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스퀴테 (11)
[본 신화는 권능, ‘검뢰팔극’을 온전히 구현하는 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해당 권능은 아직 이 시대에 출현하지 않은 권능입니다. 출몰 시기가 적합하지 않습니다.]
[해당 권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본 신화는 그 조건을 만족하지 못합니다.]
……
[투쟁의 신화가 부족분 중 일정 분량을 채웁니다.]
[투쟁의 신화가 부족분 중 일정 분량을 채웁니다.]
……
[보정 효과로 인해 ‘검뢰팔극’의 일부가 구현됩니다!]
콰르릉-
애당초 연우는 검뢰팔극을 전개했을 때부터 온전히 제 위력을 드러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크로노스가 쌓은 신화가 다르고, 자신이 이룬 신화가 다르다. 그러니 온전히 구현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가 빙의해 있는 몸은 젊은 시절의 크로노스. 당연히 신체적인 능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성기 시절 신왕의 육체라면 모를까, 지금으로는 검뢰를 구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무리가 갔다.
실제로 지금 육체는 금방이라도 어긋나 무너질 것처럼 폐부가 꽉 조여 왔다. 잘못 건드렸다간 모래 성처럼 우수수 쓰러질 것 같은 느낌.
‘무슨 개복치도 아니고, 대체 신왕 이전에는 뭘 하신 거야……!’
하지만 연우는 그런 부담 중 상당수를 억지로 각성한 투쟁의 신위에 할당했다.
물론, 이는 투쟁의 신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가 있었다. 자칫 신위에 균열이 가거나 흐트러질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투쟁’이 작동하는 근본 원리가 무엇인가. 바로 ‘맞서는 것’이다. 그리고 연우가 이룬 ‘투쟁’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간 고차원적인 특징을 담고 있었다.
불가능에 맞서는 것.
남들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8대 클랜을 무너뜨리며 동생의 복수를 완료했고, 용종과 거인족을 거느리며, 이제는 어느 누구도 맞서지 못했던 올포원과 겨루고자 한다.
죽음의 신위가 그에게 막강한 힘을 주었다고 하지만, 실상 그를 움직이게 만든 원동력은 보다 높은 곳으로 오르고자 했던 향상심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그런 주인의 성격을 쏙 빼닮은 투쟁의 신위는 오히려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반발해서 크게 튀어 오르는 청개구리 심보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과부하가 걸리면서 육체에 상당한 부담을 주자, 투쟁의 신위가 고작 이걸로는 자신을 어쩌지 못할 거라는 듯 더 크게 튀어 올랐다.
[투쟁의 신위가 포효합니다!]
비록 그로 인해 평화롭던 크로노스의 신화에 상당한 흔적을 남기고 말았지만.
[외부의 신화가 강제로 기술됩니다.]
[신화의 균형이 어그러집니다!]
그렇게 해서 구현된 검뢰는 잇달아 극권의 군주를 때렸다.
그아아아!
녀석이 내뱉는 구슬픈 울음소리가 우주를 뒤흔들었다. 분명 음파를 전달할 매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연우는 그런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그만큼 극권의 군주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녀석이 까마득한 세월을 살면서 이런 아픔을 느껴 볼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동안 피조물들은 벌레 따위로 여겼을 것이고, 타계 내에서도 고위 서열을 차지하고 있으니 다른 타계의 신들을 부려 먹는 입장이었겠지.
하물며 한낱 유희거리라고 생각했던 연우에게 이런 치욕을 겪었으니, 분노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 프. 다.
아. 프. 다.
너.
죽. 인. 다. 죽. 일. 거. 다.
극권의 군주는 살의를 잔뜩 풍겨 대면서 어떻게든 연우를 잡고자 했다.
잿빛 불꽃이 더 화려하게 타올랐다. 마치 초신성이 폭발이라도 한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크기를 자랑하는 불길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며 연우를 몇 번씩이나 휘갈겼다.
웬만한 행성쯤은 쉽게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운석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바닥에서는 회오리를 그리던 잿빛 불길이 몇 번씩이나 점화되면서 연우를 불살랐다.
그럴 때마다 연우는 검뢰를 번뜩이며 운석을 터뜨리고, 불길을 강제로 꺼 버렸다. 그리고 일정한 형체 없이 움직이는 녀석의 중심 핵을 찾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밤’의 한쪽 구석이 둘의 충돌로 한껏 소란스러워졌다.
