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스퀴테 (9)
시간과 공간.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다룰 수 있기에 천부신이라.
우라노스는 어째서 자신이 하늘의 신위를 지니고 있는지. 어떻게 태초에서 발현하여 자아를 지니게 되고, 그리고 올림포스라는 거대 집단까지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을 얻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우라노스의 목소리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흐르면서도,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시간을 만진다지만 사실상 따지고 보면 남들의 단면을 엿보는 것에 지나지 않고, 공간을 만든다지만 결국 내 손길이 닿는 범위에 국한될 뿐이다. 시공간(時空間)을 함께 다룬다고 해도 그건 ‘작은 굴레’에 불과할 뿐이니. 그 속에 내포된 인과율(因果律)은 내 손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초월’을 이루었다고 해도.
신과 악마와 용종과 거인족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자신들이 이룬 건 진정한 초월이 아니라고.
전 우주와 차원에 걸쳐 고루고루 뻗쳐진 인과율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어찌 그걸 두고 초월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건 우라노스도 마찬가지였다.
인과율을 완전히 벗어나 ‘자유’를 쟁취한 존재는 다르게 불린다.
황(皇).
만물(萬物)의 주재자(主宰者)라고.
“그래서 이 할애비는 반쪽짜리에 불과할 뿐이다. 어쩌면…… 원래는 내 것이 아닌 것을 강제로 취해서 생기게 된 페널티일지도 모르지. 내가 엿보았던 것도 ‘내’가 언젠가 시야를 ‘잃어 가면서’ 막내 아이에게 원래 돌려주어야 할 것을 돌려주는 것에서 거의 끝이 난다.”
크로노스가 일만 개도 넘는 미래 예지 끝에 겨우겨우 연우와 눈이 마주쳤듯이.
우라노스도 그와 비슷한 것을 엿본 것 같았다.
머나먼 미래에서. 그 자신은 살아 있지도 않을 장소에서 핏줄이 날아와 도움을 청하게 되는 때를.
‘어쩌면 할아버지가 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다들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실상 ‘황’에 가장 근접했던 건 크로노스보다도 우라노스였는지도 몰랐다.
다만, 크로노스는 칠흑왕의 사도로서 죽음을 다룰 수 있었기에 신격들에게 더 큰 공포와 위협으로 다가왔을 뿐.
전지와 전능, 그리고 인과율에서의 자유를 평가의 기준으로 둔다면. 비록 스스로가 ‘반쪽짜리’라고 낮춰 말하지만, 실상 우라노스가 더 윗줄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실제로 우라노스는 말투와 다르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고 있었다.
세상 어느 누가, 온 우주를 뒤져 봐도 자신에 대항할 존재가 과연 있겠느냐는 듯.
‘하긴 그런 카리스마가 있으니, 그렇게 올림포스가 혼란스러웠어도 충분히 휘어잡으셨겠지만.’
본격적으로 내전이 발발했던 것도 우라노스가 가이아의 저주로 힘을 잃고 난 뒤부터가 아니었던가.
[11:08:06_77]
[11:08:06_76]
……
“그런데 강제로 취해서 억지로 시공간을 움켜쥐고 있는 나와 다르게, 너는 프네우마와 퀴리날레의 씨를 전부 타고났단 말이지.”
연우를 보는 우라노스의 눈빛이 순간 격렬한 감정으로 일렁였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연우가 순간 등골이 쭈뼛 설 만큼 강렬한 시선이었다.
그 눈빛은 축복받은 피를 타고난 연우에 대한 시기일까, 아니면 반쪽짜리에 불과했던 자신의 업이 후대에서는 완성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연우는 도통 우라노스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크라노스와 레아의 자식이라고 했을 때부터, 우라노스의 시선에는 따스함만 있진 않았다는 것.
야망.
세상의 모든 것을 움켜쥐고자 하는 정복자의 힘이 실려 있었다.
“여하튼 지금 네가 익히고자 하는 건 프네우마 녀석들의 비기라 하였지?”
“예. 그렇습니다.”
“네 아비는 그걸 익히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하지 않던?”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라노스가 남긴 신력을 다루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는 말씀을 하시긴 했었다.
“하지만 너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테고?”
그러면서 크로노스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라노스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그런 양반이거든. 그분은.
“프네우마의 하늘을 가르쳐 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어차피 네가 언젠가 받았어야 할 것을 지금 가르쳐 줄 뿐이니. 크로노스가 그러지 못한 건,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의 태엽은 크로노스가 직접 손을 댈 수 없다. 그는 현재 비그리드라는 물체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반신(半神)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짧다면 벼락치기로 해야겠지.”
“방법이 있겠습니까?”
“있다마다.”
우라노스는 걱정 말라는 듯 씩 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순간.
쭈뼛!
연우는 저도 모르게 든 불안감에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말았다.
