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스퀴테 (15)
[천마가 강림합니다!]
[경고! 본 신화로 해석을 감당하기 힘든 거대 존재가 출현하였습니다! 신화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경고! 본 신화로 연출할 수 없는 거대 존재가 ‘의지’를 갖고 활동합니다! 신화가 붕괴될 위험이 있습니다! 당장 재생을 멈추십시오!]
[경고! 본 신화로 표현하기 힘든 거대 존재가 신화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당장 현장에서 벗어나십시오!]
[경고! 본 신화로…….]
……
천마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개판이구만.”
“…….”
“…….”
“…….”
“응? 아주 개판이야.”
그 말에 우라노스와 메타트론, 바알은 허리를 쭈뼛 세웠다. 그리고 혹여 천마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고개를 옆으로 슬쩍 돌리기까지 했다. 미간부터 뺨을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연우는 어쩐지 그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인성질로는 아버지에 못지않던 할아버지가 저렇게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 영 어색했던 것이다.
메타트론과 바알도 마찬가지. 그들은 무수히 많은 신과 악마들에게 경외와 두려움을 안기던 최고위(最高位)가 아니던가. 신과 악마를 대표하는 수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다과회의 과자처럼 천계의 운명을 제 입맛대로 좌지우지하기도 하던 흑막들이기도 했었는데, 그런 그들이 두려워하는 상대라니.
‘천마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칠흑왕에게서는 공포를 느껴서 뒤통수를 때렸다고 말하더니. 천마에게도 저래서야 ‘낮’으로 전향해도 별다를 게 없잖은가.
‘아닌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라.’
사실 따지자면 조금 달랐다.
뭐랄까. 칠흑왕에게서 느끼는 공포는 죽음조차 아무렇지 않을 만큼 깊디깊은 미지의 것이라면, 천마에게서는.
‘마치 동네 뒷골목에서 잔뜩 심통이 난 골목대장이라도 만난 것 같은……?’
왜 있잖은가. 삥 뜯길 때 분명히 주머니 뒤져서 10원당 한 대라고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없다고 버티다가 신발 밑창에 꿍쳐 뒀던 5만원짜리 지폐를 들켰을 때의 섬뜩함.
유일하게 ‘황’의 자리에 앉았다는 천마에게 사실 그런 표현이 적당할까 싶기도 했지만.
어쩌겠나. 지금 우라노스 등의 표정이 저런 것을.
연우는 일순 멍해져서 ‘낮’을 이끈다는 저들 세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대적할 여지도 주지 않는 천마와의 격 차이를 다시 절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고.
심지어 방금 전까지 요란하게 싸우고 있던 경계의 거주자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싸움을 멈춘 채, 그저 고요한 눈으로 천마를 바라보기만 할 뿐. 물론, 그래도 ‘밤’의 확장은 조금씩 이뤄지고 있는 중이었지만, 속도는 이전보다 훨씬 줄어 있었다.
그들로서도 섣불리 움직이기 힘든 것이리라. 칠흑왕을 공허에 처박은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자칫 잘못 다퉜다간 모든 게 끝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공포와 경계에 찬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알면서도 그냥 무시하고 있는 건지, 천마는 ‘밤’을 가만히 보면서 나지막한 어투로 누군가를 불렀다.
“야, 바알.”
“예, 예입!”
바알이 절도 있게 허리를 빳빳히 세웠다. 안색이 조금 전보다 더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똑바로 안 하냐?”
“시정하겠습니다아앗!”
“내가 저것들 잘 감시하라고 했었지?”
“그, 그렇습니다!”
“근데 한눈을 팔아? 내가 요즘 신경 잘 안 쓰니까 살판났지?”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한눈판 적, 없습니다!”
“그럼 주둥이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는 뭐냐?”
“……!”
바알은 화들짝 놀라 재빨리 손등으로 입가 주변을 털었다.
천마의 미간에 골이 더 깊게 했다.
“하여간 이것들이 빠져 가지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가뜩이나 마누라 등쌀 때문에 힘 빠져 죽겠는데.”
천마는 한순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일단.”
슬쩍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것들부터 제자리로 돌려놓고 시작하자.”
그 순간, 천마의 눈동자 위로 기광(奇光)이 번뜩였다.
동시에.
위기를 짐작한 경계의 거주자가 재빨리 제자리를 이탈했다.
파앗!
방금 전까지 경계의 거주자가 있던 자리로 천마가 나타났다. 그는 짜증 가득한 얼굴 그대로, 여의봉을 거칠게 휘둘렀다. 공간이 떠밀렸다.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하지만 연우의 눈에는 여의봉이 공간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법칙의 흐름을 깨는 것으로 비쳤다.
