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스퀴테 (6)
[비마질다라가 강림합니다!]
77층의 스테이지에 있는 이들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면서.
[모든 신들이 큰 충격에 빠집니다!]
신들은 일제히 기함을 내질렀고.
[모든 악마들이 극심한 혼란에 잠깁니다!]
[모든 악마들이 혹시 비마질다라의 눈에 띌까 전전긍긍합니다!]
악마들은 경악을 터뜨리고 말았다.
비마질다라.
아주 오래전, ‘탑’이 세워지기도 이전. 신의 진영에는 신왕(神王)이 있었다면, 악마의 진영에는 아수라왕(阿修羅王)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명성을 자랑하던 자.
비록 데바의 손꼽히는 대신격, 인드라와 다퉈서 패배했다는 신화가 한때 떠돌기도 했다지만.
거기서도 세력전에서 밀려 칼을 꺾은 것일 뿐, 그의 위신이 꺾인 건 절대 아니었다.
도리어 비마질다라는 수십 차례나 인드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가기도 했었으니, 위업적인 면모만 따진다면 데바의 누구를 가져다 붙인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미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를 있게 만들었던 절교도 박차고 나와 세상을 홀로 떠돌고 있었으니.
그런 그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비친다는 메시지가 떠올랐으니, 많은 이들이 잔뜩 긴장한 나머지 마른침을 삼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맡는 공기로군.”
자신의 키보다도 큰 칼을 등에 멘 장년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지적인 눈빛이 돋보였다.
“여기가 바로 탑의 하계인가?”
쿠쿠쿠……!
단순히 입을 연 것뿐인데도 불구하고.
분명히 한 줌의 기세도 흘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양의 내력이 담겨 있던지 스테이지가 크게 떨릴 정도였다.
“공기가 아주 산뜻해서 좋아. 위쪽은 이제 너무 눅눅하기만 해서 재미없는데 말이지.”
그의 말과 달리, 현재 77층의 대기는 절대 좋다고 말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신들의 공세가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올포원이 스테이지에 뿌리는 마력량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바. 그 과정에서 공간이 이리저리 휘면서 법칙도 같이 어그러져 대기가 많이 망가졌던 것이다.
뜨겁고, 불쾌하다.
그리고 무거우며, 답답하다.
연우를 쫓아 77층에 입장했던 랭커들은 하나같이 질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자신들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건지, 어떤 곳에 있는 건지, 하나같이 스턴 상태에 잠겼던 것이다.
심지어 신들도 거북하기 그지없는 전장이었지만.
비마질다라는 그것을 두고 너무 ‘상쾌하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비록 소수에 불과해 절교에 통합되었다고는 하나, 아수라(阿修羅)라는 종족은 본디 싸움을 위해 태어나고 살아가는 족속들.
그런 이들 중에서 왕으로, 그리고 그런 왕들 중에서도 왕중왕으로 추대되었을 정도인 그에게 이런 전장은 도리어 마음의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말라흐와 르 인페르날이 협정을 맺으면서 천계가 평화기를 맞고, 루시퍼가 날개를 꺾으면서 더 이상 천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가 없지 않았던가.
그런 세월들이, 비마질다라에게는 너무나 심심하고 무료하기 짝이 없는 세월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연우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벌어진 혼란기는 비마질 다라를 조금씩 들뜨게 만들었고.
몇 번씩이나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던 마음을 뜨겁게 녹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게끔 만들었다.
올포원 레이드.
신과 악마들이 천계에 갇힌 이래, 최대의 전장(戰場)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비마질다라가 관심을 가진 건, 절대 올포원이나 새롭게 만들어질지도 모를 창조신 따위가 아니었다.
연우.
그를 이곳으로 직접 부른 이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관심사는 온통 새로운 신왕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신들이 비마질다라에게서 풍기는 아득한 격의 규모에 질겁하고 맙니다!]
[소수의 신들이 비마질다라의 등장에 긴장의 끈을 잔뜩 곤두세웁니다!]
“같잖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여전하고. 흠!”
비마질다라는 전장을 휘도는 뜨거운 대기를 맛있게 음미하다 말고, 한쪽 입술 끝을 살짝 비틀었다.
비록 말투는 학자처럼 이지적이고 근엄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목소리엔 어딘지 모르게 오만함이 잔뜩 섞여 있었다.
