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658화 (658/862)

8화. 스퀴테 (8)

연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런 그를 보는 우라노스의 눈빛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프네우마의 하늘과 관련된 것들은 아직 막내 아이가 알 수 없는 정보다. 그런데 알고 있다고? 너는 막내 아이의 거죽을 뒤집어 쓰고 있을 뿐, 절대 막내 아이가 아니다. 누구냐, 넌?”

‘아직?’

연우는 이해할 수 없을 말을 들었지만, 일단 모른 척 잡아떼기로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저는 그저…….”

“놈! 프네우마의 하늘은 미래의 내가 막내 아이에게 말해 주는 정보라 하지 않았느냐!”

쿠쿠쿠!

우라노스의 거친 일갈과 함께 세상이 와르르 떨렸다. 이대로 행성이 그대로 주저앉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심지어 조금씩 확장을 거듭하던 ‘밤’까지 주춤거릴 정도였으니.

[투쟁의 신위가 강한 자극에 반응합니다!]

[본 신화와 관련이 없으므로 활동이 강제 취소됩니다.]

과연 천부신(天父神)이라고 해야 할까.

가이아의 저주로 스러지기 전까지 유일하게 대지모신과 대적했던 존재였다더니.

수많은 사회들을 통합하면서 올림포스를 만든 설립자이자 개척자답게, 단순히 위세를 내뿜는 것만으로도 살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연우는 우라노스의 성난 눈빛 아래 다른 감정이 일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막내아들이 혹시나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인 게 분명했다.

그 때문에 이 순간에도 연우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차라리 정체를 밝히고 협조를 구해야 하나?’

여태 크로노스의 신화를 재생해 보면서 느낀 점은 우라노스가 겉보기에는 성정이 거칠어 보여도 속은 자식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가족애가 대단하다는 뜻이겠지. 당신의 손자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려 할지도 몰랐다. 한시가 촉박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전개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접어야만 했다.

‘내가 손자라는 증거가 없어. 만약 가짜라고 여겨서 제압이라도 하려 들면 큰일이야.’

이곳이 제아무리 크로노스의 기억과 신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허구 세계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모두 자신이 ‘진짜’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먼 미래의 손자가 나타났다고 해 봤자, 이 세계가 사실은 거짓이라고 해 봤자, 도리어 미친놈 소리를 듣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미 연우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는 이상, 그것을 해소하려면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그때.

“……그렇군. 그런 것이었군.”

금방이라도 연우의 숨통을 옥죌 것 같던 우라노스의 살기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연우가 고민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도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너는…… 내 손자로구나. 크로노스의 아이가 맞느냐?”

“……!”

어떻게 알아낸 거지? 정체를 밝힐까 하는 생각을 접었던 연우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표정을 보니 내가 정확하게 짚은 모양이로군. 하면 지금 이 세상은 허구 세계인 것이고…… 너는 막내 아이의 신화를 헤집어서 내게 닿은 것이겠지?”

이만하면 점쟁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우라노스에게 미래 예지와 연관된 권능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어. 아버지는 분명 시간의 태엽이 할아버지에게서 기원한 건 맞아도, 정작 할아버지는 시간을 신위로 두지 못했었다고 했어. 그럼 대체……?’

이를 두고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프네우마의 하늘은 미래의 내가, 다 죽어 갈 때 즈음 되었을 때 막내 아이에게 말해 주는 것이라고.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네가 말하는 데 눈치를 채지 못해서야 될까?”

“…….”

여전히 이해 못 할 말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우라노스는 예지는 못 해도, 먼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처음으로 손자 놈을 만났는데, 이런 피비린내가 나는 장소여서 쓰나. 우선 자리부터 옮기자꾸나.”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그 순간에도 시간은 째깍째깍 떨어지고 있었다.

[11:20:41_06]

[11:20:41_05]

……

* * *

“그나저나 참 신기하구나. 그토록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놈이 정말 아이를 보게 될 줄이야. 세상에 그런 멍에 같은 멍에도 없을 텐데. 대체 그런 모진 맘을 먹고, 천둥벌거숭이를 구제한 천사 같은 며느리는 대체 누구인고?”