아니, 세상을 이루는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들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세상의 흐름이, 차원의 흐름이 변하고 있었다. 모든 우주의 한가운데에 천마가 있었다. 그가 있는 좌표를 중심으로 세계 질서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전 우주의 중추(中樞)였으며, 모든 법칙이 질서를 잡는 시발점(始發點)인 것이다.
세계가 한 사람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광경은, 단순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엄청났다.
퍼어어엉!
경계의 거주자는 그 충격파를 전부 소화해 내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났다. 마치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잎처럼. 우라노스와 메타트론, 바알을 동시에 상대할 정도였던 녀석은 단순한 일격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져야만 했다.
그래도 녀석은 ‘밤’의 부왕 자리를 차지한 것이 절대 요행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신격이 흔들릴 정도로 큰 충격을 안았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도중에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그러고는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발로 지면을 거세게 내리찍었다. 그러자 지면이 쩌거걱 갈라지면서 좌우로 높다란 토벽이 세워지고, 그 사이로 ‘밤’이 채워지면서 무수히 많은 ‘눈’들이 나타났다.
경계 거주자의 본체와 닮은 것들.
그것들 하나하나가 차원과 우주라는 공간을 구분 짓지 않고, 과거부터 미래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나열도 무시해 버리며 모든 현상들을 관찰하고 기록한다는 ‘문’의 연장선이었다.
〈전지적 관찰자〉
〈전능적 주시자〉
〈전체적 숙람자〉
그 시선에 노출된 존재들은 절대 거기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읽히게 된다. 생각, 사고, 행동, 예측…… 그런 것들을 전부. 심지어 시공의 제약도 받지 않고서.
그리고 읽힌 모든 것들은 경계의 거주자가 가지는 의지대로 강제로 비틀리게끔 되어 있었다.
노출된 대상에게 부여된 인과율을 강제로 조정하는 힘. 원한다면 대상의 생각까지 강제로 비틀어 스스로 자살하게 만들 수도 있는 힘이었다.
그렇기에 타계의 신을 비롯한 ‘밤’의 존재들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전지(全知)와 전능(全能)을 가지고 있노라고.
그분을 제외한다면.
세상의 모든 섭리를 쥐고 있는 최고 존재가 바로 경계의 거주자였다.
그리고.
『잠겨라.』
『떨려라.』
『가려라.』
『꿈꿔라.』
『아파라.』
『미쳐라.』
『죽어라.』
천마에게 고정된 모든 시선들이, 그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인과율과 삼라만상에 강제로 개입하고자 했다.
언령(言靈)이 부과되었다. 특정한 알고리즘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정해진 효과만 발휘할 수 있는 권능과는 전혀 다른 체계를 지닌 신의 언어가 발동된 것이다.
휘휘휘-
촤촤촤촤!
순간, 천마를 중심으로 모든 법칙이 비틀렸다. 공간을 뚫고 튀어나온 ‘밤’의 검은 아지랑이가 그의 사지를 속박하고, 살갗을 뚫어 체내로 스며들었다. 천마를 감싼 황금색 광채가 순간 잠잠해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찰칵.
찰칵.
어디선가 그런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오, 제법인데.”
하지만.
“근데 어쩌니? 글렀는데.”
쿠쿠쿵-
와장창!
언령이 천마와 인과율을 강제 조작하기도 전에 전부 취소가 되고 말았다. 아니, 그보다 더 고차원적이었다. 모든 것들이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애당초 시작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연우에게는 낯설지 않은 현상이기도 했다. 방금 전 들었던 소리. 분명히 ‘굴레’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분명히 경계의 거주자에게 시선을 노출되고 있는 이상, 시간을 조작한다고 해서 언령까지 회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천마는 ‘작은 굴레’가 아니라, 온 우주를 상징하는 ‘큰 굴레’를 아무렇지 않게 되돌리면서 인과율도 똑같이 리셋(Reset)을 시키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파앗!
그리고 천마는 여유로워진 그대로 내달리면서 경계의 거주자 앞에 섰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여의봉이 뱅그르르 돌았다. 끄트머리가 황금색 광채를 토해 내면서 단숨에 앞으로 쏘아졌다. 경계의 거주자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공간을 왜곡시키면서 쌓아 둔 굴곡장(屈曲場)이 모조리 관통되면서 녀석의 가슴팍에 다다랐다.
퍼어엉!
그런 소리가 났다.
