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신화 붕괴 (1)
운명?
그런 게 있다고?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말.
연우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는 말.
하지만 그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도망쳐라, 손자야!”
천마의 여의봉을 겨우 막고 있던 우라노스가 마력을 담아 일갈을 내질렀다.
콰아앙!
연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양쪽 하늘 날개를 활짝 내뻗치면서 내빼야만 했다.
[6차 용체 각성]
[권능 전면 개방]
이미 그는 하늘 날개를 깨우치면서 본체에 필요한 권능과 신화는 전부 끌어들인 상태. 당연히 몸 상태는 어느새 본체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빠른 도주를 시도할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천마와 맞부딪쳤다간 죽는다.
가뜩이나 ‘밤’과의 충돌로 인해 크로노스의 신화가 크게 어지러워진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천마에게 죽는다고? 그건 완전한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크로노스라는 존재 자체가 지워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야 붕괴되는 신화에 매몰되는 연우도 살아남긴 힘들겠지. 아니, 천마가 그 정도도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마 저 천마는 이곳이 어느 존재의 신화 속이고, 그곳을 유영하고 있는 연우로부터 무언가를 읽어 낸 것인지도 몰랐다.
화안금정은…… 모든 진실을 엿보는 법이니까. 특히 천마의 눈은 그보다 더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딜!”
천마는 우라노스를 옆으로 밀어내면서 어떻게든 연우를 잡고자 왼손을 뻗었다.
휘이잉!
막대한 인력(引力)과 함께 일대 공간이 그의 손에 붙들려 그대로 뜯겨 나갔다. 연우가 상당한 거리를 벌려 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부 무시당하고 만 것이다. 그의 왼손이 재빨리 연우의 목덜미를 움켜쥐려는 순간.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네만.”
“거기서 멈춰 줬으면 하는데?”
콰르릉-
쿠쿠쿠!
어느새 메타트론과 바알이 연우 옆으로 공간을 열고 나타나 천마에게 공세를 퍼부었다. 새하얀 섬전이 튀어 오르고, 검은 저주가 천마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동시에 올림포스의 공신들도 나타나면서 천마를 막아서고자 했다.
덕분에 연우는 천마와 다시 간격을 벌릴 수 있었고.
“이 새끼들이.”
천마는 다시 목표를 놓치게 되자,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리면서 으르렁거렸다.
“안 비켜?”
파직, 파지직-
콰르르릉!
천마에게서 삐져나온 황금색 빛무리가 단숨에 뇌성벽력이 되어 그를 에워싼 신격들의 권능을 전부 지워 버렸다.
“……으으음! 친우의 아들, 아니, 손자 구해 주려다가 잘못하다간 우리가 낭패를 입겠는걸.”
메타트론은 멀찍이 떨어지면서 천마를 보며 난감하다는 듯이 혀를 찼지만,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은 천마의 일거수일투족을 예리하게 쫓고 있었다.
“자네가 왜 우라노스의 새끼를 노리는지는 모르겠네만, 그래도 길은 열어 줄 수가 없다네. 프네우마…… 아니, 프네우마와 퀴리날레의 후손을 이리 쉽게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그리고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이 이상 날 뛰는 건, ‘협정’에도 위반되는 것이고.”
그러면서 쌍검을 뽑아 천마에 맞서고자 했다. 어느새 대천사의 무리들도 몰려와 천마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낮(에로스)’이 천마에게 적의를 띱니다!]
천마는 비딱하게 고개를 외로 꼰 채로 그들을 쓱 훑어보다가.
“협정? 웃기는군. 그 속에 칠흑의 ‘알’이 될지도 모르는 것을 지킨다는 내용도 있던가?”
“‘알’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좋아. 그렇게 생각한다 그 말이지?”
흉포하게 웃었다.
“그럼 전부 모가지가 돌아간 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자.”
콰아아앙!
천마가 빠르게 움직였다.
『전부 조심해라!』
메타트론의 경고와 함께.
‘낮’과 천마가 충돌했다.
쿠쿠쿠쿠!
* * *
‘이게 대체……!’
쐐애애액-
연우는 쉴 새 없이 공간을 넘어 다니면서 천마의 인지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다.
하지만 천마의 속성과 신위는 빛.
이 우주에 빛이 닿지 않는 자리는 어디에도 없으니, 그의 인식 영역에서 완전히 탈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우라노스 등이 시간을 벌어 주는 동안, 어떻게든 최대한 멀어지고자 했다.
닥치는 대로 임의의 좌표를 붙 잡아 계속 열어 젖히고 있는 중이라,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신의 사회, ‘데바’의 영역에 입장하였습니다.]
[‘데바’의 신들이 갑작스러운 방문객의 등장에 당혹스러워합니다.]
[아그니가 당신을 살핍니다.]
[바루나가 당신을 의심합니다.]
……
[브라흐마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
[신의 사회, ‘아스가르드’가 예기치 못한 불청객의 입장에 인상을 찡그립니다.]
[오딘이 눈을 가늘게 뜹니다.]