우라노스는 연우를 자신의 대막사로 데려왔다. 수하들에게는 자신이 별도의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 여태 연우를 신기한 눈으로 구석구석 살피는 중이었다.

분명히 외양은 크로노스의 모습을 하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은 어쩐지 따뜻했다.

‘아버지를 보실 때와 눈빛이 완전히 천지 차이이신데.’

아들 사랑과 손자 사랑은 다른 걸까.

한편으로는 연우도 가슴 한복판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실제로 할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와는 같이 잘 지냈을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지만.

[11:14:25_98]

[11:14:25_97]

……

마음은 계속 조급해져 갔다.

벌써 이 허구 세계에 들어온 지도 한 시간 가까이 흘렀으니까.

“조부님, 전……!”

“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 하지만 짧게나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충분할 테니 걱정 말거라.”

우라노스는 네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푸근하게 웃었다.

“그보다 정말 궁금하구나. 네 어머니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느냐?”

우라노스는 여전히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한 어투로 물었고.

연우는 걱정이 되면서도, 우라노스에게도 생각이 있을 거란 생각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레아이십니다.”

“뭣……?”

우라노스가 뜻밖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 레아가……?”

“맞을 겁니다. 조부님은 제게 외조부님도 되신다고 들었습니다.”

“푸하! 푸하하하하!”

우라노스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대막사를 울려 댔다.

우스워 죽겠다는 듯한 웃음.

“허구한 날, 하루가 멀다 하고 원수처럼 서로 머리를 쥐어뜯고 살더니, 뭐? 결혼을 해? 미래에는 고운 정이라도 드는가 보지? 푸하하하! 하하하!”

연우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양자와 양녀라고 한다지만, 그래도 친자식처럼 여겼던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말을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럴 걱정은 덜어도 될 것 같았다.

오히려 더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원래 양자들을 여섯이나 두었던 것도, 그때까지 통일성이 부족했던 올림포스를 강제로 붙들기 위한 정책이기도 했으니. 오히려 조부님 입장에서는 한시름 놓이는 결과려나.’

그래도 단순히 정책의 결과라고 보기엔 너무 진심으로 좋아한다 싶었다.

연우는 저기다 기름을 좀 더 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슬하에 자식도 여…… 덟이나 두셨습니다.”

“뭐? 그렇게나 말이지? 하하하하! 이거 완전히 깨가 쏟아지는구만! 깨가 쏟아져! 한시도 안 떨어진다는 뜻이 아닌가!”

여덟.

연우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제우스 6남매에 자신과 차정우까지 더했다.

그들과의 사이는 차지하더라도, 피를 나눈 것만큼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정말 다행이구나. 프네우마 파(派)와 퀴리날레 가(家) 간의 오랜 대립이 드디어 그들 대에 끝나게 되는 것이니까. 너는 바로 그들의 결실이라 할 수 있겠구나.”

연우의 눈이 빛났다.

드디어 기다리던 단어가 나왔으니까.

프네우마.

“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과거는, 들은 바가 있더냐?”

“없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역시 자신 대 이전의 은원은 남겨 두지 않은 모양이구나.”

“젊은 시절에 원래 두 분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얼핏 알고 있습니다.”

“그냥 안 좋은 게 아니다. 아주 원수였지. 선대…… 아니, 태초 때부터 내려오던 은원이 있어서다.”

우라노스의 설명은 아주 간단했다.

태초의 우주가 열리고, 수많은 신격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사회가 만들어졌다가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무너지기도 했으니, 그 과정에서 ‘원수’가 만들어지는 것도 지극히 당연했다.

그중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프네우마 파와 퀴리날레 가.

“깊게 파고들면 머리 아프고, 간단히 요약하자면 프네우마 파는 우주의 ‘확장’에 의의를 두어 번영과 승리라면 눈에 불을 켜던 미치광이들의 집단이었고.”

우라노스는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퀴리날레 가는 반대로 위신과 명예를 중시하여 우주의 ‘법칙’을 숭상하던 귀족 집단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성향이 반대이니만큼 툭하면 서로 으르렁거렸지. 두 곳 모두 역사와 전통도 태초에 두고 있을 만큼 아주 깊어서 그 정도는 더 컸고. 뭐, 둘 다 결국 내 앞에서는 한주먹거리에 불과했다만.”

