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스퀴테 (10)
연우 앞에 놓인 것은 웬만한 행성쯤은 가볍게 찜 쪄 먹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지금의 연우를 한 개의 작은 점으로만 보이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 이전에 마성과 합일을 이루면서 탑의 바깥에서 겨룬 적이 있던 녀석보다 훨씬 큰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다…… 기어 다니는 혼돈, 이놈만 있는 게 아니야.’
기어 다니는 혼돈이 워낙에 압도적인 크기와 존재감을 자랑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일 뿐.
그 너머에도 그에 못지않은 것들이 수두룩했다.
심지어 기어 다니는 혼돈도 한 수를 접어줘야 할 만한 신력을 품고 있는 것도 더러 있었다.
‘밤’…… 허수 세계라는 게 설마 타계(他界)를 말하는 거였나?
연우가 알기로 타계를, 즉, 무질서와 혼돈의 세계를 관측하기 시작한 것은 탑이 세워진 이후인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분명 올림포스는 이것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올림포스가 이들에 대해서 얼마나 파악하고 있고,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직접 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절대 작지 않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분명 여기서 처음 우라노스를 만났을 때, 이놈들을 두려워해서 탈영하던 신들이 있었으니까.’
‘밤’이 우라노스가 이끄는 올림포스에게도 두려운 상대인 건 틀림없었다.
‘확실히 기어 다니는 혼돈, 그 녀석 하나만 모습을 비쳤을 때에도 천계가 상당히 긴장했었지.’
연우도 기어 다니는 혼돈과 겨룰 적에 녀석이 의식 세계를 강제로 침입했기에 겨우 봉인할 수 있었던 것일 뿐. 실제로 맞붙는다면 승부를 쉽게 점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우주적인 존재가 있고, 그와 비슷하거나 더 높은 격을 지닌 것들이 느껴지고 있다.
그만한 존재들이 어째서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절대 만만하게 볼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외신(Outer Gods).
타계의 신들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손꼽혀 신중신(神中神)으로 불린다는 존재들이니만큼, 바짝 긴장할 필요가 있었다.
‘하위 개체들은 대략은 부와 견줄 만한 정도인 건가? 몸이 이래서 수준을 가늠하기가 너무 어려워.’
이는 어린 시절의 크로노스 육체에 들어온 만큼, 지금 연우에게 걸린 제약이 너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들이 ‘밤’을 유지하고는 있을지언정, 그 바깥으로 영향력을 뻗치는 건 불가능한 듯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무관심하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밤’의 바깥으로 나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으니까.
심지어 연우를 감지했을 텐데도, 그에게 관심을 두는 건 기어 다니는 혼돈이 전부였다.
‘이들이 ‘밤’ 바깥으로 힘을 투사할 수 있었다면…… 제아무리 올림포스라고 해도 무사하진 못했겠지.’
그렇기에 의문이 든다.
어째서 이들은 ‘밤’의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는 걸까?
분명히 ‘밤’이 계속 확장하면서 올림포스의 영역을 잠식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법칙이 달라 불가능한 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 해. 라.
그렇게 연우가 고민이 잠긴 사이.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여전히 모든 의념을 연우에게로 집중한 채, 말을 걸고 있었다.
타계의 신 중에서도 호기심이 많아, ‘탑’에도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던 녀석답게.
자신과는 전혀 다른 법칙으로 움직이고 있는 연우에게도 호기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말. 해. 라.
‘어떻게 하지?’
연우는 아주 잠깐 동안 고민했다.
여기서 대항해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모른 척할지.
자신은 아직 크로노스의 몸을 하고 있으니 제 실력을 드러낼 수가 없다. 있다고 해도, 싸워서는 승부가 쉽게 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는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 먹고 말 테니까. 메시지가 경고했듯이, 제한 시간을 넘어가게 되면 페널티를 받게 된다. 크로노스의 신화에 잡아먹히게 되거나, 아니면 그냥 표류를 해 버리거나.
‘신진철에 묶여 있는 것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 싸워서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아버지의 신화가 어떤 방식으로 꼬일지도 알 수 없다.’
크로노스의 신화는 이미 탑처럼 굳건하게 세워져 있는 상태. 거기서 조금이라도 이질적인 부분을 만든다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연우는 신화가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프네우마의 하늘만 익히고 사라질 생각이었다.
이렇게 돼서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아버지가 욕을 엄청 하시겠는데.’
다른 것보다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아버지에게 약점이 잡혀서야 두고두고 갈굼만 받을 테니까.
알. 아. 듣. 지. 못. 하. 나.