우라노스의 웃음이 어쩐지 불길해 보였다.
* * *
‘제기랄! 이딴 예감은 좀처럼 빗나가질 않지.’
연우는 손발이 수갑과 족쇄로 단단히 묶여 있는 상태였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몸을 감은 쇠사슬의 끝에는 도망치지 말라고 특별히 묵직한 추까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웬만한 물건쯤이야 크로노스의 육체로도 충분히 떨쳐 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것들의 재질이 신진철이라는 점이었다.
“크로노스 님…… 이번에는 대체 또 무슨 사고를 치신 건지.”
“저번에 도련님 중 한 분의 입냄새가 심하다고 죽빵을 한 대 휘갈겼다고 들었었는데. 그 때문일까?”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군그래.”
“그래도 그렇지 ‘밤’에다 던져 넣을 생각을 하실 줄이야. 저러다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만큼 이번에야말로 크로노스 님의 성질머리를 단단히 고쳐 놓겠다는 생각이실 테지.”
올림포스의 신들은 어느새 한데 모여서 우라노스가 직접 사람들을 시켜 연우를 속박하는 것을 보며 저들끼리 떠들기에 바빴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연우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한창 작업을 지시하고 있는 우라노스를 바라보았다.
대체 그놈의 속성 교육이 뭔지는 알 수 없어도, 그가 무슨 죄인도 아니고 다짜고짜 신진철에다 묶어 버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덕분에 신력을 끌어 올리는 족족 신진철이 몽땅 빨아들여 이제는 몸에 힘도 없었다.
“지금부터 네가 진입하게 될 장소는 ‘밤’이라는 곳이다. 이곳에 왔을 때부터 봤었겠지?”
대체 저 수상쩍은 ‘밤’과 프네우마의 하늘 간에는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달리 닉스(Νύξ)라고도 부른다. 태초,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어둠에서 삐져나와 어떻게든 이 세상의 존재들을 먹어 치우고자 하는 괴물이지. 공허도, 혼돈도, 심지어 심연도…… 저 안에서는 전부 성질을 잃고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닉스.
올림포스 신화에서는 땅과 잉태를 상징하는 대지모신 가이아와 함께 동시대에 태어난 밤의 상징이었다.
정확하게는 밤을 의미하는 개념신이라고 봐도 무방할 테지..
‘애당초 개념신이라는 존재들이 원래 저런 형태라고 했으니.’
의지를 갖고 움직였던 대지모신이 특이한 케이스였을 뿐. 원래 개념신들은 개념에서 비롯되어 일정한 형체가 없고, 존재에 따라서는 신들을 전부 먹어 치울 만큼 강했다. 그저 자아가 없을 뿐이었다.
“칠흑의 늪과는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음? 그것도 아느냐? 칠흑의 늪이 알려지는 건 원래 ‘밤’을 물리치고 난 뒤에나…… 아, 또 깜빡하고 있었군.”
우라노스는 차라리 이야기하기가 더 편해졌다는 얼굴이 되었다.
“저건 칠흑의 늪에서 삐져나온 부산물, 뭐 그런 거라고 보면 될 거다. 이를테면, 창조의 빛에 찢긴 칠흑의 파편이라고 해야 할까? 저기에 휘말려 죽거나 무너진 세계도 워낙에 많은 까닭에 우리는 오랫동안 저것과 싸우고 있다. 우리의 영역까지 잠식되어서는 안 되니까.”
연우는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올림포스는 오랫동안 ‘밤’과 싸우고 있었고, 끝내는 그것을 해치우는 데 성공하면서 근원인 칠흑의 늪에 다다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조사하던 중에 아버지가 마성과 만나게 되었던 거고. 질서의 진영과 혼돈의 진영…… 꽤 오래전부터 서로 싸우고 있었던 거야.’
이런 것도 현재는 알려지지 않은 옛 우주의 역사이고 비밀이니, 알려 주는 건 좋다.
하지만.
‘대체 프네우마와 저게 무슨 상관이냐고……!’
우라노스는 연우의 의문을 알고 있다는 듯,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설명했다.
“들어가 보면 안단다.”
연우는 순간 욱하고 치밀어 오른 욕지거리를 억누르면서 말했다. 쇠사슬은 어느새 그의 발끝까지 칭칭 감고 있었다.
“……조부님.”
“딱딱하게 조부님이 무엇이냐. 할아버지라고 부르려무나.”
딱딱한 조손 관계가 싫다는 게, 과연 저런 괴상망측한 것에다 손자를 던져 넣는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 걸까.
“제가 필요한 건 시간의 신위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걸 다룰 수 있는…….”
“허허! 재미난 말을 하는구나. 사내가 칼을 뽑았으면 응당 무라도 베어야지. 고작 그런 정도로 되겠느냐? 느림의 미학을 한번 깨달아 보고 오너라.”