그 때문에 연우는 극권의 군주에 맞서면서도, 주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이쪽을 관찰하고 있는 기어 다니는 혼돈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가장 신경 쓰였고.
하나둘씩 이쪽에 관심을 두고 타계의 신들이 다가오는 것도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물론, 일반적인 타계의 신이라면 사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 놈들이야 검뢰를 몇 번씩 때려 넣어 주면 알아서 갈려 나갈 놈들일 테니까.
하지만.
‘외신들이, 너무 많아.’
특히 그중에서도 저만치 뒤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굴면서도, 이쪽에 조금씩 관심을 보이는 놈들이 문제였다.
기어 다니는 혼돈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이라 불린다는 족속들.
검은 풍요의 요신(妖神).
이름 없는 안개.
불결의 근원.
춤추는 녹색 불길.
멸망을 노래하는 자.
언젠가 계시록에서 이름만 보았을 뿐, 그 존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이들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뿐만 아니라, 천계의 존재들도 관측을 시도하고만 있을 뿐, 직접적으로 대면한 적은 없다시피 한 존재들.
편재성(遍在性), 현실 왜곡, 인과 조작, 무형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불완전한 신격들이 봤을 때에는 전지와 전능을 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강대하다던가.
흔히 질서 진영으로 분류할 수 있는 천계의 존재들은 우주가 창시되면서 탄생되었다.
그렇기에 천계에서도 저들만큼은 타계의 신, 그리고 외신들 중에서도 따로 분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몽땅 뭉뚱그려 이렇게 지칭했다.
혼세팔신(混世八神). 이쪽 세상에서는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우주를 지배하는 여덟 개의 신격들이라고.
저들은 이미 그전부터 칠흑왕과 함께 존재하였으니, 일반적인 존재들이 관측할 수 없는 현상을 가리키기도 했다.
때문에 천계에서도 저들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경계심과 두려움을 주는 편이었다. 초월자들에게 있어 그들이 알 수 없는 미지(未知)란, 공포의 영역이 될 수밖에 없으니.
그나마 연우는 일부이긴 해도 계시록을 본 적이 있고, 칠흑왕의 후예가 되면서 저들에 대한 지식이 좀 더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전부 ‘이 시대’에서는 아직 성립되기 전이었다.
애당초 ‘타계’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기 전이었으니까.
탑은 세워지지도 않았고, 신과 악마들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천마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초월자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우주와 차원만을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오만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연우는 ‘밤’이라는 존재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는 우라노스에 대한 의문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장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 따윈 없지만.
어쨌거나 당장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극권의 군주와 기어 다니는 혼돈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판국에 혼세팔신의
관심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가장 연우의 심기를 복잡하게 만드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경계의 거주자.’
‘밤’에서도 가장 끝.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거대한 눈이 있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이나 다른 거대 외신들도 한 줌으로 여기게 만들 정도로 강대한 신격을 지니고 있는 것.
얼핏 보면 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시선은 연우를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화가 크게 떨릴 정도였다.
[‘밤(녹스)’의 모든 이목이 당신에게로 집중됩니다.]
[‘경계의 거주자’가 당신을 관찰합니다.]
[‘경계의 거주자’가 ‘밤(녹스)’의 바깥에 어떤 존재가 살고 있단 사실에 강한 흥미를 품습니다.]
[‘경계의 거주자’가 ‘밤(녹스)’의 바깥 존재인 당신에게서 어째서 익숙한 향이 느껴지는 건지 의구심을 가집니다.]
계시록의 일부만 보았기에 경계의 거주자에 대한 지식도 아주 짧았지만.
그래도 얼핏 알고 있기로, 녀석은 질서 진영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태생적 한계 때문에 탑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경계의 거주자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런 녀석과 부딪쳐서 좋을 건 없을 테니까.
그런데 녀석이 자신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분명 좋지 않은 신호였다.
무엇보다.
[‘혼세팔신’이 당신을 관찰합니다.]
[‘혼세팔신’이 당신을 관측하고자 합니다.]
[‘혼세팔신’이 당신을 분석하고자 합니다.]
[‘혼세팔신’이…….]
……
[‘혼세팔신’의 관측이 당신의 존재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본 신화에 이물질(혼돈의 질료)이 섞여 들었습니다.]
[본 신화에 이물질(무질서의 원료)이 섞여 들었습니다.]
……
[경고! 너무 많은 이물질이 신화에 섞일 시, 신화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정체성 붕괴는 균열을 가져올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경고! 본 신화는 현재 허락되지 않은 장소인 ‘밤(녹스)’에 너무 장시간 동안 노출되었습니다. 신화의 균열을 초래할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탈출하십시오.]
