘알’이 제때 깨어나려면 미리미리 곳곳에다 약을 쳐 놔야지 않겠어?”
남자는 그 말을 하면서 숲 가 쪽으로 움직였다. 억새 밟는 소리가 나고, 나무 사이로 통과한 빛이 그의 얼굴을 살짝 비추었다가 사라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브라함은 그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예!’
과거, 그가 ‘범천’으로서 수미산을 거머쥐려 할 때. 천마의 옆을 지키던 월신(月神)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 천교의 이인자였으며, 현 삼신장의 스승이기도 한 존재.
그리고 오늘날의 ‘탑’을 연 트리니티 원더의 멤버.
그가 하르모니아와 무언가 이해 못 할 대화들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예가 시의 바다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맞닥뜨리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브라함으로서는 많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저들이 대화를 나눴던 내용 중 ‘알’이라는 것은 정황상 분명히 연우를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올포원을 대체할 유일신좌를 만들려는 것에 이어, 칠흑왕이 깨어나는 데 있어 연우를 어떻게든 이용하려는 것 같은데…….
‘……설마?’
그러다 브라함은 언뜻 어떤 생각에 미치고 말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허리를 쭈뼛 세웠다.
만약 지금 떠올린 가정이 맞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아주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든 알려야……!’
브라함의 마음이 조급해지던 그때.
[집중이 흐트러진 나머지 신력 제어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가이아의 저주’가 격을 흔듭니다.]
가이아의 저주가 한 차례 더 신격을 흔들고 말았다. 재빨리 다시 갈무리를 시도했지만, 이미 신력 중 일부가 새어 나간 뒤였다.
“음?”
이예가 무언가를 감지한 듯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고.
브라함은 숨을 죽였다.
터벅.
터벅.
이예가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억새풀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무슨 일이신가요?”
“여기서…… 아니다. 아무것도.”
이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수풀을 둘러보다, 하르모니아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자리를 벗어나는 마지 막까지 그의 눈빛에 맺힌 의심은 거둬지지 않았다.
그렇게 이예가 홀연히 떠나고.
하르모니아가 빙긋 웃으면서 방금 전까지 이예가 있던 자리를 향해 말했다.
“이만 나오시는 게 어떠실까요, 브라함?”
살짝 수풀이 흔들린다 싶더니, 나무 한쪽에서부터 브라함이 나타났다.
어둠에 가려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가이아의 저주 때문인지 몰라도.
새카매진 그의 안색은 어느 때 보다 단단히 굳어 있었다.
“알고 있었나?”
“처음부터요.”
“그런데도 용케 내버려 뒀군.”
“당신의 기척을 숨겨 드린 게 저라는 것, 알고 계시나요?”
“왜?”
“제 딸과 손녀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니까요.”
“…….”
너무나 당연하다는 투의 대답. 브라함은 오히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가이아의 저주는 이제 그의 제어를 완전히 벗어나 턱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손발이 조금씩 부서지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자꾸 날 피해 다녔지? 아니, 왜 아난타를 떠난 거지?”
자신을 떠난 것이야 이해를 할 수 있다 치더라도, 아난타를 ‘실험의 결과물’이 아닌 ‘딸’로 인정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훌쩍 떠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르모니아는 여전히 담담했다.
“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요.”
“무슨……!”
“제가 죽었었던 건 거짓이 아니니까요.”
“뭐?”
“대신에 다시 깨어났던 것일 뿐.”
브라함은 한순간 하르모니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는 모순적인 경험을 하고 있었다.
“전생(轉生) 뒤에 전생(前生)의 인연은 전부 끊어진 것이었고, 저를 받쳐 주는 정체성은 딱 하나뿐이었어요. ‘그분’의 의지를 집행하는 후계자라는 것.”
“……!”
“이번에는 제가 묻겠어요.”
“…….”
“들으셨나요?”
브라함은 충격이 큰 나머지 한 순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들으셨군요.”
하르모니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브라함도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마지막 남은 신력을 쥐어짜려 했지만.
피잉!
불현듯, 허공에서부터 날아든 빛의 궤적이 그대로 브라함을 꿰뚫고 지나갔다.
“아……!”
그 궤적은 하르모니아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라,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말았고.
아주 잠깐 동안, 브라함은 씁쓸하면서도 아련한 눈빛으로 하르모니아를 바라보다가.
파스스!
그대로 작은 입자가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하르모니아가 황급히 궤적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이예가 큰 나무줄기에 서서 이쪽으로 시위를 겨누고 있었다.
“역시, 있었군.”
“당신……!”
순간, 처음으로.
하르모니아의 얼굴에 짙은 분노가 어렸다.
고오오!
매서운 기세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 단순한 감정 없는 인형인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지.”
이예는 제 할 일을 마쳤을 뿐이라는 듯, 활을 다시 어깨에 걸면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
홀로 남은 자리에서.
하르모니아의 눈빛은 크게 요동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