배우려면 제대로 배우라는 의미였다.
연우는 확신했다.
자신의 할아버지는 절대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고.
“절! 대! 네 아비에게 쌓인 울화를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이러는 건 아니란다. 그럼.”
“잠……!”
“가자꾸나.”
‘깐’이라는 말까지 꺼내기도 전에.
우라노스의 지시에 따라, 큰 덩치를 자랑하는 신이 연우를 그대로 들더니, 투포환을 던지는 것처럼 냅다 ‘밤’이 있는 곳으로 집어 던졌다.
아아악!
연우는 별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괴성을 질러 대면서 ‘밤’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풍덩!
마치 물속에 잠긴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우라노스가 경고했던 대로 ‘밤’은 연우라는 존재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우려는 것 같았다. 인식, 지각, 감각…… 심지어 표상(表象)까지도 전부 삼키고 있었다. 심연에 처음 빠졌을 때와 비슷했다.
[의념 통천]
연우는 곧장 의념을 곧추세워 존재가 흐트러지지 않게끔 똑바로 세웠다.
‘심연에서는 윤회의 고리로 향하는 영혼의 잔재들이나, 다른 생명들과의 연결 고리를 볼 수 있었는데…… 여기는 전혀 다르구나. 여전히 아무것도 없어.’
혹시 다른 무언가라도 감지되는 게 있을까 싶어 의념을 확장해 보았지만, 여전히 인식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부 소멸하고 만 것일까.
분명히 그만한 크기라면 그동안 삼킨 것들이 어떤 형태로라도 남아 있을 텐데. 삼킨 모든 것들을 그냥 지워 버린다는 말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냥 없던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든가.
‘시간이라는 개념조차도 여기서는 무의미해. 대체 뭘 깨우치라는 거지?’
연우는 한순간 가슴 한편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꼈다.
[10:42:23_32]
[10:42:23_31]
……
보이는 것이라고는 카운트뿐.
아니, 그마저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방해로 신화의 재생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한 시간 집계의 기능이 정지됩니다.]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무(無)인 세상.
-느림의 미학을 한번 깨달아 보고 오너라.
우라노스가 그에게 준 힌트는 고작 저게 전부였다.
‘느림의 미학?’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단순히 느리다는 개념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라면, 분명히 ‘밤’만큼 어울리는 곳도 없겠지.
하지만 시간의 태엽을 수리하고자 하는 연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요소는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주신 힌트가 이것만은 아닐 거야. 다른 것, 다른 것…… 다른 힌트가 뭐가 있었지?’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도저히 짚이는 게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이라면 딱 하나.
이름.
‘프네우마.’
아버지의 뿌리가 닿아 있다는 곳.
한때, 우주의 시간을 추종했다던 무리.
프네우마(πνεύμα)는 사실 따지고 보면 여러 철학적인 의미를 담은 개념적 단어이긴 했다.
생령, 숨결, 신으로부터의 선택……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정의부터, 이를 포착하려는 욕구, 표상, 이성 등 사고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의미를 총괄한다.
여전히 이 단어와 시간과의 연관성은 알기 힘들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짚이는 바는 있었다.
‘시간을 관측자에 의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사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아주 추상적이다. 같은 우주 내에서도 위치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달라진다. 블랙홀처럼 공간이 붕괴되는 지점에서는 지독하게 빨라지는 반면, 어떤 변동도 없는 곳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관측자, 혹은 주체(主體)의 입장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의식과 외부 세계를 단절했을 때도 비슷하다. 사고 속도를 빠르게 돌리면 외부 세계와 괴리되어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의 속도가 완전히 차이가 나는 것이다.
실제로 연우는 그와 비슷한 스킬도 지니고 있었다.
시차 괴리.
그것을 통해 몇 번이나 위기의 순간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던가.
결국 시간은 관측자의 생각과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빨라질 수도, 느려질 수도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었다.
‘여기 있는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관측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간을 주재하는 것이…… 프네우마의 정의인 걸까?’
아주 희미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무언가가 잡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띠링.
띠링.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찾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시차 괴리’에 대한 새로운 변화가 가해집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태엽을 수리할 수 있는 질료(質料)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감각이 열렸습니다.]
[육신통 중 두 번째, 천이통(天耳通)을 획득하였습니다.]
……
[천안통과 천이통의 복합 작용으로 인해 기존에 인지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관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허수 세계(虛數世界)를 인지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밤(녹스)’이 새로운 모습을 드러냅니다!]
수많은 메시지가 떠오르면서.
‘밤’을 아래에 가려져 있던 다른 무언가가, 일그러진 형태를 한 거대한 무언가가 혼잡한 의념을 방출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건.
무. 엇. 이. 지.
그건.
연우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 이놈이 왜?’
문제는 이놈만 있는 게 아니란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