혼세팔신은 ‘밤’,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들. 특히 경계의 거주자는 그들의 부왕(副王)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 이들이 연우를 관찰한다는 것은 ‘밤’이라는 세계가 통째로 연우를 구속하려 한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한바.
경고 메시지대로 절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녀석들의 관심이 계속 커질수록, 활동이 계속될수록, 세계의 구속력은 자꾸만 커지겠지.
연우에게는 절대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자칫하다가 이 세계에 구속되거나, 그걸 어찌 피한다고 해도 저들에게 포획될 위험도 컸다.
‘할아버지가 그냥 재밌자고 이런 짐승 소굴에다 날 던져 넣으셨을 리는 없어. 그럼 대체 뭘 유도하시려는 거지?’
시간이라는 관념을 깨우치라는 의미인 건 알 것 같다. 모든 게 정지한 세계에서, 시간이 그저 절대적인 법칙이 아닌 그저 관측자의 주관적인 개념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알라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질료를 감지했다고, 프네우마를 조금씩 깨우치고 있다고, 그런 메시지가 떴었어. 그럼 이 뒤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질료를 감지했다면 그걸 추출하는 법은? 사용하는 법은? 프네우마에 적용시키고,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은?
사실 질료는 조금 전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천안통과 천이통이 연결되면서 ‘밤’을 따라 이질적인 뭔가가 손끝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꿈쩍도 않고 있지만, 신력을 사용한다면 강제로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걸 효율적으로 다루는 법을 모르고서야 방해만 될 뿐이다.
사용법이 있을 것이다.
‘질료’라는 이름이 붙은 이것들을 이용해서 시간이라는 관념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 거기에 타계의 신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대답도 금세 나왔다. 아니, 이미 이전부터 떠올리고 있었다.
시차 괴리. 거기에 어떤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시차 괴리는 원래 내 사고 속도를 빠르게 해서 외부 세계를 인위적으로 느리게 보이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그걸 그렇게 ‘보이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만든다면?’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전부를 다 그렇게 만들 필요는 없어. 그저 내가 인지하고 있는 곳만…… 이 좁은 공간의 ‘굴레’만 최대한 느리게 굴릴 수 있다면……?’
그제야 조각조각 났던 퍼즐들이 연결되어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질료는 바로 그런 ‘작은 굴레’를 이루는 수레바퀴의 굴대(軸)다. 프네우마는 이 굴대를 움직이게 만드는 손잡이…… 시차 괴리는 그걸 굴리는 방식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자, 한순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축하합니다! 프네우마에 대한 개념을 깨달았습니다!]
[프네우마(πνεύμα)는 ‘본디 태초를 깨운 거대한 무언가가 남긴 숨결’입니다. 이 숨결을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보다 영혼이 풍요로워지고, 자유에 근접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보지 못했던 계시록의 뒷장을 획득하였습니다.]
[우주의 비밀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태초와 종말에 대한 단서를 획득하였습니다.]
……
[칠흑왕이 당신을 보면서 가볍게 미소를 짓습니다.]
[칠흑왕이 차근차근히 성장하는 후예를 흥미롭게 살핍니다.]
……
[‘프네우마의 하늘’의 기초 편을 깨달았습니다!]
칠흑왕이 관심을 보였다는 메시지가 망막 한쪽에 떠올랐지만.
연우는 당장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차 괴리의 특성을 외연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원료가 필요해. 원료는…… 내 의념이 될 테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다면 의념 통천을 보다 더 강하게 단단히 세울 필요가 있어.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내 생각이 곧 세상의 ‘굴레’를 굴릴 수 있을 만큼.’
[‘프네우마의 하늘’의 응용 편을 깨달았습니다!]
[의념의 개념이 프네우마 카테고리 안에 통합되었습니다. 지금부터 프네우마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권능, ‘프네우마의 하늘’이 생성되었습니다!]
‘시간의 굴레를 어떻게든 느리게 감는다.’
연우는 다시 잿빛으로 된 불덩이를 토해 내는 극권의 군주를 옆으로 쳐 내면서, 두 눈을 깊게 가라앉혔다.
[권능, ‘프네우마의 하늘’이 작동하여 ‘작은 굴레’에 간섭합니다!]
[‘작은 굴레’가 굴러가는 속도가 현저히 감소합니다.]
[인과율이 작동합니다.]
[일정 범위에 걸쳐 시간이 현저히 느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