“…….”

연우는 어쩐지 우라노스가 잘난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하지만 프네우마 파는 이미 그 전부터 쇠락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나같이 인성이 얼마나 개차반이던지 여기저기에 하도 시비를 털고 다녀서…… 하여간 그 때문에 남은 놈들은 언제부턴가 위기감을 느끼고, 결국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러 버렸지.”

우라노스의 한쪽 입술 끝이 비틀렸다.

“자신들의 정수(精髓)를 끌어모은 씨를…… 대지모신에게 넘겨 주어 한 아이를 잉태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

연우는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크로노스.

“다행히 도중에 내가 어찌어찌 구해 주긴 했다만, 그 일로 프네우마 파는 공적으로 낙인찍히면서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지.”

우라노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참고로 막내 아이는 ‘프네우마’가 무엇인지 모른다. 도중에 기억이 끊겼고, 내가 사실을 제대로 전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

연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왠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럼 프네우마의 하늘이란 것은……?”

“원래 막내 아이가 선조로부터 받았어야 할, 그들의 비기(秘技)란다.”

연우는 이제야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게 있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로부터 배웠다는 신력의 사용법…… 그게 바로 프네우마의 하늘이구나.’

그리고 그것이 스퀴테의 중심이 되었을 테지.

연우는 궁금했다.

이제는 기억하는 존재도 극히 드문 ‘프네우마’가 대체 어떤 곳인지.

그리고 거기서 전해지는 비기는 또 무엇이기에, 스퀴테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

“한데, 막내 아이가 아직 받지 않은 것을 거론하였으니, 다른 존재가 들어왔다고밖에 여길 수 없지.”

“그렇다고 하셔도 제가 핏줄이라는 증거는 안 되지 않습니까?”

“전부 프네우마의 하늘 덕분이지.”

“…….”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말하지 않았더냐. 프네우마 파는 우주의 ‘확장’을 추구했다고.”

우라노스는 양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그 위로 수많은 별 무리가 총총 박힌 우주의 전도(全圖)가 나타났다.

그가 다스리는, 올림포스의 영향력이 미치는 우주였다.

“우주는 확장한다. 무한하게 커지지. 거기에는 가속도가 붙어. ‘생동(生動)’이 계속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두고, 우리들은.”

우주의 전도에서 밝혀지는 별무리에 비쳐서일까.

우라노스의 눈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간’이라고 부른다.”

“……!”

“프네우마 파는 바로 그런 시간을 대변하는 곳이었다. 숭상하고, 경외하지. 그리고 그것을 대변한다. 한때는 그 처음과 끝을 보면서 기다란 역사의 흐름을 책자에 서술하고자 하기도 했었다.”

‘……계시록!’

“그들은 예언가이자 전사였다. 더 큰 욕심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억지로 가지려 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오늘날 올림포스가 있을 자리에는 그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라노스의 입술 끝이 한껏 비틀렸다.

“하지만 시간을 추구한다고 해서 완전무결(完全無缺)한 건 아니다. 결국 내가 이겼고, 그들의 힘을 빼앗았으니까. 그리고 이를 통해 미래를 어느 정도 보았지.”

피식!

우라노스는 그런 웃음소리를 냈다.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만.”

“…….”

연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간의 태엽을 수리할 방법을 확실하게 찾았으니 기분이 벅차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면에 숨겨진 비밀을 엿본 것 같아 가슴이 울렁이기도 했다.

더구나 궁금한 게 있었다.

프네우마 파가 우주의 ‘시간’을 추구했다면.

그들과 오랫동안 대립했다는 퀴리날레 가는 대체……?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럼 어머니 가문이 추구하던 건 무엇이었습니까?”

우라노스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크게 웃으면서 짤막하게 대답했다.

“공간.”

연우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언제부턴가 우라노스의 존재감이 그의 시야를, 심상을, 무의식을 가득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한 손에 시간이라는 씨줄을, 다른 손에는 공간이라는 날줄을 쥐며 우주를 창조한다. 그렇기에 천부신, 바로 ‘하늘’인 것이지.”

우라노스가 크게 웃었다.

“그게 바로 나, 우라노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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