그 순간에도.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연우에 대한 탐색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크게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두면 곧 관심을 잃고 사라질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우. 둔. 할. 지. 도.
그. 럴. 지. 도.
‘할아버지는 대체 언제까지 날 여기다 묶어 두실 생각이신 거지?’
연우는 이제 자신의 안쪽까지 탐색하려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의념이 짜증 났다.
[투쟁의 신위가 외부의 의념에 강하게 반응합니다!]
[본 신화와 관련이 없으므로 활동이 강제 취소됩니다.]
거기다 투쟁의 신위까지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크로노스의 신화를 재생한 뒤로 계속 이 모양이었다.
그래도 억지로 꾹 눌렀고.
‘그냥 가라.’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이 빨리 자신에 대한 흥미를 거두고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녀석의 의념은 이미 자신의 내부까지 낱낱이 관찰하고 난 뒤였다.
이때의 크로노스는 아직 어리디 어렸으니, 기어 다니는 혼돈의 기준으로는 격이 한참 낮은 하급 신으로만 비칠 것이다.
없. 나.
날.
느. 끼. 지. 못. 하. 나.
이. 상. 하. 군.
감. 응. 이. 있. 었. 던. 것. 같.
결국 기어 다니는 혼돈은 한참 동안 연우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천천히 의념을 거두려고 했다. 그 순간에도 연우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면서 우라노스가 빨리 자신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하데스의 식령검’이 삼킨 기운의 잔재 중 ‘기어 다니는 혼돈’을 구성하고 있던 신화의 일부가 외부의 의념에 조금씩 반응합니다!]
[외부에서 침투된 의념이 이를 강하게 감지합니다!]
[본 신화와 관련이 없으므로 활동이 강제 취소됩니다.]
‘……제길!’
연우의 눈이 커졌다. 설마 여기서 오래전에 하데스의 식령검으로 흡수했던 기어 다니는 혼돈의 신화가 반응을 보일 줄이야!
비록 크로노스와는 관련이 없어서 활동이 곧장 취소되긴 했지만.
기어 다니는 혼돈이 그것을 놓 칠 리가 없었다.
이. 건.
쿠쿠쿠!
기어 다니는 혼돈의 의념이 한 순간 신력으로 변질되면서 연우를 뒤덮어 왔다.
연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려는데.
먹. 을 거.
태. 울. 거. 다.
얼. 릴. 거.다.
별안간 연우의 발아래에서 기어 다니는 혼돈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한 타계의 신이 와락 하고 달려들었다.
마치 세상을 금방이라도 태워 버릴 것처럼 잿빛으로 빛나는 거 대한 불덩이의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낯선 신력을 지닌 다른 타계의 신들과 다르게, 기어 다니는 혼돈과 함께 연우에게 아주 익숙한 기질을 품고 있었다.
‘마해!’
막무가내로 탑으로 돌진하다가 결국 시스템에 의해 고사(枯死)되어 히든 스테이지로 전락하고 말았던 타계의 신, 극권의 군주.
그것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콰아아앙!
극권의 군주는 기어 다니는 혼돈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연우를 집어삼키기 위해 불덩이의 외형에서 ‘입’ 부분을 길게 쭉 찢었다.
왜 갑자기 이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자신은 물론, 신화 속의 크로노스까지 같이 잡아먹힐 판국이라 곧장 움직여야만 했다. 녀석의 위장 구경은 마해를 탐사했던 것으로도 족했다.
[알 수 없는 힘이 발동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속박되어 있던 구속 중 일부가 절단되었습니다.]
[어설프게 속박되어 있던 구속 중 일부가 파손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힘’, 음검이었다.
음검은 스킬이나 권능이 아닌 깨달음의 영역. 또는, 해킹과 어뷰징 같은 이단(異端)의 영역이었다.
그렇기에 시스템도 음검에 대해서는 특징을 특정하지 못해 따로 ‘알 수 없는 힘’으로 명명한 게 아니겠는가.
애당초 연우는 크로노스의 어린 육체로 빙의했으면서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만약 위기에 잠겨도 음검을 발휘한다면 그만이었으니까. 그가 우라노스의 말에 순순히 신진철에 구속되어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할아버지가 그만큼 어설프게 구속하셨던 것도 있었지만.’
만약 우라노스가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구속’이 아니라 ‘봉신’이 되었겠지만.
여하튼.
연우는 손과 몸뚱이를 묶고 있던 쇠사슬을 모조리 끊어 내는 것과 동시에, 감히 자신을 삼키려 했던 극권의 군주를 양단해 버릴 속셈으로 주둥이를 크게 찢어 놓았다.
크오오!