동시에 경계의 거주자를 에워싸던 ‘밤’의 모든 것들이 거기에 갈가리 찢겨 나갔다. 가뜩이나 연우로 인해 다쳤던 오른쪽 가슴이 터지면서 검은 신력이 핏물처럼 허공으로 튀었다.
모든 공격과 방어가 아무렇지 않게 무위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경계의 거주자는 일절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애당초 천마가 자신의 잣대로 판별할 수 없는 규격 외의 존재라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이런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하나. 그저 침착하게 천마의 공격에 대응할 뿐.
『허물어라.』
『스러져라.』
『없어져라.』
‘밤’에 맺힌 ‘눈’들은 여전히 천마를 응시하고 있었고, 다시 발동된 언령은 한 번 더 그를 제어하고자 했다. 물론, 이번에도 별다른 효과도 보지 못한 채, 접근하지도 못하고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경계의 거주자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검은 풍요의 요신’이 강림합니다!]
[‘이름 없는 안개’가 강림합니다!]
[‘불결의 근원’이 강림합니다!]
……
여태껏 ‘낮’의 계속된 방해로 출현할 수 없었던 남은 혼세팔신이 모두 한꺼번에 강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엄청난 몸집을 자랑하는 그들의 본체가 전부 등장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웜홀이 너무 작은 데다가, 시간도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신력을 잔뜩 뭉쳐 만든 화신체는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 한 영압(靈壓)을 품고 있어 그들을 둘러싼 공간 전체가 마구잡이로 휠 지경이었다. 공간 도면상 위의 좌표가 붕괴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어떤 녀석들은 오크나 트롤과 같은 몬스터의 외형을 지니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녀석은 촉수 다발로 이뤄지거나 머리가 여럿 달린 갑각류의 형태를 가지기도 하는 등 기괴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놈들은 천마의 앞을 가로막았고.
하아.
하아.
경계의 거주자는 혼세팔신의 화신체들을 장벽 삼아 뒤로 멀찍이 떨어진 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뺨 위로 굵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전신을 뒤덮은 상처를 따라, 밑 깨진 장독대처럼 신력이 마구잡이로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천마와의 충돌을 버텨 내는 게 한계까지 다다랐었다는 증거였다.
쿠르르르-
천마도 그제야 몰아붙이는 걸 중단하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안색이 희게 질리기 시작한 경계의 거주자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며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혼세팔신과 다르게, 그는 여전히 산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롭게 웃고 있었지만.
호흡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신력도 여전히 평온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우라노스 등은 속으로 단단히 질려 있었다.
영락을 거듭하여 이제는 저들이 버겁기만 한 자신들과 다르게, 천마는 예나 지금이나 압도적인 격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황’이란, 신들에게도 너무나 까마득하게만 보이는 위치였다.
당장 질서의 우주에서 저만한 신위를 선보일 수 있을 존재가 몇이나 더 있을까?
천마의 다른 얼굴들?
아니면…… 항시 강함을 갈구한다는 비마질다라나, 홀로 마경(魔境)을 일구며 한적하게 지낸다는 동주칠마왕의 맏형인 우마왕(牛魔王) 정도나 되어야 저기에 비벼 볼 수 있지 않을까?
여하튼 충격적인 건 사실이었다.
물론, 그건 칠흑왕을 제외하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던 혼세팔신들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천마, 너는 허공록에 얽매여 크게 움직이지 못한다고…… 들었었는데……?”
경계의 거주자는 숨을 제대로 고를 겨를도 없이 입을 열었다. 맘 놓고 신격을 추스를 여유 따윈 주지 않을 테니, 경계심이 바짝 선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칠흑왕을 공허에 처박은 뒤로 많은 힘을 소진해, 창공 도서관에서 힘을 비축하고 있다던 천마가 어떻게 여기서 등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동안 ‘밤’이 칠흑왕의 흔적을 수색하기 위해 나선 것도, 전부 천마가 함부로 나서지 못할 거란 계산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타났다는 것은…… 무언가 계산에 착오가 있단 뜻이었다.
하지만.
“하! 자뻑도 유분수지. 너네들 너무 스스로를 고평가하는 거 아니냐?”
천마는 그런 경계의 거주자와 혼세팔신들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설마 여기 있는 내가 본체라고 생각하는 거였어?”
“그게 무슨……!”
무언가 잘못되었단 생각에 경계의 거주자는 경악성을 내뱉었고.
“검지만 튕겨도 뒈질 새끼들이.”
“……!”
“……!”
“……!”
뒤늦게 그 말뜻을 알아챈 혼세팔신들은 전부 큰 충격에 젖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