[토르가 당신의 행로를 지켜봅니다.]
……
[‘멤파스’의 영역을 지났습니다!]
[‘딜문’의 영역을 지났습니다!]
……
그 와중에 여러 사회의 영역을 지나면서 이목을 사기도 했지만, 다행히 그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게 정말 크로노스의 신화 속이 맞나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저 일개 신화에 불 과할뿐인데도, 이토록 넓은 세계를 모두 수용하고 연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
[신화가 붕괴됩니다!]
[신화가 붕괴됩니다!]
……
[붕괴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본 신화에서 탈출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신화에 함몰될 시, 빠져나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연우는 신력이 거의 소진되었을 즈음 해서야 겨우 이동을 멈출 수 있었다.
본체의 신화를 일부 끌어다 썼다고 해도, 육체가 본체처럼 완전한 건 아니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 육체에는 드래곤 하트도, 현자의 돌도 없었다. 이미 과부하도 단단히 걸려 몸 여기저기가 삐거덕대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지만 그래도 연우는 천마의 시선이 따라붙을 것을 염려해 결계를 몇 겹이나 둘러치고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몰랐다. 좌표도 이리저리 꼬인 탓에 측정하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생명체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행성만 찾으며 움직이다 보니, 신력만 잘 갈무리한다면 눈에 띌 일은 크게 없을 듯했다. 심지어 항성에서도 제법 거리가 멀어 빛이 닿지 않는 죽은 행성이었다.
“이제, 어쩌지?”
연우는 이를 바득 갈았다. 어쩌다 이렇게 일이 꼬이고 만 것인지.
프네우마의 하늘을 깨닫고, ‘밤’과 ‘낮’으로 대변되는 우주 창생의 비밀을 얼핏 엿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천마가 갑자기 이렇게 적의를 보일 줄은 생각도 못 했던 탓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2:57:49_25]
[2:57:49_24]
……
[제한 시간이 3시간도 남지 않았습니다. 빠르게 목적을 완수하고 신화를 나올 것을 권고합니다.]
[제한 시간을 초과할 시, 과도한 재생으로 인해 신화에 자아가 잡아먹힐 우려가 있습니다.]
카운트는 이 시간에도 착실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프네우마의 하늘로 시간을 현저히 느리게 굴러가게 한 것이 겨우 이 정도였다.
그것도 아니었다면 이미 도주하고 있는 와중에 제한 시간을 훨씬 초과하여 신화에 파묻히고 말았겠지.
남은 시간은 극도로 적고, 신화는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무너지고 있었다. 아마 제한 시간과 붕괴 시간이 얼추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게 고작 그가 할 수 있는 예상일 뿐.
‘재생’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기미가 있다고 해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어떻게든 붕괴되지 않고, 수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자신으로 인해 아버지가 다시 희생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방법을 찾으려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만 할 텐데.
언제 어디서 천마가 나타날지 알 수 없으니 그러지도 못했다. 사실 겨우 숨어 있는 이곳도 언제 그에게 발각될지 몰랐다. ‘황’에 다다른 천마라면, 분명히 전지와 전능도 갖추고 있을 테니까.
‘할아버지는 무사하실까?’
우라노스나 메타트론, 바알 등 ‘낮’의 소속원들도 괜찮을지 걱정이 들었다.
부디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천마가 제아무리 ‘낮’과 손을 잡은 관계라고 하지만, 그의 성격상 적이라 인식된 이들까지 내버려 둘지도 의문이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마치 무거운 돌을 얹어 놓은 것처럼.
“젠장……!”
연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천마의 발을 묶으면서, 신화도 함께 수복할 수 있는 방법을.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빠르게 일을 해치워야만 했다.
다만, 그렇게 편한 수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없는 건, 아니다.’
연우의 머릿속을 스치는 뭔가가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가능성이 있냐는 것이고, 자칫 혼란해진 신화를 더 혼탁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는 것인데…….
그. 생. 각.
난. 괜. 찮. 동. 의.
그 순간, 갑자기 연우의 머릿속으로 익숙한 의념이 울렸다.
[흡수된 ‘기어 다니는 혼돈’의 두 신화가 뒤섞이며 자아를 각성합니다!]
[‘기어 다니는 혼돈’의 자아가 당신을 보면서 이죽거립니다.]
등골이 쭈뼛 섰다.
뭐지? 왜 이놈이 느껴지는 거지? 분명히 천마가 ‘밤’의 영역으로 튕겨 내는 걸 봤었는데? 아니면 이쪽에서 ‘밤’으로 건너오기라도 한 걸까?
연우는 본능적으로 검으로 손을 가져가며 검뢰를 피워 올렸고.
그. 렇. 게. 해. 도.
나. 못. 찾.
녀석은 그런 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킬킬거렸다.
그제야 연우는 녀석이 이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한복판에서 말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아. 이렇게 하면, 되나?』
기어 다니는 혼돈은 여러 의념들을 하나로 정제하면서 천천히 말을 걸었다.