으. 아. 아.
아. 파.
아. 파.
극권의 군주는 지고한 격을 그냥 따낸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단숨에 외형을 분리해 음검의 범위에서 벗어나 연우의 뒤쪽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상처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던지, ‘밤’이 떠나갈 정도로 거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적의로 가득 찬 의념을 마구 풍겨 대면서 곧장 다시 연우에게로 달려들었다.
잿빛 불꽃이 소용돌이를 치면서 연우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하나같이 태양보다도 더 강렬 한 빛을 자랑하여 연우를 금방이라도 녹여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빛무리와 다르게, 녀석은 영혼까지 단박에 얼어붙게 만들 엄청난 냉기를 뿜어 대고 있었다.
감. 히.
극권의 군주는 연우를 죽일 요량으로 잿빛 불꽃을 잇달아 토해 냈다. 냉기가 잔뜩 쏟아지면서 연우의 신체를 얼어붙이려 하고, 사방에서는 결빙된 고드름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거대한 신력이 회오리를 치면서 연우의 움직임을 봉쇄하고자 했다.
‘될 수 있으면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크로노스의 신화가 어그러질 위협이 있었지만. 추후에 크로노스에게 어떤 꾸지람을 들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선은 ‘밤’을 탈출하는 게 급선무일 것 같았다.
‘우선 무기부터!’
연우는 잘게 부서진 채로 흩어진 쇠사슬의 조각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렇게 강렬한 신력의 폭풍 속에서도 더 부서지지 않고 멀쩡하게 남아 있다는 건, 그만큼 단단한 내구도를 자랑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진철을 다루는 것만큼은 탑 내에서도 손에 꼽힌 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비록 육체는 현실에 미치지 못해 아주 약했지만, 신진철로 된 무기가 있다면 충분히 놈들에게도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진철은 타계의 신이라고 해서 효과가 약해지거나 하지 않으니까.
물론, 이것까지 우라노스가 예상하고 배치한 안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휘휘휘!
쇠사슬의 조각들이 연우의 손아귀 쪽으로 몰려들고, 그가 방출한 신력에 따라 강한 압축을 받아 형태가 우그러지면서 하나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빨려 들어왔을 때에는 어느덧 비그리드와 똑같은 외형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화아악!
연우는 전력을 다해 신력을 외부로 방출하면서 모든 의념을 칼 끝에 담고, 음검의 묘리에 따라 극권의 군주에게로 휘둘렀다.
[알 수 없는 힘이 ‘밤(녹스)’을 가득 물들이고자 합니다!]
촤촤촤촤!
금방이라도 연우를 불태울 것 같았던, 아니, 얼려 버릴 것 같았던 신력의 소용돌이가 모조리 가닥가닥 끊어져 나갔다.
무. 슨.
극권의 군주는 설마 이렇게 조그마한 존재가 자신의 권능을 쳐 낼지 몰랐던 듯, 심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고.
파앗!
그사이 연우는 공간을 가르면서 단번에 극권의 군주의 ‘머리’로 짐작되는 부분으로 파고들어 가 다시 칼을 내리쳤다. 칼날을 따라 잔뜩 응축된 검뢰가 폭발하면서 수없이 잘게 쪼개진 검고 붉은 벼락이 거대한 녀석의 몸뚱이에 고루 내리꽂혔다.
[알 수 없는 힘이 ‘검뢰팔극’을 구현합니다!]
그오오오!
극권의 군주가 내뱉는 비명 소리가 더 커지는 가운데.
[투쟁의 신위가 강하게 반응합니다!]
[본 신화와 관련이 없으므로 활동이 강제 취소됩니다.]
[투쟁의 신위가 억압을 강제로 뿌리치고자 합니다!]
[본 신화와 관련이 없으므로 활동이 강제 취소됩니다.]
[투쟁의 신위가…….]
……
[알 수 없는 힘이 원활한 활동을 위해 음령(陰靈)의 상태를 구성하고자 합니다.]
[알 수 없는 힘이 신화에 강제로 개입합니다.]
[외부의 신화가 강제로 기술됩니다.]
[외부의 신화가 강제로 기술됩니다.]
……
[투쟁의 신위가 각성되었습니다!]
[천안통과 천이통의 복합 작용으로 감각이 더욱더 예민해집니다!]
[질료를 감지하였습니다.]
[질료를 감지하였습니다.]
[프네우마(πνεύμα)가 조금씩 깨어납니다.]
[많은 존재들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그동안 기어 다니는 혼돈은 몸을 크게 뒤로 물린 채, 연우와 극권의 군주가 다투는 꼴을 아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