무시하려 해도, 그는 강림했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수많은 시선들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두려움과 경계심, 공포와 혼란. 경외 등등이 복잡하게 어우러진 시선들.
“그 눈들, 전부 뽑아 버리기 전에 옆으로 치우는 것이 좋을 걸세. 내 관심사는 한낱 명예에 눈이 먼 상태로, 무리가 곧 자신의 힘이라고 여기는 못난 그대들이 아닌 다른 것이니까.”
[다수의 신들이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립니다.]
[소수의 신들이 자신들을 모욕한 비마질다라에게 깊은 모욕감을 느낍니다.]
[극소수의 신들이 비마질다라에게 저항의 의사를 밝힙니다. 적의를 보입니다.]
“흠! 적의라.”
비마질다라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가볍게 실소를 흘리더니.
“상대방을 전혀 알아볼 줄 모르고,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할 줄 모르는 그깟 개눈깔 따위는.”
등에 매단 검의 손잡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역시 뽑아 버리는 게 좋겠군.”
그러고서는 검집에서 뽑아 크게 휘둘렀다.
단순히 허공에다 내그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절대 단순하지 못했다.
콰콰콰쾅!
쿠쿠쿠쿠, 우르르-
콰릉, 콰르르르!
마치 하늘에 총총하게 박힌 별들이 일제히 폭발을 일으키면서 유성우가 되어 추락하듯이.
비마질다라의 궤적에 노출된 모든 신격들이 그대로 ‘찢어발겨진’ 채로 산산조각이 나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검은 구비타라’가 작렬하였습니다!]
[신, ‘아르테’가 소멸하였습니다!]
[신, ‘라투’가 소멸하였습니다!]
[신, ‘알라르디’가 소멸하였습니다!]
……
[많은 신들이 추락합니다!]
[추락한 신들의 옆에 있던 신들이 저주에 오염되어 괴로워합니다!]
[신들에게로 저주가 역병처럼 퍼져 나갑니다!]
……
[대다수의 신들이 기겁하고 맙니다!]
[소수의 신들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비마질다라의 위용에 경악하고 맙니다!]
……
[신의 진영이 흐트러집니다.]
[신의 진영이 ‘혼란’ 상태에 잠겼습니다!]
[신의 진영이 ‘공포’ 상태에 노출되었습니다!]
……
[‘말라흐’의 서기장, 메타트론이 비마질다라를 잔뜩 경계하며 올포원 레이드를 방해하지 말 것을 단단히 경고합니다.]
[‘르 인페르날’의 수좌, 바알이 크게 혀를 차면서 악마들에게 함부로 비마질다라과 엮이지 말 것을 주문합니다.]
[케르눈노스가 여전히 비마질다라를 고요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비마질다라는 활짝 웃었다.
자기 수행(自己修行)을 하느라 너무 오랫동안 검에서 손을 뗀 나머지 실력이 줄어들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예전보다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최근에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런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변한 감각을 빨리 손에 익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만한 것에는 피를 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것도 없겠지. 때마침 여전히 주제를 모르고 자신을 노려보는 개눈깔들도 많으니까 말이야.
비마질다라는 다시 한번 더 검을 세게 내리쳤다.
마치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치워 버리려는 것처럼. 연우에게로 향하는 길을 말끔하게 청소하려는 것처럼.
두근.
두근!
새로운 신왕이 되려는 연우는 과연 어떤 자일까. 위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다를까, 아니면 그보다 못할까.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심장이 벌써부터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 * *
‘여기가 원한의 샘인가?’
신화에 의하면.
신왕 크로노스는 스퀴테를 만들 때, 세상의 온갖 보물과 광물들을 한데 끌어모아 ‘원한의 샘’에 담갔다고 한다.
그 외에 자세한 건 알려져 있지 않아, 원한의 샘이 대체 무엇인가 싶었었는데.
크로노스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거기에 대해 아주 짤막하게 설명했다.
-이 애비가 이룬 신화, 그 자체다.
연우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장면’과 ‘활자’들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어떻게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장면들. 그리고 마치 소설처럼 온통 빽빽하게 적힌 활자들이 저마다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공간을 따라 유영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크로노스가 지난 수만 년, 아니, 어쩌면 수십만 년도 훨씬 넘을지 모를 만큼 까마득한 세월 동안 쌓은 신화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그가 닿은 곳은 무의식 세계에서도 합일을 통해서야만 접근이 가능한, 크로노스의 무의식 세계였다.