『이렇게 언어로 사고를 정리해서 내보내니, 중구난방으로 여러 의념을 풍기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표현도 간결해져서 좋군. 대신에 그만큼 프로세스가 너무 간단해져서 사고가 획일화되고 우둔해질 우려가 크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뭐,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엔 이보다 좋은 건 없는 것 같군. 제아무리 미개한 피조물이라 해도, 배울 건 배워야겠지.』
그러면서 흡족한 웃음기를 띠는 것이, 스스로에게 제법 만족한 눈치였다.
“분리했던 신화…… 그걸 잔재 신화와 섞어서 자아를 깨운 건가?”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이 천마에게 내쫓기 직전에 한쪽 팔을 뜯어 하데스의 식령검에 먹히게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기어 다니는 혼돈의 두 신화가 서로 호응했다는 메시지를 보긴 했지만, 설마하니 이런 용도였을 줄이야.
『난 궁금한 건 절대 참지 못하는 성미라서 말이지. 큭큭.』
기어 다니는 혼돈에게 있어서 연우란 존재는 노다지나 다름없었다. ‘밤’과는 전혀 다른 ‘낮’의 세계부터, 미래에서 찾아온 다른 시간대의 존재. 그리고 그가 자신을 죽이기도 했으니 어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기어 다니는 혼돈은 이대로 떠나면 다시는 이번처럼 재미난 기회를 만나지 못할 거란 생각에 자신의 일부를 뜯어놓고 가는 기행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가정이 틀렸어.』
“그게 무슨 말이지?”
『난 신화를 분리한 적이 없다만. 필요 없는 부위를 버린 적은 있어도 말이지.』
“……!”
연우는 녀석의 말뜻을 알아채고, 눈을 부릅떴다. 저 말은 자신에게 깃든 자아가 본체이고, ‘밤’의 영역으로 내던진 것이 분신이란 의미였으니까.
더군다나 녀석은 자아는 깨웠을지언정, 연우에게 어떻게 해코지는 절대 못 할 상황이었다. 이미 녀석은 식령되어 천천히 소화가 이뤄지고 있었으니까. 뒤섞인 신화들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자아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정말이지, 연우로서는 이해를 하려야 할 수가 없는 정신 구조였다. 미쳐도 이렇게 미친놈이 있을까.
그렇기에 연우는 이대로 녀석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찝찝했다.
‘무슨 꿍꿍이를 가질지 모르니까. 차라리 놈의 신화만 분리해서 내버리는 것도…….’
연우가 눈을 차갑게 빛내려는데.
『후후. 나를 떨쳐 내려는 생각을 하는 건 좋다만, 과연 한눈을 팔 겨를이 있을까?』
기어 다니는 혼돈이 이죽거렸다.
연우는 재빨리 고개를 위로 들었다.
[천마의 시선이 다가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아무래도 천마가 ‘낮’의 방해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둠만 잠긴 행성 위로, 빛이 닿고 있었다.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한 줄기의 빛. 천마의 의념이 섞인 ‘시선’이었다.
결계를 아무리 겹겹이 쳤다고 해도, 저 시선이 닿는다면 들킬 수밖에 없다.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에 대한 염려를 뒤로 미루고 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직 신력이 다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여기서 한번 정면으로 부딪치거나 다시 도주를 시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이 점차 행성을 지나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계하는데.
『도와줄까?』
“뭐?”
『천마의 시선으로부터 회피할 수 있게 도와주겠단 뜻이다. 그대가 죽어서야, 나도 힘들게 자아를 이쪽으로 옮긴 보람이 없지 않은가?』
연우는 기어 다니는 혼돈의 도움을 빌린다는 게 영 꺼림칙했지만,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돕는다는 거지?”
『천마는 빛, 그 자체다. 그렇다면 어둠으로 가려야지. 우리더러 ‘밤’이라고 부른다지? 그런다면 그 힘을 빌려 어둠 속으로 숨으면 될 일이 아닌가.』
“하지만…….”
『시간이 없지 않냐고? 글쎄. 아버지의 후계인 그대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 괴상한 법칙을 부려도 될 테고.』
연우는 프네우마의 하늘을 사용하면 되지 않냐는 충고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권능, ‘프네우마의 하늘’이 작동하여 ‘작은 굴레’에 간섭합니다!]
[‘작은 굴레’가 굴러가는 속도가 현저히 감소합니다.]
[인과율이 작동합니다.]
[일정 범위에 걸쳐 시간이 현저히 느려집니다!]
연우는 재빨리 자신의 주변 일대의 시간만 느려지게 한 다음, 기어 다니는 혼돈이 일러 주는 대로 결계의 구조식을 새롭게 짜넣었다.
이미 에메랄드 타블렛을 연구해 둔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타계의 지식을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천마의 시선이 당신에게로 향합니다!]
[천마의 시선이 결계에 닿았습니다!]
[천마의 시선이 당신을 살핍니다!]
어느새 다가온 빛줄기가 그가 있는 결계에 한참 머물렀다.