마치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몸이 축 가라앉는 것이, 진짜 ‘샘’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스퀴테를 제작할 수 있는 데에는 아다만트도 있고, 칠흑옥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다.
-그게 뭡니까?
연우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직전, 크로노스는 연우에게 따로 스퀴테의 제작 방식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복구.
-복구라고 하시면……?
-태엽을 전부 원상태로 복구해야만 한다.
연우는 크로노스의 말뜻을 곧장 이해할 수 있었다.
스퀴테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신격을 지닌 신물이며, 그 기반은 크로노스의 신화와 신위에 두고 있다.
만약 온전하게 제 기능을 되찾으려면, 크로노스의 근간이 되는 두 개의 태엽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급선무일 테지.
-죽음의 태엽은 이미 네가 사왕좌에 오르면서 온전히 복구를 하다 못해, 아예 개념을 움직일 정도로 강화가 된 상태지. 죽음이라는 개념, 하나만 두고 본다면 넌 이미 소싯적의 내가 이뤘던 것을 뛰어넘었어.
-하지만 시간의 태엽은 현재 그러지 못한 상태지. 그건 ‘시간’이라는 신위 자체가 신격들 사이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그리고 아주 보물처럼 여겨질 정도로 귀하기 때문에, 너로서도 어떻게 복구할지가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니?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손을 댈 수도 없기도 하지. 이미 시간의 태엽은 정우의 사념체와 완전히 동화를 해 버린 지가 오래고…… 칠흑왕이 너에게 쥐여 준 것과도 거리가 있으니까. 네가 걸었던 길과도 완전히 다르지.
사실 시간의 신위는 그 자체만 따지고 본다면, 칠흑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칠흑왕은 최초의 우주가 창조되기도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공허, 그 자체. 시간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 모든 것이 ‘정지(靜正)’된 상태를 의미한다.
시간이 운동(運動)적 개념을 포함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아예 정반대되는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칠흑왕의 사도였던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의 신위가 칠흑왕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마성을 얻고 나서 죽을 위기에 놓였던 크로노스를 위해 우라노스가 남긴 신력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네 할아버지를 소환하여 배울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말을 하는 내내, 크로노스의 목소리에서는 극도로 사무친 그리움이 느껴졌다.
만약 사자 소환으로 우라노스를 부를 수 있었다면, 가장 크게 기빼했을 사람은 그였을 테지.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나의 신화 속으로 들어가거라.
-이미 나의 본체를 흡수하기도 했고, 합일을 이룬 상태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을 테지. 한 번 나와 동화를 겪기도 했었고. 거기서 너의 할아버지를 만나, 시간의 신위에 대해서 배우고 와라.
어쩌면 참신한 발상일지도 몰랐다.
신화를 헤집고 들어가, 이제는 만날 수 없을 존재를 만나서 그 힘을 배우고 오라니.
하지만 크로노스의 말마따나, 그것만이 시간의 태엽을 온전히 복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몰랐다.
그리 시간이 많지 않기도 하고.
[나열된 크로노스의 신화 중 재생하고픈 신화를 선택하십시오.]
[1. 가이아와의 시대]
[2. 아귀의 시대]
[3. 천부신 양자의 시대]
[4. 사도의 시대]
……
[경고! 당신은 현재 옛 존재의 신화에 접속한 상태입니다. 타인의 신화에 오랜 시간 동안 무방 비로 노출될 경우, 자아가 같이 휘말릴 위험이 큽니다.]
[한계 시간을 표시합니다.]
[접속 한계 시간: 12시간]
[한계 시간 내에 모든 용무를 마치고 돌아오십시오. 만약 한계 시간을 초과할 시, 자아 붕괴의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카운트를 시작합니다.]
[12:00:00]
[11:59:59_99]
[11:59:59_98]
……
연우는 지체하지 않고 원하는 시간대의 신화를 선택했다.
[목록 중 3번, ‘천부신 양자의 시대’를 선택하였습니다.]
[선택된 신화가 재생됩니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크로노스의 기억이 일부 계승됩니다.]
화아악!
익숙한 빛무리를 맞으면서, 연우는 몸이 천천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어째서 크로노스가 이룬 신화들을 두고, ‘원한의 샘’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인지.
아마도 이 신화를 체험하고 난다면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연우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